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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제국의 위안부_2판_231029 el domingo, veintinueve de octubre_Воскресенье, двадцать девять Октябрь

어제(10/28) 학문의 자유를 근거로 무죄판결을 받은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 이파리에서 출간되었고, 뿌리와 이파리 사장 정종주도 이에 대해 매우 기뻐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박유하의 언행은, 평화주의도 여성주의도 아닌 반인륜 옹호자로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위안부를 읽기로 결정했다. 정종주는 변절자인가? 책이 잘 팔려서 목구멍에 풀칠을 하게 되어 기쁜 것인가? 초판 제국의 위안부 중고책이 20만원이 되었단다. 출판사가 잘 되어서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눈물을 흘리며 이러지 말라고 호소해야 하는가?

 

그를 믿고 싶기에 읽는 수고를, 남아있는 생이 짧아지고 있는데도, 아끼지 않으려고 한다.

 

2주에 걸쳐 신중하게 다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해 보니,

 

박유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만 위안부 문제를 봐서는 안되고, 일본의 입장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위안부 문제를 들여다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적어도 고노담화와 무라야마 총리가 집권한 시기에는 좀더 밀도있게 협상을 진행하면서 양보할 것과 받아내야 할 것을 정리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에 한일관계가 적어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한일관계가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아베가 한국을 혼내주려 한 것은, 일본의 침체를 막고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위안부 문제는 해결하지 못해도 한일관계를 냉각시킬 정도로 핵심문제는 아니다. 박유하는 한일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입장에서 처리하라고 하지만,  쉽지 않다. 일본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해결이 지연되고 있고, 위안부 문제는 보다 현명한 처리방법이 나올 때까지 해결을 미룰 수밖에 없다. 일본측이 일왕이나 정부의 공식 사과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과는 한 번이 아니라, 피해자가 요구할 때마다 거듭되어야 한다. 유대인에 대해 끊임없이 사과하고 있는 독일을 보라.

 

박유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인 일본군과 위안부를, 피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둔갑시켜버린다. 일제에 의한 피해자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본군도 피해자라는 주장은 일본 내에서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위안부에 대해서는, 조선을 노예처럼 수탈한 일본군이 피해자라는 주장을 할 수 없다.

 

박유하는, 위안부의 부모와 마을사람들과 조선인 포주를 직접 폭력의 가해자로 지목한다. 조선인 포주는 일본군의 공고에 따라 위안부를 모집했다. 그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다면 모집된 위안부는 원상복귀해야 한다. 공문 또는 보고서로 규정을 잘 지켜서 위안부를 모집하라고 하면서, 잘못된 모집행위에 대한 시정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안부 모집의 불법과정을 승인한 것이다. 일본군과 정부가 불법으로 만들어진 위안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조선인 포주의 폭력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위안부의 부모와 마을사람들 중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딸을, 마을의 처녀를 위안부로 팔아먹었는지를 제대로 증명해야 한다.

 

박유하의 용감한 주장에 대해, 한마디로 기가 막힌다. 제시하는 자료도, 증언도, 소설까지도 완전히 특수하다. 박유하나 정종주나 자신들이 역사에 대단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믿으며 이 책을 펴냈다면, 착각이다. 이런 용감한 주장을 하려면, 보다 충실한 증언 청취, 보다 자세한 증거자료수집이 신중하게 선행되었어야 한다. 그런 노력없이 본인들의 직관에 의해, 소설들에 의해, 한일관계의 개선이라는 하찮은 목적을 위해, 하나의 골치아픈 문제를 멋지게 양보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게으름이자 오만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다 돌아가시고 몇분 남아있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공개되지 않고, 불태워지지 않은 일본 정부의 관련 자료들이다. 할머니들의 증언자료들을 뒤지고,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을 열심히 뒤져서 공개하고 분석한 다음에 그 다음에 제대로 발언해도 늦지 않다.

 

[ 서문 ] 다시 '결과를 낳는 논의'를 위해서

 

일본이 사과하지 않는 것은, 우리와 피해국들이 행한 비판의 형식과 내용이 틀렸기 때문이니, 그것을 바꾸면 결과를 낳는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36년에 걸쳐 일제가 행한 인륜에 반하는 제국주의 침략행위가, 비판의 형식과 내용을 달리한들 무슨 점이 달라질까?

