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서재

창조는 광인 천재의 미친 짓이 아니다_메이커스 랩_230420 veinte de abril jueves_двадцать апрель Четверг

"진실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짐바티스타 비코"

 

이 문장이 감동을 주었다. 정치나 사회 이야기라면 거짓말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사람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인간 활동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면, 정말로 진실은 만들어진다. 꽃이나 작물의 씨앗을 심어 가꿈으로써 농업이 아름다움과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진실이 만들어진다. 끊임없이 추정하고 계산하고 오류를 수정해 감으로써 원리나 법칙이라는 진실을 만들어 낸다. 허블 망원경이든 제임스 웹이든 우주를 향한 관찰을 계속함으로써 우주의 진실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거짓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진실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다. 만들어지지 않은 진실이 어디에 있을까?

 

일기나 독후감을 쓰면서 또는 밭에서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새로운 생각들에 대해 놀라고는 한다. 만들면서 생각한다는 조각가 칼더, 쓰면서 이야기를 만든다는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 마음을 알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조앤 디디온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경험을 했다. 그럴 듯한 말이다. 검증할 수 있을까?

 

[ 1장 ] 만들면서 알게 되는 창작의 모든 것

 

"낭만주의자들은 칸트의 견해를 거의 여과 없이 수용했다. 이성보다 감정과 직관을 우선하고, 감정을 미의 원천이자 숭고함에 접근할 수단으로 삼으면서, 상상력을 받아들이고 찬양했다. (중략)18세기 말부터 낭만주의가 무르익으며 '천재'라는 용어가 신과 같은 능력이 있는 이들, 즉 예술을 창조하는 신비한 정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예술가에게 신과 같은 능력이 있다는 이런 발상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다름 아닌 신이라는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천재는 단순한 모조품과 진정한 예술품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는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과 인간의 열등한 창조물이 있는데, 천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35쪽)


"예술가에 대한 인식의 틀을 형성해 온 주요한 비유는 천재, 광기, 신성한 영감이다. (중략) 예술가를 고귀하고 예지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서양 문화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은 수 세기에 걸쳐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대체로 남성중심의 패러다임이다. 창작 과정에 대한 서양의 담론은 인종과 성별에 대한 편견이 확연한 예술 엘리트주의를 따라왔다. 이런 해석은 오늘날까지 집요하게 이어져 내려오며, 예술가의 작업 과정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30쪽)

예술가에게 광기가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박구용의 주장에 따르면 멜랑꼴리melancholia(검은 체액)는 고대에 뛰어난 능력과 비정상을 의미했고, 중세에는 미친 사람을 의미했으며,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다시 천재와 광기의 의미로 되돌려졌다. 플라톤은 시를 향한 열정(enthusiasm : en + θεός 쎄오스 내재한 신)은 디오니소스 신이 보여주는 황홀한 상태이므로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아 국가에서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새로운 생각은, 비정상 상태에서 나오는 것일까? 버크먼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대중문화는 예술가와 창조하는 사람들의 일탈 행동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니 우리가 왜 광기를 예술가의 주요 특성으로 생각하게 됐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런 개념은 여태껏 창조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왜곡시켜왔다." (41쪽)

 

뛰어난 재능은 1)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일까 2) 끈기와 투지와 노력으로 만든 것일까. 과거에는 1)번이었고, 현재는 2)번이며, 불행하게 아직도 1)번의 잔해가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미친 사람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뛰어난 사람도 미칠 수 있는 것이며, 아직도 천재는 광기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의 잔해가 남아 있다. 사이비들이 - 종교인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이 그런 잔해들을 파고들어 성공(?)에 이른다.

 

"우리는 예술가와 우리를 구별하고, 그들이 특별한 괴짜라는 생각에 얽매여 있다. (중략) 이 개념은 기업가를 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미쳐서, 리더를 특별한 사람이자 미래를 읽는 선지자와 같은 인물 (중략 / 그러나 기업가나 예술가들은) 작업 도중에 강력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발전시키기 어려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기도 한다. 그러면 자연선택을 따르듯, 대개는 강한 (시대를 반영한 / 무일) 것이 살아남아 작품에 반영된다." (43~4쪽)

 

[ 2장 ] 이야기의 세계

 

"무엇을 그릴 것인지 알려면, 그리기를 시작해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

 

'느긋한 수용힘'이라고 번역한 negative capability라는 개념이 마음에 둔다. 오리온 자리와 같은 분명하지만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 목표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는 것.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멋지다.

