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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지금 다시 계몽 enlightenment now_스티븐 핑커_230315 el quince de marzo el miércoles_пятнадцать Маршировать Среда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손민수 교수는, '커튼콜 139회'에 출연하여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되 자신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어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표현한다. "분명한 편견을 가져라. 그리고, 당연하지만 마음을 열고 내 편견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생각을 하고 주장을 할 때, 늘 두렵다. 틀리거나 잘못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두려움을 보듬어 안고 잘 다스려 나가야 한다.

 

계몽주의를 거부하는 이유는, 식민지 지배 논리를 강화하는 이론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인식하고 바로 잡는다면 계몽주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계몽사상 역시 극단으로 흘러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극단으로 흘러가는 성향에 대해서는 늘 주의를 기울여 적당한 수준에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극단의 문제를 인식하고 제어한다면, 계몽주의는 거부할 수 없다.

 

"트럼프의 당선에 기초가 되었던 생각들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지식인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어 세계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비관론, 근대의 제도에 대한 냉소, 종교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는 고귀한 의미를 상상하지 못하는 좁은 시야가 그것이다. 나는 다른 세계관, 사실에 기초하고 계몽주의의 이념 - 이성, 세막(셈학, science), 휴머니즘, 진보 - 이 고취해 온 세계관을 소개하려고 한다. 계몽주의의 이념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이 내가 입증하려는 바이지만, 지금보다 더 유의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9~10쪽)

 

[ 1부 ] 계몽 Enlightenment

 

화이트헤드(1861~1947)는, '인간은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인간 본성은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세계를 정화하고 있다.'는 것을 18세기의 상식으로 보았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핑커는 복잡하게 대답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1) 우리는 사룸(life, 일본 번역어 생명)을 상속받았고 상속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사룸(살아 움직이는 개체)의 상속인이다. 이성, 세마(셈학->세막->세마 sceince), 인문, 예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물려줘야 한다.

2) 우리는 귀중한 사룸들에게 이성, 세마, 진보, 휴머니즘이라는 삶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살아야 한다. 부유함과 더불어 즐기기 (여부동락)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1) 인간은 몸과 기억의 복합물이다.

2) 몸은 삶을 지향한다. 먹고 일하고 쉰다. 몸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연으로 돌아간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고, 죽음은 인간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어 새로운 사룸으로 탄생하게 한다.

3) 기억은 사람 개개인을 특정하는 요소다. 나는 나를 특정하기 위해 살아간다. 즉, 나는 기억하기 위해 살아간다. 와아(happy, 일본식 한자 행복)한 기억이 많으면 와아한 사람이다. 와아한 기억들은 몸을 사룸의 힘으로 가득 채운다. 와아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큰 와아를 위해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

 

왜 자꾸 다른 단어와 문장으로 새로운 정의를 내리려 하는 것일까. 하이에크가 답한다. men's mind 도 당장에  human mind로 바꿔야 한다. 하이에크가 일부러 이 단어를 골라 썼다고 핑커는 해석한다.

 

"오래된 진리가 사람의 마음 men's mind 에 붙박여 있으려면 후세들의 언어와 개념으로 새롭게 진술되어야 한다. (중략 / 스티븐 핑커) 나는 이 책에서 21세기의 언어와 개념으로 계몽주의의 이념을 지금 다시 기술하고자 한다. (중략) 21세기 특유의 방식인 통계값으로 계몽주의의 이상 - 이성, 세마, 진보, 인류애를 옹호하는 일에 이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23쪽)

 

[ 1장 ] 감히 알려고 하라! sapere aude! 현명해지세요! Dare to be wise! Atrévete a ser sabia! Осмелитесь быть мудрым!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답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핑커는 이에 화답하여, 필요한 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고 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도 화답하여, 모든 악의 원인은 불충분한 지식이라고 했다. 멋지지 아니한가? 

 

“[계몽은  탈줄하는 것이다. 미성숙한 상태나 '종교와 정치의 권위와 도그마'에 나태하고 소심하게 복종하는 상태에서.] 후세가 그들의 통찰을 확대해서, 자신의 지식을 늘리고,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을 앞선 시대가 미리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의 본성에 대한 범죄가 될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운명은 바로 그런 진보에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 'what is enlightenment(1784)', 25쪽)

 

계몽은 이성, 세마, 휴머니즘과 진보다.

 

1) 이성 :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성이라는 기준을 적용했고, 온갖 어리석음의 원천을 경계하였다.

2) 세마 : 무지와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토론과 검증의 세마방법론을 도입하였다.

3) 인류애 humanism : 사람은 공감이라는 정서를 타고났고, 공감의 범위는 전세계의 자연과 사람으로 확대되었다.

4) 진보 : 세마의 방법론, 평화, 번영, 시장, 교환, 상호의존, 이성과 인류애에 기초한 행진이 진보다. 

 

* fallibilism : 모든 지식은 수정될 수 있다. 칸트 : 지식은 늘리고 오류는 제거한다.