 

"일본이 주변국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면, 거기에는 이제까지의 비판의 형식과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데에도 원인이 없지 않다 (중략) 문제들을 조금 깊이 볼수있다면 분노와 비난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고 (중략) '우리 안의 견고한 기억들'에 '화해를 지향하는 균열'을 내보려 했던 8년 전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5쪽)

 

박유하는, 김학순 할머니의 폭로 이후 우리 사회가, 위안부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왔다고 단정하고 있다. 엄청난 자신감이다. 우리가 원한 위안부의 모습이라니. 우리는 진실을 원한다.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을 때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야만 상황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정보에는 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섞여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20년은 그중에서 듣고싶은 이야기만 취사선택해서 들어왔고, 그에 바탕해 위안부에 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온 세월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안의 '위안부'는 그저 가녀린 '소녀'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건 실은 그녀들 자신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원한 위안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6쪽)

 

한일협정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보상하는 방안을 마련해왔다. 통석의 념도 전해왔고, 오부치 선언도 있었다. 그런 발언들이 계속 이어졌으면 한일 관계가 이렇게까지 나빠졌겠는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롯해서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범죄는 없다는 주장이 점점 강도를 높여왔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제의 수탈에 대한 반성과 배상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나름대로 '사죄와 보상'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일부 위안부들이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지원단체는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8쪽)

 

[ 제1부 ] 위안부란 누구인가 -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 제1장 ] '강제연행'과 '국민동원' 사이

 

1. 죄와 범죄 - '강제로 끌어간' 건 누구인가

 

매우 냉철하게 현안을 보자는 이야기다.

 

1) 일본군에서 위안부 모집을 공고했고, 사회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적절하게 모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 소녀들을 유괴하여 위안부로 판 경우도 있었고, 스스로 집을 나와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었다.

3) 돈을 많이 버는 일을 소개시켜 준다고 소녀나 젊은 부인들을 유혹해서 위안부로 넘기는 자들이 있었다.

4) 일본군은, 직접 끌고간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2)와 3)의 과정을 통해서 위안부를 모집했다.

5) 그러므로 일본군은 구조의 강제성의 주체이고, 업자들과 유괴범들이 현실의 강제력을 발휘한 범죄자들이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경영했고,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모집했기에 큰틀의 책임은 있다. 그러나, 위안부 모집과정에서 거짓과 강제의 죄를 범한 것은 업자들과 유괴범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위안부들의 불행을 만든 주체가 일본군(구조의 강제성의 주체)뿐아니라 그녀들을 보낸 사람이나 학대한 사람들이기도 한 이상, 그런 그들의 죄나 범죄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구조의 강제성과 현실의 강제성의 주체가 각각 누구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27쪽)

 

2. 위안부의 전신 가라유키상 : 국가의 세력확장과 이동하는 여자들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고 유지하기 위해 위안부의 전신인 가라유키상이 필요했고, 이 일에 가난한 소녀들을 납치해 팔아넘긴 유괴범들이 가담했으나, 일제는 이를 묵인했다.

 

"1920년대엔 이미, 한국과 중국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가난한 처녀들이 하녀로 일하거나 매춘시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원래는 '해외로 돈벌러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던 '가라유키상'은, 나중에는 바다 건너로 팔려간 여자들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중략) 국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향수에 젖거나 일상의 불편함을 겪어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아, 확대된 국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흐름이었고, 그런 욕망에 동원된 것이 가라유키상이었다." (28~9쪽)

 

박유하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이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며, 증언과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1) 일제 침략기 이전부터 일본군을 위한 공창들이 활동했고, 침략이 확대될수록 공창들의 범위도 넓어졌다.

2) 식민지 조선의 여인들도 매춘부로 유인되었다.

3) 일본군이 직접 위안부를 모집한 경우도 있지만, 포주 업자들이 그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4) 조선인들도 여자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했다.

