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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아름다운 한반도 여행

운아, 고마워_231221 el jueves, veintiun de diciembre_Четверг, двадцать один Декабрь

집으로 돌아왔더니, 보일러가 고장이다. 온수를 틀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데,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 순환밸브쪽의 배관들이 차디차다. 얇은 벽으로 스며들어오는 영하 12도의 찬공기가 보일러를 얼려버린 것을 깨닫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보일러도 재미있다. 난방으로 돌리면 물이 얼어서 순환펌프가 정상 작동을 하는데도 보일러가 힘을 쓰지 못해서 작동을 멈춘다.

 

온돌기능으로 바꿔서 보일러를 작동했더니 묘하게도 작동한다. 어떤 차이인지는 알 수 없다. 뜨거운 물 한 컵 정도로 배관을 녹이다가 물은 다시 얼어버릴 것같아서 그만 두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던 그리미가 드라이어기를 사용하면 된단다. 20여분을 드라이기를 쓰고, 온돌기능으로 보일러를 돌렸더니, 배관 쪽에 드디어 뜨거운 물이 순환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밤새 눈이 내리고, 태풍처럼 강력한 바람이 불어댔다. 숙소는 추웠다. 손님이 예약을 하면, 보통은 난방을 돌려서 따뜻하게 해 놓는데, 이집은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틀동안 난방을 돌렸는데, 방의 온도는 올라가지 않는다. 창무이 문제인지 사방에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난방으로 인한 건조한 코막힘이 없어서 좋다. 나쁜 것도 때로는 좋은 결과를 낳는다. 아침은 누룽지다. 어제 만들어놓은 누룽지에 물을 충분히 넣고 끓여서, 뜨거운 물은 보온병에 담아서 넣고, 누룽지죽은 두 그릇으로 나눠 먹는다. 집에서 가져온 샐러드도 준비하고, 샌드위치용 햄과 치즈로 어제 먹다남은 빵으로 아침을 먹는다.

 

눈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어제 사온 귤이 너무 맛이 좋아서 택배를 보내려고 갔더니 문이 굳게 닫혀있다. 일단 종달리 쪽으로 가자. 가다가 서귀포문화예술회관 앞에서 생각이 났다. 이런 눈내리는 날에는 미술관을 가는게 좋겠다. 문화예술회관 뒤에 기당미술관이 있다. 그리로 가자.

 

화가를 다룬 만화에서 읽은 이야기. 까마귀의 다리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보다못해 스스로 장애의 길을 선택했다는 변시지 화백.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하면 살았다. 제주의 색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검은색과 푸른색이 아니라,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황토색이라고 한다. 그래서 매우 서글프고, 구부정하며, 우울하다. 그 속에 희망은 있을까? 삶 자체가 희망이다.

 

그의 그림이 썩 유쾌하지는 않은데, 놀라운 것은, 대형 화면으로 재탄생한 영상미술에서는 매우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영상의 시대라서 그럴까? 

 

극장 스크린으로 보는 영상미술. 멋지다. 기당미술관에서

 

눈이 여전히 쏟아지는 가운데, 미술관을 나와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소낭밭해장국. 고사리육계장과 고기국수, 순대국을 시켰다. 술은 안된다며 잘 만들어놓은 소맥을 하수구에 부어버린 그리미의 처사가 불만스러웠다.

 

잘 먹고 다시 귤을 사러갔다. 주인이 없어서 전화로 주문을 넣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맛있어라.

 

종달리를 향해 달렸다. 남원의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해가 나면서 푸른 바다가 드러난다. 하얀 눈을 등에 걸머진 검은 현무암은 펭귄같기도 하다. 눈 내리는 바다로 걸어내려가는 돌무더기들이 살려는 것인지 죽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먼바다의 아지랑이가 무섭게 아름답다.

 

공항으로 시간을 맞춰보니, 헐 90분이 걸린단다. 무슨 일이지. 불과 30km인데. 공항 앞 20km 지점에 와서야 알았다. 눈이 쏟아지자 겁먹은 차들이 계속 길을 막는다. EV6는 전기차라 4륜구동일 것으로 믿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간다. 한 번 가볍게 밀린 것을 제외하고는 눈길에서 주행성능이 참 좋다. 그런데, 갑자기 난방이 되지 않는다. 뭔일이지? 일단 외투를 뒤집어쓰고 운전을 한다.

 

비행기 출발시간은 4시 15분인데, 우리는 4시 10분에 렌트카회사에 도착한다. 모든 비행기가 지연 또는 결항이어서 늦어서 상관없다. 우리 비행기는 4시 50분 출발이었다가 6시 15분으로 지연되었다. 결항이라면 모든 일정이 꼬이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어떻게 할까? 촌각을 다투는 일은 없으니, 일단 국제선 터미널 앞에서 맛있는 귤을 까먹으며 기다린다. 수많은 비행편들이 취소되는 상황에서도 우리 비행편은 여전히 지연으로 뜬다.

 

5시 반. 잠시 후 탑승 수속을 할테니 7번문으로 오란다. 부리나케 짐을 챙겨서 들어갔더니, 정말로 탑승준비를 한다. 마침 눈도 그친 상태다. 면세점을 들러 술 가격을 알아보다가 그냥 나왔다. 환율 효과와 가격정책이 섞여서 술값이 너무 비싸다. 그리미만 립밤을 샀다.

 

무사히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중간에 기류때문에 잠시 무서웠지만, 아름다운 야경을 보았다.

 

천재가 슈니첼을 먹고 싶다고 해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사람은 없었지만 맛있게 먹었다. 칼칼한 국수와 함께 먹었더니 더 좋았다.

 

사흘간의 짧은 여행이었는데도, 매일매일이 다채롭고 다양한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운도 좋았다. 고맙다, 운아. 

 

 

https://www.yna.co.kr/view/AKR20231222075900056

 

100m 넘는 제주공항 대기줄…"어제도 오늘도 기약없다" | 연합뉴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아무런 공지도 없다가 이제와서 결항이라 하면…. 숙소도 없고 렌터카도 반납했는데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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