 

작은 잘못을 넘어서 위대한 흐름을 보자. 농업혁명 이후 인류 10만년의 역사가 계몽주의로 집대성되었다. 어리석은 생각과 오류가 문제가 아니다. 어리석은 생각과 오류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해 열린 자세로 노력할 수 있고, 타인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그들의 시대, 18세기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반(反)유태주의자, 노예 소유주, 결투 만능주의자도 있었다. 그들이 걱정했던 문제 중에는 우리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훌륭한 생각들 사이사이에 어리석은 생각들이 자주 출몰한다. 요컨대 그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근본 원리를 모두 알기에는 너무 일찍 태어났다.” (35쪽)

 

[ 2장 ] 엔트로피, 진화, 정보

 

[ 띄어쓰기와 사이시옷의 공포에서 벗어나야 우리말이 좀 더 발전할 수 있다. 멋진 체계로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완벽하게 습득하기에는 과도하게 어려운 체제이므로 보다 간단한 체계를 만들어 융통성 있게 적용해야 한다. 글로써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멋지게 전달되도록 - 다사의 말대로라면 '표현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 '띄어쓰기와 사이시옷에서 자유로운' - 다사의 말대로라면 '표기의 자유를 확대해서' - 글을 쓰자. 매우 편리하면서 멋진 글쓰기가 가능해진다. ]

 

열역학 제2법칙은,

1) '고립된 계에서 엔트로피는 감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 열이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흘러 평형상태에 도달한다.

 

1)과 2)를 연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엔트로피가 열역학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와 사회세마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 ‘고립계에서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열역학 제 2법칙).’ 물질의 열역학적 상태를 나타내는 엔트로피(entropy)는 에너지(energy)와 변형(tropy)을 뜻하는 그리스어가 합쳐진 말이다엔트로피는 어원 그대로 에너지의 변형을 의미한다전체 관점에서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지만(열역학 제 1법칙일로 전환 가능한 유용한 에너지의 일부가 무용한 에너지로 바뀐다고립계에서 엔트로피는 절대 법칙이다. / 성균관대학교 오거서 중에서 ]

 

"엔트로피, 진화, 정보. 이 세 개념은 인간의 진보 이야기의 핵심 줄거리이다. 우리가 어떤 비극 속에서 태어났고, 조금 더 나은 생존을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해 왔는지를 알려준다.

 

세 개념이 일러 주는 첫번째 지혜는, 불아는(happy 와아 / unhappy 불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이다. 세마혁명이 이룬 약진 가운데 하나는,  우주는 목적으로 충만하다는 직관을 논박한 것이다. (중략 / 갈릴레오, 뉴턴, 라플라스는) 누군가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조건들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는 시계장치 같은 우주를 등장시켰다.  (중략) 가난도 설명이 필요 없어졌다. 엔트로피와 진화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가난은 인류의 초기값이다. 물질은 저절로 집이나 옷으로 배열되지 않고, 생물은 우리의 식량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가진 재주를 다 부린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설명이 필요한 것은 부이다. (중략) 엔트로피 법칙의 또 다른 의미는 유기체 같은 복잡계는 있을 법하지 않은 수많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폭력을 가한다고 위협만 해도 경쟁자를 억압할 수 있다. (중략)진화는 우리 어깨에 다른 짐을 하나 더 지웠다. 우리의 인지, 감정, 도덕과 관련된 기능들은 현대의 환경에서 모두가 번영하는 데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원시 환경에서 개인의 생존과 번식에 맞게 적응한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악마로 만들고, 견해 차이를 어리석음과 부정직의 결과로 돌린다. (중략) 인간은 폭력을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도덕한 것으로 본다. 그 증거로 전 세계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 전체에서 탐욕보다는 정의의 이름으로 살해된 사람이 더 많다." (51~3쪽)

 

“포지티브섬 게임으로 사회 계약을 맺는 것이 더 현명하다. 어느 쪽도 상대방을 해치지 않고, 양쪽 모두 상대방을 도우라고 장려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은 결함투성이지만, 그 안에 개선을 꾀할 수 있는 씨앗들이 담겨 있다. 단, 편협한 이해의 물꼬를 터서 보편 이익과 연결해 주는 규범과 제도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 규범으로는 표현의 자유, 비폭력, 협동, 세계주의, 인권, 인간의 오류 가능성 인정이 있고, 제도로는 과학, 교육, 언론, 민주정, 국제 기구, 시장이 있다. 이 모두가 계몽주의가 낳은 개념들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57쪽)

 

[ 3장 ] 반계몽

 

계몽주의의 이상을 옹호할 필요가 있을까? 핑커의 물음이다. 옹호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계몽주의의 이상이 후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굳센 믿음은, 계몽주의의 이상인 평화, 세마(science ; 셈학->세막->세마 : ① science는 세고 측정해야 한다 ② science는 추정하고, 헤아리고, 세어서 증명해야 한다), 인류애 humanism, 진보와는 다른 무엇을 추구하게 한다.

 

"이성, 세마, 인류애, 진보의 인기 있는 대안을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한다. (중략) 가장 눈에 띄는 대안이 종교 신앙이다. 어떤 것을 신앙에 기초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땅한 이유없이 그것을 믿는다는 뜻 (중략) 종교가 사룸life보다 영혼에 더 가치를 부여할 때도 인류애humanism과 충돌 (중략) 내세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에게 (중략) 순교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61쪽)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공동체주의와 흠뻑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서는 핑커의 이런 주장에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사람으로서 존엄하고 멋진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다른 사룸들을 희생시켜, 내 와아한 happy 삶을 유지하려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살아감으로써 와아하게 살고 싶다. 그렇기에 민족과 국가, 공동체를 위해서 죽고 싶지는 않다. 그런 상황이 만약에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은 어떤 초유기체superorganism의 소모품이며, 따라서 지고의 선은 그런 집합체의 영광이지 사람의 안녕이 아니라는 생각 (중략)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라 (중략) 물론 개인이 다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은 진심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 (중략 / 하지만 카리스마 지도자, 사각형 천조각, 분리 반대, 잃어버린 영토 등을 되찾는) 성전을 위해 죽음과 포옹하는 것은, 즐거운 일도 명예로운 일도 아니다." (62쪽)

 

나도 아직 완전히 이 녹색운동의 낭만에서 빠져 나왔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세마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은 지속가능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핑커가 적정한 수준의 녹색운동인 생태모더니즘ecomodernism에 대해 설명해 보겠다고 하니 기대해 보자.