 

"성급하게 증명하려 들거나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고, 불확실하거나 놀랍거나 회의하는 상태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 (59쪽, 존 키츠)

 

동감이다. 글을 쓰고 정리를 하면서 나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이전의 나를 강력하게 변호하면서 때로는 새롭게 만들어 간다.

 

"글 쓰는 일은 내면의 나를 만나는 일이며, 더 나아가 내면을 창조하는 일이다" (리처드 휴고)

 

글을 쓰면서 느끼고 깨달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부족한 부분은 지식과 정보였다. 느낌 - 깨달음 - 정보 - 지식이 망라된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계속 들었다. 그럴러면 느낌과 깨달음을 쓴 것 위에 정보와 지식을 덧입혀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부족한 부분을 굳이 채우려 하지 않았던 이유다. 글을 쓰는 상황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조정래의 '글 감옥'이다. 다산의 복숭아뼈가 닳아졌다는 표현은, 왠지 생경하다. 잠시라도 글을 쓴다면, 우리는 늘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빅토르 위고가 서재 문을 걸어 잠그고 벌거벗은 채로 글을 썼다는,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 (중략) 위고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일정 분량의 글을 쓸 때까지 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했다. (소설가 에이미 벤더는) 글을 쓰든 안 쓰든 정해진 90분을 신성하게 여기고 지킨다. (중략) 한 시간 반이 끝나는 시간을 적어둬요. 그리고 그 시간을 지켰지요. (중략 / 정신분석 전문의 애덤 필립스는) 지루한 상태에서 오히려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 (중략) 글을 한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뭔가를 하는 순간에, 즉 침대에 앉아서 머리를 비우고 생각이 떠오를 공간을 열어두었을 때 통찰의 순간을 맞이했다. 멈춤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61/64쪽)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우연히 떠오르는 주제, 단어, 문장, 생각.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글을 쓰고자 했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필연일까. 우연인 듯 필연이고, 필연인 듯 우연이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기회로 가득 찬 우주 안으로 들어간다. 그 우주는 기회, 사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창작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소재나 인물이 작품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고 말하는 예술가도 많다." (73쪽)

 

혹시 북극제비갈매기는 매년 세계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닐까. 늘 보아도 보지 못한 것이 남아서 살아있는 동안 내내 여행을 한다. 몸무게도 가벼우니 적게 먹을 뿐아니라 잠잘 곳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 여행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다만 생 그리 길지 못해서 부지런히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113그램밖에 안 나가는 작은 북극제비갈매기의 비행을 담은 작품 <태양을 도는, 철새의 이동 CircumSolar, Migration>  (중략) 북극제비갈매기는 전 지구 생물 중 가장 긴 구간을 이동하는 종으로, 해마다 북극에서 남극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북극으로 돌아온다." (83쪽)

 

글을 쓴다는 것에 매몰되다 보니, 읽는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유희가 중요해 보인다. 단어의 조합과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 멋진 글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정보가 끊임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다시 쓰거나 고쳐 쓰는 이유는, 수식을 풀어내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멋을 부리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글을 읽는 맛은 분명히 있으니, 언어의 유희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그 유희는 글을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창작자는 자신이 만드는 것과 일종의 대화를 시작하고, 그 대화 속에서 작품의 깊이와 넓이는 더욱 확장된다. 창작자도 자신이 만드는 것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 디 프리스코는) 수정이라는 건 없고, 다시 쓰기만 있는 건 아닐까요? (중략 / 오든 시인은) 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단념될 뿐이다." (101/106쪽)

 

[ 3장 ] 그림과 추상의 세계

 

과거의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갖고 있거나 갖고자 하는 것이,  현재의 진실이다. 왜곡이나 거짓을 만들지 말고, 만들려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 알려고 하는 것과 느끼려고 하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 자연과 진실을 이용해 새로운 진실을 창조하는 것이 인간의 자세다.

 

"해밀턴은 <모르는 상태를 만들기 Making Not Knowing>라는 아주 훌륭한 소논문에 (중략) 목적지를 반드시 알아야만 .... 그곳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창작 과정에는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뭔가가 드러난다. (중략 / 질 들뤼즈) 모든 진실은 특정한 좌표와 요소, 시간과 장소에 달려 있다." (111/114쪽)

 

dk

(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