5) 위안부와 정신대는 모집 방식이 달랐다. 44년 이후에 주로 모집된 정신대는 강제력이 동원되었으며,  위안부가 아니라 공장 노동자들이었다.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기까지의 정황은 이렇게 하나가 아니었다. '강제로 끌려간 20만명의 소녀'라는 인식은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업자 등 주변 가담자의 소거, 예외 사례를 일반화한 수용이 만든 상이었다." (54쪽)

 

[ 제2장 ] 위안소에서 ; 풍화되는 기억들

 

1.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 - 지옥 속의 평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

 

박유하의 설명을 듣는 마음이 매우 무겁다. 매춘에 뛰어드는 남과 여의 상태를 다룬다. 인질과 납치범이 오래 유지될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그런 관계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상황이 이러했다는 것을 충실하게 설명한다. 위안부에게 사람으로서 수행해야 할 좋은 임무를 부여하고, 그것을 완수하고, 그것으로 위안부들의 희생은 보상받았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사람답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느끼게 하는 임무를 규정하고 부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헌신한 사람은 있는데, 피해자는 어디에도 없는 묘한 기술이다. 박유하는 그것이 현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주둔부대의 일원이자 '부인같은 느낌'이었다는 위안부들. 사실은 이것이 조선인 위안부에게 요구된 역할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군대에 투입되어, 회사에서 일하는 남성을 여성이 집에서 일하며 다시 회사에 나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군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거기에 필요한 갖가지 보조작업을 하도록 동원된 것이 위안부였다. (중략) 위안부들이 군인들과 휴일의 '평화로운' 한때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조선과 대만의 위안부들은 어디까지나 '준일본인'으로서 제국의 일원이었고 (중략) 성의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을 대표하여 전방에서 위안하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역할." (57~61쪽)

 

강간 또는 성폭력에 해당하는 사건들이 벌어지지 않는 시간대가 있다. 고문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대에,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자식의 대학진학을 고민하는 고문경찰관과 고문을 당하는 대학생 사이에도 따뜻한 기억들은 있을 것이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그런 따뜻한 기억들을 없애야 하는 것이 또다른 폭력이라고(?) 박유하는 차분하게 설명해 나간다.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을 허한 존재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나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중략) 문제는 그녀들에게는 소중했을 기억의 흔적들을 그녀들 자신이 '다 내삐렀'다는 점이다. (중략) 그리고 우리는 해방 이후 내내 그렇게 기억을 소거시키며 살아왔다. (중략) 위안소의 고통을 잊게 해주었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기억들을 무화시키고 망각시키는 것은 그녀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니었을까." (67쪽)

 

화해를 위한 시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이 있고, 반성의 시간이 계속되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비참한 과거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일본이 간절하게 물어올 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제하 일본인들도 일제의 반인륜 행위에는 저항했을테니까.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이미 충분한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졌다고 박유하는 믿는 모양이다. 정말 그런가? 만일 아니라면?

 

"위안부의 처지에 함께 눈물을 쏟는 군인. 그런 사람다운 군인 역시 우리의 기억에는 없다. 그건 일본군의 이미지가 비인간으로 정형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정형화는 수많은 기억들이 함부로 소거된 결과였다. 위안부의 상황이 하나가 아니었던 것처럼, 일본군 역시 하나가 아니었다." (70쪽)

 

성노예라는 비참한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박유하는 또다른 희생자인 일제의 희생물인 일본군을 대비시킨다. 당시에 이런 비슷한 희생자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살았다. 끔찍했지만. 그러니 이제 용서하고 잊자, 일본사람도 피해자고 조선의 여인들도 피해자였다, 전쟁이라는 것에 의해서. 일본 제국주의도 없고, 일본군도 없고, 식민지 억압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닐까. 박유하는.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온 피해자였다면 일본 군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 (중략) 가장 하위에 놓여 성과 생명을 국가에 바쳐야했던 식민지의 여성과 병사들이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중략) 몇천번이고 성교를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본 이들도 다름아닌 병사들이었다. (중략) 그녀가 이미 식민지가 된지 오래인 땅에서 자라나 자신을 일본의 일원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74쪽)

 