 

"(녹색운동의 낭만은) 인간의 이익을 또 다른 초월 존재인 생태계에 종속시키는 운동에 공감한다 (중략 / 인간의 에너지 포획을) 자연에 대한 극악한 범죄라고 보고 (중략) 우리의 유일한 구원은 세마 기술과 경제 성장을 뉘우치고 중단하는 것이며, 더 소박한 자연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가는데 있다고 믿는다." (63쪽)

 

이것 또한 과도한 주장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과 평화와 부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고하는 사람들은, 건강과 부를 과도하게 추구하기 때문에 자제하라는 것이다. 핑커는 이런 평화로운 생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마가 책임져야 할 사안이 아닌데도,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는 사람들의 주장을 걱정하는 것일게다. 각각에 대해 추가로 논의를 한다고 하니 역시 읽어가 볼 일이다.

 

"쇠퇴주의는 우리가 프로메테우스처럼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세마 기술에 손을 댔다고 한탄한다. (핵무기, 환경오염, 테러리즘, 사이버 폭력 등 / 중략) 건강, 평화, 부는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부르조아의 유희에 불과하다. (중략 / 그런 속물들이 되지 말고) 신성한 영웅주의 (중략) 세마가 인종 차별, 제국주의, 냉전, 홀로코스트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한다." (65쪽)

 

[ 2부 ] 진보

 

[ 4장 ] 진보 공포증

 

진보를 환영하고, 나의 남은 삶은 매우 와아할 것이라고 믿지만, 세계에 대한 나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인류는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고 전망한다. 핑커는 이런 태도가 진보에 대한 공포증 progressphobia이라고 본다. 내 생각을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지식인은 진보를 싫어한다. (중략) 서양의 진보에 관한 회의주의는 19세기에는 아주 적은 수의 지식인에게 국한되어 있었지만, 금세기의 마지막 4분기에는 대다수의 지식인을 넘어 수많은 일반인으로 퍼지고 확산되었다. (중략)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장미빛 안경을 끼고 본다는 사실 (중략)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사회로 질문이 바뀌면 폴리애나에서 이요로 돌변한다." (71~73쪽)

 

대체로 동의한다. 최근에 공영방송 시청료 분리징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공영방송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틀린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하지 않거나 못한다. 공영방송의 시대는 끝났다. 자기 주장이 선명한 각자 도생하는 언론기관이 있으면 된다. 후원금이든 광고료든 알아서 먹고 살게 하는 것이 좋다.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더 많은 근거들을 모아서 300쪽도 넘는 글도 쓸 수 있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분리징수도 반대하고, 강제로 시청료를 걷는 것에도 당연히 반대한다.

 

"뉴스는 '역사의 초고'이기는 커녕 스포츠 경기의 생중계에 더 가깝다. (중략) 갈퉁은 만일 신문이 50년에 한 번씩 나온다면 반세기 동안 일어난 연예계 가십과 정치 스캔들을 구구절절 보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때의 보도내용은, 예를 들어 기대 수명의 증가 같은 중대한 세계사의 변화들일 것이다." (75쪽)

 

재난방송이라는 것이 재난을 마치 쇼처럼 구경하게 만든다. 재난 방송은 재난을 예방하지 못하고, 그렇게 구성하지도 않는다. 세계의 수많은 좋은 일들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고, 놀랄만하게 더럽고 끔찍한 일들은 대단한 뉴스거리가 된다. 공영방송이거나 아니거나. 그런 뉴스를 다루는 방송들이 접촉가능성편향을 만들어 세상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뉴스의 성격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 접촉가능성편향이란 availability heuristic) 사람들은 실제 사례들이 얼마나 잘 기억나는가에 따라 그런 사건의 확률이나 빈도를 추정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삶의 많은 분야에서 유용한 눈대중 척도가 된다. (중략) 그 주에 세계에서 일어나는 최악의 사건들을 모아 목록을 만들면 우리 문명이 역대급으로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는 그럴듯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75~6쪽)

 

사람은 생존이 목표였다가 보다 멋진 생존을 추구하면서, 멋진 생각들을 장착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생각들을 갖게 되었다. 다만 이 타락한 생각들조차 잘 제어된다면, 사람사는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80억 인류를 굶주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족한 세상을 만들었다. 부자가 된 것이 다른 사람을 착취한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자기기만은 우울증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구했을 것이다. 다른 동기들도 나름대로 세상에 기여한 무엇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사람은 진화를 통해 탐욕, 성욕, 지배욕, 복수심, 자기 기만 같은 여러가지 파멸에 이르는 동기들을 갖게 된 존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동정심, 자신의 곤경을 숙고하는 힘,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고 공유하는 능력도 있다고 믿는다. 링컨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고 지칭한 것들을 갖고 있다고 말이다." (81~2쪽)

 

핑커는 세계가 평화와 세마와 인류애를 향해 진보해 왔고, 그것을 통계로 보여줬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접촉가능성편향 때문만은 아니라고 진단한다. 단순히 세상을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근거에 의해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분석이다.

 

"진보 공포증 progressphobia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중략) '악이 선보다 더 강하다'라는 구호다. (중략) 사람들은 수익을 기대하기 보다는 손실을 더 많이 두려워하고, 칭찬을 듣고 기운이 나기보다는 비판에 더 괴로워한다. (중략) 우리는 두가지 착각에 빠져 세상이 예전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어 늘어난 짐을 덜 순수해진 세계 탓으로 착각하고, 둘째, 자기 능력의 저하를 시대의 쇠퇴로 착각한다. (중략) 옛 시절이 좋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나쁜 기억력 때문이다." (84~5쪽)

 

내 스스로도 비관주의의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와 와아happiness를 추구하는 내가 왜 세상을 비관하게 되었을까?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잘못된 점들을 발견하고 변화시키려고 하다가, 나도 모르게 문제점들의 우물에 빠져 버린 모양이다. 실제로 대학시절에 나는 너무 우울했다. 활력은 넘치는데, 현실의 벽이 너무 높게 느껴졌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핑커는 지식인들의 비관주의는 기선제압을 위한 수단, 즉 '나는 이런 문제도 생각해 봤다'라는 우월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일부 동의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의 경우, 문제들을 제기하고 해결할 방향을 제시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그 늪에 빠져 버렸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비관주의는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될 중요한 문제이자 정신병이라는 것을 비로소 인식했다. 세상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문제가 너무 많다는 부정한 생각을 버리고, 이미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고, 남은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진보에 역행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고치자, 고쳐야 한다, 반드시.

 

"지식인들은 미해결문제를 지적하고, 그 문제가 병든 사회의 증상이라고 이론화하면, 즉시 엄중한 반응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략 / 그런데) 비관주의자들의 말은 당신을 돕고자 하는 것처럼 들리는 반면에 낙관주의자들의 말은 당신에게 뭔가를 팔려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중략)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관주의는 일종의 '기선제압' 수법일 수도 있다. (중략) 물론 비관주의에도 밝은 면이 있다. 공감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갈수록 무감각해지는 시대에 못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 불행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략) 우리가 인류를 더 염려함에 따라, 우리 주위의 불행들을, 우리의 기준이 상승한 징표가 아니라 세계가 그만큼 몰락한 징표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중략) 트럼프는 '진지한 뉴스'란 본래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로 정의될 수 있다는 믿음의 수혜자였다. (중략) 현재 많은 미국인이 체제가 점점 변하리라는 희망을 상상하거나 중요시하거나 믿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결국 혁명 또는 파괴를 추구하는 변화를 더 갈망하게 되었다." (86~8쪽)

 

그렇다면 진보는 무엇일까? 나아지는 것이다. 무엇이 나아지는가? 윤석열 정부 치하에 우리는 지금 무엇이 나아지고 있는가?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생기고, 와아해 happy 진다.

 

"사룸 life, 건강, 안전, 문해력, 생계, 자극(문화와 자연의 향유) (중략)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세계는 인간의 안녕과 복리의 모든 방면에서 괄목할만한 진보를 이루어 왔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중략 / 사람 사는 세상의 진보에 대한 책들이 많았는데도 같은 해의) 퓰리처 논픽션 부문상은 대량 학살에 관한 책 4종, 테러리즘에 관한 책 3종, 암에 관한 책 2종, 인종 차별에 관한 책 2종, 멸종에 관한 책 1종에 돌아갔다. (중략) '우리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는 50가지 이유'가 있다." (90~1쪽)

 

[ 5장 ] 사룸 life

 

사람사는 세상이 어떻게 진보하는가를 핑커는 논증한다. 사룸에서 시작한다. 먼저 사람들은 비관에 휩싸여서 자신들의 기대 수명이 70살을 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대단히 놀라운 통계다. 전 세계 인류의 기대수명이 일흔 살이 넘고, 유아와 산모의 사망율은 0.1%가 되지 않는다.

 

"로슬링이 '무시하는 것들 Ignorance Project'라고 명명한 연구를 통해 기대수명, 문해력, 빈곤에 관한 국가별 의견을 조사 (중략) 이 사업의 로고는 침팬지인데, 로슬링의 설명을 빌리자면 '내가 각 문제의 선택지를 바나나에 쓴 다음 동물원에 있는 침팬지에게 정답을 고르라고 하면 응답자들보다 더 잘 맞힌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실 세계 보건 분야의 학생과 교수로 이루어진 그 응답자들은 무지하기보다는 비관해서 오류를 범했다." (93~4쪽)

 

발명가의 예측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사람의 수명이 많이 늘어났고, 내가 알고 있는 2명의 의사와 한 명의 감정평가사는 95세까지 건강하게 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로서는 평균 건강수명인 65세 + 5세 = 70세를 제대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이라고 봤다. 그리고 나머지 생은 땅에 기대어 의미를 찾으며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해 왔다. 비관하지 말고, 좀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자. 건강수명 80세로 가자, 나쁠 것 없다.

 

"발명가인 레이먼즈 커즈와일은 2005년에 자신의 베스트셀러 '특이점이 온다'에서 유전학, 나노기술, 인공지능의 발전 덕분에 2045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으리라고 예측한다. (가히 디턴의 '위대한 탈출 great escape'이다 / 중략) 우리가 수백년 동안 죽음과 벌인 전투에서 나올 결과 (중략) 영원히 계속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생각보다는 훨씬 오래간다." (103~5쪽)

 

[ 6장 ] 건강

 