박유하의 과감한 주장은,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핵심을 요약하고, 그 핵심에 부합하는 증언을 끄집어내어 말하면, 그러면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기억이라는 말인가. 종합해서 듣고 핵심은 이렇다고 이야기해도, 다 이야기한 것이 아니니까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동안 위안부들은 그저 자신들이 겪은 일을 담담히 말해왔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가려서 들어온 셈이다. (중략) 그런 의미에선 우리 모두가 그들의 체험을 왜곡하는 데에 가담해온 셈이다. 그곳에서 위안부는 더이상 있는 그대로의 위안부가 아니다. 그들의 기억은 듣는 이가 원하는 '새로운 기억'일 뿐이다." (80쪽)

 

2. 전쟁터의 포주들

 

일본군은 장교나 헌병을 이용해 위안부들이 착취당하거나 폭행당하는 것을 막았고, 어린 소녀들을 되돌려주려는 노력도 했다. 그런데, 돈을 주고 유혹해 여자들을 사온 포주들은, 조선인 포주들은 달랐다고 박유하는 말한다. 핵심 범죄자는  포주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위안소는 군의 직간접 관리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중략) 민간인이 멋대로 영업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략) 종군의 주체는 위안부라기 보다는 업자였다. (중략) 단순히 일본군의 강제와 숫자만 있었던게 아니다. 업자들이 과도한 노동을 강요했던 것이고, 그런 식의 요구가 일종의 강제노동인 것은 분명하다. (중략) 위안부들을 폭행하여 그녀들의 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는 군인들뿐 아니라 포주들이기도 했다." (82~8쪽)

 

박유하는 조선의 위안부가 일제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일본인이면서 매춘부로 나섰던 여자들과 조선인 위안부들을 대비시키는 효과가 있다. 일본이 먼저 그랬고, 우리도 그랬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우리가 일본인의 지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인 위안부는 피해자이며 가해자인가?

 

"조선인 위안부들은 분명 피해자였지만, 그러면서도 일본제국 안에서 두번째 일본인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식민지인의 모순이었다. (중략) 이런 사실들이 우리 안에서는 공공의 기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식민지의 현실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그녀들은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이며, 그녀들을 만든 것이 식민지지배 구조라는 것만은 분명" (90~1쪽)

 

[ 제3장 ] 패전 직후 - 조선인 위안부의 귀환

 

1. 일본인에서 조선인으로

 

학살에 대한 증언은 일단 배제하고, 냉철하게 현실을 마주한 박유하는, 준일본인인 조선인 위안부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녀에게는 위안부 체험보다도 귀환체험이 더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중략) 일본군 높은 사람이 이들을 학살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에서 기차를 태워 보냈다는 사실 역시 일본군의 학살과는 다른 증언이다. (중략) 스스로가 위안소를 경영하는 업자가 된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일본의 패전이란 우선 그동안의 자신의 위치와 재산을 잃는 일이었다. (중략) 위안부의 가난은 업주들에게 노예같은 착취를 당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패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95~8쪽)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박유하는 거의 단언한다. 대단하다. 지금 박유하가 제시하는 증거들은 몇 권의 책과 소설을 근거로 한 추정이다.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증언이나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 증거들은 없다고 자신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에고이즘이건 국민으로서의 충성이건 일본군에 대한 비판은 그 누구보다 위안부를 발상하고 전쟁에 데려간 사람에게 향해져야 한다. (중략)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군인들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패전시 군인들이 조선인 위안부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중략)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학살당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103~4쪽)

 

살아있는 피해의 실체가 아니라, 사멸되어 대화가 불가능한 실체에게, 제국의 위안부라 명명하며 귀한 임무를 부여하고 수행한 희생자들에게, 제일 먼저 사죄를 해야 한다고, 박유하는 주장한다. 도대체 무슨 주장이 이런가?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 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 바쳐야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 (104쪽)

 

[ 제2부 ] 기억의 투쟁 - 다시, 조선인 위안부는 누구인가

 

[ 제1장 ] 지원단체의 위안부 설명

 

1. 근본 오해

 

"위안부에 관한 한국인들의 상식 -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20만명의 소녀 - 은 정대협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위안부와 정신대가 다른 존재 (중략) 1990년대 초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을 무렵의 신문을 보면 '정신대 문제에 대해 사과하라'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대협이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 (107쪽)

 

[ 제5장 ] 일본인의 부정의 심리와 식민지 의식

 

1. 조선인 위안부란 누구인가 - 소설 '메뚜기'의 위안부

 