우리 시대는 정말 와아한 시대다. 코로나 3년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사람들이 세마를 통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늘 유념해야 한다. 진보는 세마를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전염병 학자인 존 스노(~1858)가 콜레라에 시달리는 런던 사람들이 하수도 하류 지역의 취수원에서 물을 마셨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악취가 나는 공기 때문에 전염병이 생긴다고 여겼다. (중략) 1955년 4월 12일에는 세마인들이 scientist 에드워드 소크(~1955)의 소아마비 백신이 안전하다고 발표했다. (중략) 흥분에 휩싸인 사람들을 불러모아 축배를 들고, 아이들을 끌어안고, 원수를 용서했다. 뉴욕시는 성대한 축하 퍼레이드를 열어 소크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중략) 100여명의 세마인 덕분에 지금까지 50억명 이상이 생명을 구했다고 한다." (109~110쪽)

 

이러한 건강의 증진은 세마science의 역할이 컸는데, 행동 강령은 너무나 단순해서 웃음이 나온다. 이런 행동들로 우리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끓인 물 마시기, 염소로 소독한 물 마시기, 손씻기, 유아에게 모유를 먹이고 안아주기, 노지가 아니라 화장실에서 배변하기, 모기장을 치기, 염분과 당분이 섞여있는 깨끗한 물로 설사병 치유하기. 이런 간단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스노는 물 마시는 강의 위치를 생각해야 했고, 세균과 박테리아를 발견해야 했다.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혈액형을 발견해서 10억의 생명을 구했고, 닥터 노먼베순(~1939)은 수혈을 통해 스페인(1936)과 중국(1938)의 혁명가들을 살려냈다.

 

"메디나충은 90cm 길이의 기생충인데, 환자의 하지로 기어 들어가서 고통을 일으키는 수포를 극악무도하게 생성한다. 환자가 고통을 완화하려고 발을 물에 담그면 수포가 터지면서 수천 개의 유충이 다른 사람들이 마시는 물로 방출되고 (물벼룩에게 잡혀먹는데, 거르지 않는 물을 마시게 되면, 물벼룩과 함께 메디나충의 유충도 인체로 유입된다 / 중략) 유일한 대처법이라면 며칠이나 몇 주에 걸쳐 유충을 잡아 빼내는 것이다. (잘못 빼다가 끊어지기라도 하면 메디나충은 다리에서 썩어버리고, 잘못하면 하지를 절단해야 할 수도 있다. 오, 끔찍하다 / 중략) 1986년에 21개국에서 350만건 발생했던 것이 2016년에는 3개국에서 불과 25건 발생했다." (112~3쪽)

 

https://www.youtube.com/watch?v=1r8mKqnbgTM 

 

[ 7장 ] 식량

 

잊을만하면 한번씩 등장하는 북한 아이들의 굶주림과 전염병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국경을 맞대고 전쟁을 치른 우리로서는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와아happiness여야 하는데, 사람인지라 그럴 수가 없다. 적어도 사람만은 사람답게 살아가게 해야 한다. 그런 상황을 우리가 방치하면, 양쪽 사람들의 적개심만 높아져 한반도의 평화는 점점 멀어진다. 지나가는 뉴스로 '김정은 치하에서 살 수가 없으니, 전쟁이 나든 뭐가 나든 빨리 결판이 났으면 좋겠다'는 북한 주민의 발언을 접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감사함과 동시에 끔찍하고 암담한 미래가 떠오른다. 극단의 선택이 쉬워지지 않도록 먹고 살게 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어야 나쁜 지도자를 끌어내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

 

"(1798년 맬서스는) 인구는 억제하지 않으면 기하급수로 증가한다. 생존수단은 그렇지 못하다. (중략) 맬서스식의 사고가 우후죽순으로 부활했다. (중략) 세계은행총재였던 맥나마라도(1968~81) '의료서비스가 인구 억제와 전적으로 관련이 있지 않은 한 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료시설은 보통 사망률을 낮추는데 기여하고, 또 그 때문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중략) 맬서스의 수학은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중략) 부유해지고 아이가 더 많이 살아남을수록 사람들은 아이를 더 적게 낳기 때문이다. (중략 / 한스 로슬링) 가난한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방식으로는 인구 증가를 막을 수 없다." (124~5쪽)

 

점점 핑커와 나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처음에 유기농법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농약으로 인한 땅과 사룸들의 피해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를 직접 짓게 되면서 농부가 고통스런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기계와 농약과 제초제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은, 적어도 나는, 농약을 치는 작물의 재배를 최대한 기피하고, 고추와 배추 등 필수작물을 키울 때는 최소한의 농약만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너무 힘들어서 논을 처분하기는 했지만, 벼농사도 우렁이 농법으로 농약의 도움없이 지어낼 수 있다. 논밭농사 모두 화학비료의 도움은 반드시 받는다. 역시 양을 최소로 사용한다. 핑커는 유기농법이나 자연농법의 주창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아사를 방치하고 지구를 농토로 황폐하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감히(?) 주장한다.

 

일단 녹색혁명까지는 괜찮다. 녹색혁명의 핵심은 이종교배를 통한 자연스런 유전자 변형과 관개농업이다. 그러나 녹색혁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비료와 농약 그리고 제초제의 사용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여기에서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어니스트 볼로그는 진화의 의표를 찔러 1950년대와 60년대에 개발도상국에서 녹색혁명을 일으켰다. (중략) 수천개의 밀품종을 이종교배한 다음 작은 줄기를 가진 자손, 높은 수확량, 녹병에 대한 저항 (중략) 여러해 동안 '심사가 꼬이는' 이 지루한 작업을 통해 볼로그는 원종 수확량의 몇 배를 생산하는 밀(그리고 옥수수와 쌀) 품종을 진화시켰다. (중략) 녹색혁명 덕분에 세계는 과거 3분의 1에 못미치는 토지에서 같은 양의 식량을 생산한다. (중략) 1961년과 2009년 사이에 식량 재배에 사용된 땅의 면적은 12퍼센트 증가했지만 수확량은 300% 증가했다는 점이다. (중략)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농지가 축소되었기 때문에 온대림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127~8쪽)