박유하는 여러 권의 소설을 인용한다. 경험을 토대로 쓴 일본인의 소설들이지만 소설은 소설이다. 그것을 인용해서 어떤 주장을 한다는 것은, 만든 이야기를 토대로 또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감상문을 쓰는 것이다. 박유하의 의지대로 한일관계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라면, 근거들이 충분하고 설득력 있는 자료들을 제시해야 한다. 진실을 전한다고 하면서 '소설'을 등장시키면, 자신이 전하려고 했던 진실이 허구, 심하게 말하면 헛소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유하가 위안부에 대한 개념은 정확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지점에서 그것이 갈라지면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그것을 구별해내야 한다.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의식이라.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 -> 여성을 욕망 해소의 도구라는 의식 -> 위안부 제도.

 

1) 여성은 남자보다 못한 사람이므로 남자들이 사용하는 물건처럼 사용하면 돼. 그러니까 위안부 제도를 만들자.

2) 여성은 귀한 사람이니까 존중해야 해. 그러니까 위안부 제도는 만들어서는 안돼.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어도 집단윤간을 해도 된다는 위안부 제도로 가기는 쉽지 않다. 여성을 차별하니까 승진이나 다른 혜택을 주지 않을 수는 있어도, 집단윤간은 하기 어렵다. 범죄이기 때문이다. 차별은 차별이고, 위안부 제도는 위안부 제도다. 그렇지 않은가?

 

여성을 귀하게 여긴다 해도 위안부 제도는 만들 수 있다. 국가가 위험에 처해 있고, 남자들은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으니, 여자들도 할 수 있는 일을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이 위안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보수가 주어졌건 아니건 위안부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윤간이 국가에 의해 허용된 존재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한 의식은 여성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 대할 수 있게 만드는 차별의식이었다. (중략) 위안부들은 이렇게 무상노동도 강요당했다. 특히 처음 위안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들이 장교들에게 통과의례처럼 당하는 강간은 거의가 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43~5쪽)

 

조선인 위안부가 당했던 집단윤간을 박유하는 또다른 단어로 묘사하는데, '가혹한 노동'이다.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노동인 모양이다. 조선인 위안부도 매춘업에 종사했다고 확신함으로써 선택가능한 단어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혹한 노동이라는 단어는 쓸 수 없지 않을까?

 

"위안이었건 매춘이었건 보수가 혹 높은 경우가 있었다면 그건 그만큼 그일이 모두가 꺼리는 차별받는 가혹한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싼 요금은 오히려 당연하다. (중략) 이동중에도 강간을 당해야 했던 조선인 위안부들의, 몇백명이나 상대해야 하는 노동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 노동이다.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 용인되었다는 것도, 일본군에게는 묵인과 유지의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45~7쪽)

 

위안부에 대한 직접 폭력이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인지, 박유하는 일본군과 위안부를 연결하고 대비시킨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가 아니라, 둘다 피해자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렇게되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피해자만 있는 상황에서는, 진짜 가해자를 찾아야 한다.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국가는 또 직접 가해자가 아니라고 한다. 제도는 만들었지만 정상으로 운영되도록 주의를 주고 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조선인 포주들이 온갖 불법을 저질러 위안부를 유인, 납치, 착취하고, 폭행했다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는 일본 제국주의, 일본군, 조선인 위안부가 되고, 조선인 포주와 위안부가 살던 마을의 이웃사람들이 직접 가해자가 된다. 일본은 구조의 책임이 있지 가해자라고 하지 않는다. 오묘한 진실이다. 일본이 위안소를 만들었고, 일본군인이 이용했는데, 범죄는 전부 조선인들이 저질렀다.

 

"전쟁터에서의 집단위안이란, 주체도 객체도 자신이 사람임을 잊어야 하는 일이었다. 군인은 자신의 성 욕망을 때로는 행위자체를 공중앞에 드러내놓는데에 대한 수치를 잊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물건으로 대하는 일로 사람이기를 포기해야했다. 위안부는 자신의 몸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를 포기해야했다. 아시아의 해방을 명분으로 하면서도, 위안부와 병사의 비참한 상황이 보여주는 것처럼 실상은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억압하면서 이루어진 전쟁이었다는 것이, 일본의 전쟁의 가장 큰 모순이었다." (150쪽)

 

2. 관여주체는 누구인가

 

위안소를 만든 일본군에 책임이 있다.

 

"스킨십을 동반한 성 욕망이 그러한 일상 중 하나임은 물론이다. 똑같은 성욕 처리라 해도 전쟁터에서의 강간은, 오히려 일상을 벗어난 행위다. 그러므로 강간을 막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한다는 것은 병사의 일상 또한 관리해야 하는 군으로서는 필연의 발상이었을 수 있다. (중략) 군이 불법행위를 막으려했다 해도 불법 수단이 자행되는 시스템 자체를 방기했다면 시스템을 유지시킨 책임이 군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151쪽)

 

일본의 식민지배가 법에 의한 합법통치였고 온건한 통치였으며, 위안소의 운영과 관련해서는 불법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온건통치를 위해 일본은 뒤로 빠지고, 스스로 복종해 오는 조선인들을 이용해서 불법을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위안부 모집에서 업자와 포주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중략) 온건통치의 범주에 스스로 편입된 이들이 개인으로 불법을 자행한 셈이다. 그 결과 일본은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 온건통치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불법행위를 전담시켜 그들을 동족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중략) 군이 주체가 되는 강제연행을 하지 않았다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해야 한다." (153~4쪽)

 

[ 제3부 ] 냉전 종식과 위안부 문제

 

[ 제1장] 해석의 정치학 -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갈등

 

1. 위안부 문제의 발생과 경과

 

2. 고노 담화와 강제성

 

박유하의 말대로 위안부에 대한 사과가 고노 담화를 통해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1993년 8월 4일 당시의 관방장관 고노의 명의로 발표한 것이 이른바 고노 담화다. (중략) 당시의 조선반도는 일본의 통치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중략)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한국 위키피디아의 번역문)" (174쪽)

 

고노담화를 해설하면서 박유하는, 위안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이런 설명은, 위안부는 일제의 잘못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잘못이지만, 가난한 조선인들이 매춘이라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힌다.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사례는 앞에서 본 것처럼 정신대 모집의 경우를 착각한 것이거나 개인의 예외행동으로 보아야 하지만 (중략) 식민지배라는 정신의 강제체제하의 일이었다고 인정 (중략) 일본인 위안부가 아닌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다는 것은 조선에 일본에 비해 가난한 여성이 많았기 때문 (중략)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의 결과로 받아들여 사죄한 담화였다" (175~6쪽)

 

3. 여야가 합의한 아시아여성기금

 

고노담화와 아시아여성기금은 사회당의 무라야마 내각이 주도했지만, 어려운 상황속에서 합의를 이끌어낸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박유하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사회당과 무라야마의 노력이 없었다면, 해방이후 역사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억압에 대해 사죄와 반성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당수이기도 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이 내각을 이끌던 때였는데, 무라야마 내각은 그때까지 자민당이 다루지 않았던 역사문제에 대한 대응을 중요시한 내각이었다. (중략) 아시아여성기금은 각의양해에 의해 설립이 결정되었는데, (중략 / 내각의 주요한 자리를 거의 자민당이 차지하고 있는데도) 결정은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서 자민당 각료뿐아니라 반대파 의원의 합의도 얻지 않으면 각의양해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이루어낸 일이었던 것이다." (177~8쪽)

 

4. 사죄수단으로서의 기금

 

일본 정부는 국가보상을 하되 민간과 기금을 통해 우회하는 방법으로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이고, 그것은 한일협정의 결과이므로 일본측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박유하는 주장한다. 박유하는, 일본의 양심있는 관료들이 진척시킨 일을 우리가 받아들였다면, 위안부 문제가 지금처럼 꼬이고 혐한감정까지 일으키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시아여성기금은 내각의 결정에 의해 설립된 재단법인 (중략) 미마이킨(위로금)의 대상이 되는 위안부는 1천명쯤 되는 것 (중략) 기금이 간접 형태를 취한 실질 보상이었다는 사실도 명확히 알려준다. 말하자면 기금은 1965년의 협정 때문에 개인보상은 안된다는 원칙은 고수하면서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정책이었다. (중략) 정부가 피한 것은 국가보상이라는 내용이 아니라 직접보상이라는 형식이었을 뿐이다." (180~2쪽)