 

이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설득될 수밖에 없다. 긴장이 고조되지만 내 생각이 변해가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굶어죽거나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진보가 그렇듯 녹색혁명도 시작하자마자 공격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최첨단 농업이 화석연료와 지하수를 소비하고, 제초제와 살충제를 사용하고, 전통의 자급농업을 방해하고,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준다고 비판했다. (중략) 유전공학은 옛 농부들이 수천년에 걸쳐 성취한 것과, 볼로그가 '심사가 뒤틀릴 정도로 지루한' 세월을 견디며 성취한 것을 며칠 내에 이룰 수 있다. (중략) 수많은 연구기관과 주요 보건기관 및 과학기관, 100명 이상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유전자 변형작물의 안전성을 보증했다.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유전자가 조작되지 않은 작물이란 없기 때문이다.

 

(중략) 환경운동가 그룹은 사람들이 유전자 변형작물을 멀리하도록 광적인 반대운동을 벌였다. (중략)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농부들까지도 유전자 변형작물을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중략) 그들은 먼저 '자연스러움'이란 신성하지만 무의미한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뒤 (중략) 이미 상용화된 동시에 아프리카에 맞게 설계된 유전자 변형 작물들이 무경간 농법과 점적 관개 같은 현대식 기술과 함께 도입되었더라면 아프리카는 1차 농업혁명의 침습농법을 훌쩍 뛰어넘어 농업증산을 이루었을 것이고, 아직도 남아있는 영양실조의 문제를 퇴치했을 것이다." (129~31쪽)

 

스탈린과 마오쩌둥, 폴 포트의 정책 실패로 만들어진 대기근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러시아혁명과 김정일의 고난의 행군은 다른 관점이 추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사회주의권에서 발생한 대기근은 정치실패라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비료와 농약과 관개 기술이 발달한 20세기 후반에 벌어진 대기근들은 정권 차원의 신랄한 자기반성과 함께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국민을 배불리 먹이지는 못하더라도 굶겨 죽이는 정권이 계속해서 유지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북한은 여전히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인민들은 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일까? 21세기의 대중봉기는 먹고 살만한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20세기에 대규모 기근으로 사망한 7천만명 중 80%는 공산주의 정권이 강제한 집단농장, 징벌 몰수, 전체주의 중앙계획의 희생자였다. 러시아혁명, 적백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소련을 덮친 기근, 스탈린이 일으킨 대기근,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 폴 포트가 강제한 영년운동, 김정일이 주도한 고난의 행군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131쪽)

 

[ 8장 ] 부

 

2015년 동안의 세계 총생산 그래프는 충격이다. 1820년대가 넘어서야 인류는 비로소 부를 나눠가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앵글로색슨의 나라에서 출발한 산업혁명의 결과다. 세계는 결코 풍요롭지 않았다고 한다. 이 그래프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평균 연령이 30대에서 왔다갔다 하는 세계에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권력자에 의한 착취가 일상인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지쳐 죽어갔는지를 생각해야 할 일이다. 

 

세마와 기술의 상호 발전, 거래가 이루어지게 하는 무수한 제도,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가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

 

"(귀족에게 대들다가 영국으로 쫓겨난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런던증권거래소를 보라. 이곳은 여느 재판소보다 더 숭고하고, 만국의 대표자들이 (또한 모든 종교의 대표들이) 인류의 이익을 위해 만나는 장소이다. 그리고 모두가 만족한다. (중략 / 이에 대해 시드니 포터는) 계몽철학자들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만족하는 - 다르지만 다름을 인정하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최고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있음을, (중략) 계몽주의는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궁극의 질문을 '어떻게 하면 내가 와아해질 수 있을까?'라는 실용의 질문으로 바꾸어 놓았고, 개인과 사회를 조정하는 새로운 실천을 예고했다." (140~1쪽)

 

더 중요한 것은 점점 더 부유한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막스 웨버의 주장을 통박하는 핑커의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시아의 생산양식과 라틴의 생활양식이 문제가 아니라 계몽이라는 '무지에서의 탈출'이 필요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대다수가 비로소 야만에서 벗어나고 있다. 유토피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안전하게 풍요로운 곳이 유토피아인데, 점점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세상은 이성, 세마, 인류애로 만들어가는 진보하는 세상이다.

 

"1905년에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럽의 가톨릭 국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빈곤에서 벗어났다. 또한 그림 8.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속으로 탈출이 이어지면서, 불교, 유교, 힌두교 혹은 총칭해서 아시아의 가치나 라틴의 가치가 역동하는 시장경제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본 수많은 이론은 결국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중략) 극빈자는 사라지고 세계는 중간층이 되고 있다. (중략) 건강하게 오래 살고 잘먹고 잘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런 사소한 일들에서 와아happiness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된다. (중략) 진보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목적은 자기만족이 아니라 진보의 원인을 밝혀내서 더 효과좋게 실행하기 위해서이다." (142~7쪽)

 

산업혐오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고, 제2문화의 지식인들에게 떠오른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생각이고, 측은지심이 발동한 인류애의 표현이다. 그러나, 전태일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했지, 청계천의 섬유산업을 불살라버리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내가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드러내놓고 농민들에게 파업해야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농업은 인간을 노예처럼 부린다. 낮은 농산물 가격을 유지해서 도시인들을 먹여 살리기를 원한다면, 농부들에게 다른 방법으로라도 정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하다못해 함께 일할 사람들이라도 합법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농촌이라는 살기좋은 천국은 지금, 파업이 아니라 파경에 이르고 있다.

 

"(래들릿)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노동착취라고 많은 사람이 말하지만 모든 노동착취의 할아버지 격인 농사보다 나을 때가 많다. 논밭에서 일용 농업노동자로 일하는 것보다 말이다. (중략) 진보는 한덩어리의 패키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략) 사회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특징을 최대한 세분해서 사람의 이익을 최대로 하고 피해를 최소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을 반복 응용하는 과정이다." (152~4쪽)

 

부가 중요해서 사람들을 똑똑하게  건강하게 아름답게 여유있게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나간다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나에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지식. 지식이 있다면, 원하면 언제든 돈도 벌 수 있고, 명예도 얻을 수 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겠지.  

 

"학과장이 교수회의를 열고 있는데, 지니가 나타나서 세가지 소원 - 돈, 명예, 지식 중 한가지를 들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학과장은 (지식을 택한다 / 중략) 1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15분째. 결국 한 교수가 묻는다. '어때요? 어떤가요?' 학과장이 궁시렁댄다. '돈을 택할걸 그랬어." (158쪽)

 

[ 9장 ] 불평등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먹고 즐기고 생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뛰어난 제도라고 생각하면서도, 자본주의는 진보의 과정에서 반인륜 반자연 행위를 하게 된다. 세마기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너는 자본주의와 세마기술을 버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자본주의와 세마기술 아래에서 살며,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며 살겠다'고 답한다. 왜? 자본주의와 세마기술이 없더라도 반인륜 반자연 행위는 벌어지고, 자본주의와 세마기술로 반인륜 반자연 행위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불평등을 가리켜 '사회악의 근원' (중략) 상위 1%에 속하는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최근 수십년간 이룬 경제성장의 이점을 모조리 착복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간신히 버티거나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사회통념으로 등장했다. (중략) 저마다 다른 이유로 경제 불평등에 격분한 정계의 극좌와 극우는 서로 엎치락뒤치라 뒤엉켜 싸웠고, 양쪽이 모두 갖고 있는 현대 경제에 대한 냉소주의로 인해 최근들어 가장 급진 미국대통령 -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중략) 너무 많은 사람이 근대성이 인간의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표상이 불평등이라고 여기기 때문 (중략) 그런 시각은 잘못되었으며 그 이유도 여러가지이다." (159~60쪽)

 

얼마나 살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몸으로 건강하게 세상과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살면 된다.

얼마나 벌어야 하는가? 더이상 벌지 않아도, 남은 인생동안 여행과 예술과 공부와 자연을 즐길 수 있으면 그만 벌어도 된다.

 

"철학자 프랭크퍼트는, 불평등 그 자체는 도덕으로 반대할만한 것이 아니며, 반대해야 할 것은 빈곤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모두가 똑같이 가져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도덕에서 중요한 것은, 각자가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161~2쪽)

 

불평등과 빈곤을 혼동하지 말자는 핑커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다만 불평등이 희망과 기회의 징조라는 주장은, 논거를 제대로 보기 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평등이 생기더라도, 자본주의와 세마기술의 발전으로 사회가 생산하는 부의 총량이 커져서, 빈곤으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먹고 살만하다면, 즉 우리나라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면, 상대박탈감은 개인이 처리해야 할 문제이지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그 문제에 집중하느니 절대빈곤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집중되어야 한다. 한국이 자살율 1위인 것은, 경제 불평등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철학의 빈곤이 원인이다.

 

"불평등과 빈곤을 혼동하는 것은 총량 오류 (중략) 산업혁명 이후에 부는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이것은 곧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졌을 때 가난한 사람들도 더 부유해졌음을 의미한다. (중략) 부자들이 너무 부유해지면 나머지 사람들은 상대 빈곤감을 느끼게 되므로 모두가 더 부유해지고 있다고 한더라도 불평등은 와아감happy feeling을 떨어뜨린다. (중략)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승자독식경쟁에 말려들었다고 느끼며, 그 스트레스 때문에 병에 걸리고 자기파괴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중략) 개발도상국에서 불평등은 사람들의 기를 꺽는 것이 아니라 힘을 실어주기 떄문에 불평등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더 와아하다는 것이다. (중략) 상대박탈감은 여하간 희망에 압도되고 만다고 말한다. 불평등을 기회의 징조, 즉 교육을 비롯한 여러가지 신분상승의 길이 국민과 자식들의 성공을 보장하리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162~6쪽)

 

과정이 공정하다면 불평등한 부의 분배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들이다. 전쟁과 혁명, 유행병을 피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경제 평등은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불평등이 심해지거나 불균등 발전이 심해지면 전쟁과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역사다. 그러므로 불평등한 분배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라면, 전쟁과 혁명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관리되어야 한다. 즉, 모두가 공유하는 평등한 혜택들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불평등해야 한다.