 

5. 위로금인가 속죄금인가

 

아시아기금을 통해 충분한 사죄와 보상을 하려고 한 일본 정부의 노력은, 용어에 대한 오해와 간접방식의 보상으로 동정처럼 인식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박유하는 말한다. 필리핀과 네덜란드가 기금을 통해 보상금과 사죄의 편지를 받은 것은, 이런 용어의 문제와 간접보상의 방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금을 반대한 이들은 기금의 주체를 민간으로만 생각해왔다. (중략) 형식은 민간이었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국고금을 반이상 사용한 보상이었다. (중략) 기금이 쓴 쓰구나이라는 말은 보상이라는 말과 구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중략) 사죄에 근거한 행위라는 것을 전하려 했던 겁니다. (중략) 그러나 기금을 완전한 민간기금으로 이해한 이들은 일본 정부가 전달한 쓰구나이킨을 단순한 위로금으로 격하했다. 한국사회에서 보상은 없었다는 이해가 주류가 된 것은 그런 경과를 거친 결과였다. 그러나 도의의 책임을 지는 뜻으로 건넨 그 돈이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속죄의 마음이 담긴 보상금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183~6쪽)

 

6. 위안부/지원단체의 분열과 당사자주의의 모순

 

지원단체가 위안부들을 이용해 권력을 얻었고, 자신들을 돌본 것은 일본인이었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들이 있다는 것이다. 박유하의 책이 2014년에 나왔고, 지원단체의 할머니가 이와같은 문제제기를 실제로 한 것이 2년여 전이다.  

 

"자신들의 재판을 지원하고 정성으로 돌봐준 이들은 한국의 지원단체가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 (중략) 기금의 보상금을 받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들인 위안부가 61명이나 있다는 사실 (중략) 정대협은, 기금을 부정하고 일본에 입법을 요구하는 이유는 위안부들 자신이 입법을 원하고 기금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저 당사자의 뜻을 존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중략) 지원단체와 의견을 달리하는 위안부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188쪽)

 

결국 앞에서 예견한 대로, 범죄에 대한 직접 가해자는 찾을 수 없으니 국가가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 박유하의 논리다. 일제와 일본군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조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앞에 나서서 일을 처리한 것은 조선인 업자와 마을사람들인 것처럼 단정한 상태에서, 당연히 나오게 되는 결론이다.

 

"국가가 군대를 위한 성노동을 당연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법으로 금지되어있지 않았던 이상 그것에 대한 법에 근거한 책임을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중략)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폭행이나 강제 무상노동에 관한 피해는 1차로 업자와 군인 개인의 문제로 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개인이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찾기 어려워진 이상 범죄로서 책임을 물을 대상은 이미 없다고 해야 한다. 대신, 주조의 강제성을 만든 책임 주체로서, (중략) 도의에 근거한 책임이라는 말료 표현된 것이 90년대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었다." (191쪽)

 

[ 제2장 ] 정치화된 일본의 지원운동

 

이번에는 일본의 지원단체가 좌파들에 의해 운영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박유하는 일본 정부와 자민당과 기금이 기울인 노력을 기반으로 해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머지 주장들은, 오해이거나 다른 의도나 목적이 있거나 진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당시 지원자/단체가 천황제 폐지를 향한 일본사회개혁의 지향보다 위안부 문제 자체에만 집중했다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강제동원에 대한 의문을 받아들이면서 구조의 강제성에 대한 인정을 구하고 합의에 도달했더라면, 전후 일본 또는 현대의 한계에만 주목해서 좌파 이외의 생각과 사람을 규탄하는게 아니라 전후 일본의 가능성에도 시선을 돌리면서 정부의 대응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했더라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20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00~1쪽)

 

박유하는 심지어 일본의 교과서 역사왜곡과 혐한이 위안부 문제를 잘못 처리해서 등장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강제연행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했던 이들을 반발/결집시켜 1997년에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만들었고, 2000년 이후에는 혐한류에 호응하는 혐한파들이 늘어나는 계기가 된다. (중략)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이 20년 동안의 강경한 주장과 한국에 대한 지원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섰던 관료들과 선량한 일본인들까지 자포자기 상태에서 무관심과 혐한으로 몰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본 지원자들도 더 늦기전에 그동안의 운동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때다." (198~203쪽)

 

[ 제3장 ] 한국 지원운동의 모순

 

박유하의 눈에는 25세면 소녀처럼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평화의 소녀상이, 정치에 이용되는 민족의 딸이 아니라, 정말로 분노하고 저항하고 싶었던 소녀들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다.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였다는 자료를 참고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예외의 존재였던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대사관 앞 소녀상이 실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소녀상은 (중략) 소녀 위안부의 기억을 강화시켜 나간다. (중략) 주먹을 쥐고 쏘아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은 강제로 끌려간 데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다. (중략) 리얼리티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위안부를 바람직한 민족의 딸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204~5쪽)

 

노예이며 동지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규정일까? 박유하는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협력했던 식민지의 슬픔과 굴욕을 한몸에 경험한 존재다. 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다녀야 했던 노예임에 분명했지만, 동시에 성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복은 입은 댕기머리 조선인이기도 했지만, 일본옷을 입고 일본머리를 한 청초한 야마토 나데시코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였다." (207쪽)

 

[ 제4부 ] 제국과 냉전을 넘어서

 

참 대단히 용맹스러운 주장이다. 위안부를 지원하기 위한 운동은, 북한 - 일본의 좌파 - 한국 좌파들이 연합하여 미국과 일본의 제국에 저항하는 정치운동으로 변질되어, 해결의 실마리는 물건너 갔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와 처녀들은 생각한단다, 그녀들을 위안소로 보낸 것이 부모와 업자라고. 물론 위안부가 되는 경로가 스스로 매춘업에 뛰어드는 등 여러가지이기는 하지만. 정말 대단하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에 북한을 배제하고 한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하고 쌓아온 신뢰를 근간부터 뒤흔든 문제이기도 했다. 의식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민족이라는 이름의 연대는 실제로는 일본에 저항해온 세력의 연대라는 점에서 언제까지고 일본을 비난하기 쉬웠다고 말할 수도 있다. (중략) 일본 정부가 주도한 사죄와 보상에 참여했던 대다수 일본 국민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우파의 말과 행동에만 주목해온 것 (중략)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의 일본 비난은 한국으로서의 비난이라기보다는 과거에 제국에 저항했고 여전히 일본 제국과 미국제국에 저항하고 있는 좌파로서의 비난(이었다. / 중략) 위안부 문제가 국가간 문제이니만큼 우파든 좌파든 함께 내놓는 해결안이 필요했다. (중략 / 좌파들의 저항과 투쟁이 반영되어, 소녀상의 그 시선에는) 자신을 그런 곳으로 가게 한 이들 - 업자나 부모에 대한 원한도 존재할 수가 없다. (중략) 진보좌파는 그렇게 정의를 독점했고, 나아가 왜곡해 사용했다." (302쪽)

 

게다가 식민지 시대에 일제에 저항한 것은 좌파뿐이라는 어리석은 주장도 과감하게 해낸다. 놀랍다.

 

"한국전쟁과 분단은 좌우대립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시대에 협력이나 저항 중 어느 한쪽의 태도를 취할 것을 강요당하도록 만들었던 일본통치의 결과이기도 했다. 일제시대때 저항한 이들은 대부분 출신 민족과 상관없이 좌파계열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의 좌우분열은 단순한 이념대립이기 이전에 민족/반민족 분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진보/보수의 심각한 분열과 대립의 근원에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있다." (303쪽)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필요한 지원을 받으면서 조용히 살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노예로 피해를 입은만큼 가해자와 범죄자들이 제대로 사과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금의 지원을 이미 받은 61명의 할머니와 그 가족들의 선택도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분들이 계시니, 다른 목소리는 낼 필요가 없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독일이 유태인에게 그러는 것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제 그만해도 좋다라고 말할 때까지, 한반도와 세계의 위안부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일은, 그들을 올바른 조선인 투사로 존재하게 하면서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 아니다. 그저 그들을 한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중략) 소녀상을 통해 그들을 민족의 딸로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와 국가의 희생자였던 위안부를 또다시 국가를 위해 희생시키는 일일뿐이다." (3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