 

"(미국과 영국) 불평등이 급격히 하락한 시기는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겹치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규모 전쟁은 대개 소득분포를 평준화한다. (중략 / 이고르와 보리스는) 평준화의 네 기사로, 대중을 동원하는 전쟁, 변화를 일으키는 혁명, 국가의 붕괴, 사룸을 위협하는 유행병을 언급한다. 네 기사는 부를 없애는 것 외에도 수많은 노동자를 죽이고 생존자들의 임금을 끌어올려서 불평등을 감소시킨다. 샤이델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는 모두 경제 평등이 늘어나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만, 경제 평등은 거의 예외없이 슬픔에서 비롯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소원은 신중하게 빌어야 한다." (173쪽)

 

'식코' 덕분에 미국의 의료보험의 헛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질병으로부터 매우 안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처럼 실업률이 계속 낮은 상태가 유지된다면, 기업에 의해서 제공되는 의료보험의 질은 결코 나쁘지 않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재분배 또는 복지국가를 위한) 사회 지출은 진보의 무시무시한 면모를 입증하는데, (중략) 사회변화가 계속될수록 반대세력은 거세게 저항하지만, 그런 저항은 결국 헛수고로 끝난다. 미국은 재분배라는 공격에 맹렬히 저항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중략) 보수주의자들과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총력을 다했음에도 지출액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중략) 대다수 미국인은 정부가 아니라 고용주를 통해서 건강보험, 실업보험, 장애보험 등의 보험금을 납부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간에서 시행되는 사회지출을 공공부문에 더하면 미국은 35개 OECD 국가 중 24위에서 프랑스 바로 뒤인 2위로 올라선다." (176~7쪽)

 

'~적인'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쓴다.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가장 흔한 말이 '부정적인'은 '좋지않은'이라는 말로 바꿔써야 한다. '역동적인'도 '역동하는', '세계적인'은 '세계(의)'로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다.

 

좋은 일을 발견하고, 기쁨과 와아를 느끼고, 이 일을 더 확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다보면 세상이 정말 아름다워진다.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들이 있지만, 세상은 많이 평화로워졌다. 힘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 위로하면서 다정하게 살자. 20년간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의 실질소득이 1.5배로 높아졌다고 하면, 소득이 줄어든 것보다는 매우 기쁜 일이다.

 

코끼리 코 아래부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소득이 크게 증가하지 않는 이유는, 중산층 이하와 상류층에서 실질 소득이 증가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소득이 덜 증가했어도 충분히 즐기면서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사회지출에도 좋지않은 면이 있다. (중략) 비록 '적정비용'이라 할 만한 것은 없지만, 모든 선진국은 사회보장이 주는 혜택이 사회보장에 들어가는 비용보다 더 크다고 결론짓고, 막대한 부를 완충장치 삼아서, 적당히 많은 양을 사회지출비용으로 할당한다. (중략) 규제가 풀리면서 부자들은 투자이익으로 더 부유해졌고, 역동하는 경쟁의 장에서 승자가 모든 수익을 취했다. (중략 / 그런데도) 세계의 불평등은 감소하고 부유한 나라에서 불평등이 증가하는 현상을 그래프 하나로 종합했는데, 흥미롭게도 곡선은 코끼리 모양으로 나타났다." (178~80쪽)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비생활을 살펴보면 놀랄 일이 많다. 분명히 가난해 보이는 집인데도,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비싼 물건과 비싼 외식과 비싼 취미를 즐기고 있다. 가계부채비율이 소득의 100%를 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내가 하지 못하는 소비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세마기술의 발달과 세계 무역의 증가가 이런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분명 기뻐할 일이다. 일부 부패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망가뜨린다고 해도 이런 흐름은 꺽을 수가 없으니, 한국의 미래를 낙관한다는 친구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비관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오직 낙관과 실천만이 세계의 진보를 이끈다.

 

"분명 생활수준은 최근 수십년간 급격히 향상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체 혹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믿는다. 이 사실과 통념의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중략) 불평등은 확실히 증가했지만 - 저소득층과 중간층이 부유해지는 것보다 부유층이 더 빨리 부유해졌다 - 대체로 모든 사람이 더 부유해진 것이다. (중략) 익명 통계값(데이터는 통계값으로 바꾸어 써야 한다 / 포함되는 사람이 바뀌는 통계값)과 종단 통계값(포함되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 통계값)을 혼동하는 것이다. (중략) 종단 통계값을 이용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의 절반이 최소 1년간 소득 상위 10%에 진입하는 경험을 하고, 1/9이 소득상위 1%에 드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중략) 사회이전소득으로 빈곤이 완화된 것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재분배를 많이 한다. (중략) 사람들의 벌이(소득)이 아니라 소비로 빈곤을 정의한다면, 미국의 빈곤율은 1960년 이후에 (2015년까지) 90% 하락했다. 그래서 인구의 30%였던 빈곤층이 단 3%로 줄어들었다." (184~8쪽)

 

핑커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좌우로부터 공격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좌우로부터 관심과 격려를 받고 있다. 우리도 관심을 기울이고, 그가 하는 말을 불편하지만 듣고 따져봐야한다. 재미있다.

 

"불평등은 빈곤과 다르고, 인류의 번영을 좌우하는 기본요소도 아니다. (중략) 새로운 부의 원천이 발견될 때마다 불평등의 물결은 다시 인다. (중략) 경제 불평등을 가장 효과좋게 줄이는 것들은 전염병, 대규모 전쟁, 격렬한 혁명, 국가의 붕괴 (중략) 여러모로 세계는 덜 평등해졌지만, 그것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있는 것이다." (193쪽)

 

[ 10장 ] 환경

 

'과학적 지식'은 일본식 표현 + 중국식 표현이라 '세마 지식'으로 바꾸고, '낭만주의적 자연숭배'도 중국식 표현이므로 '낭만이 넘치는 자연숭배'로, '영구적이고 최우선적인 의제'는 '영원한 최우선의 의제'로, '낭만적 쇠퇴주의'는 '낭만이 흐르는 쇠퇴주의'로 바꾼다. 끝도 없다. 마치 우리 문장이 오염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문체반정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 20여년 동안 친환경 농업을 대충 실천해 오면서 극단으로 흐르는 자연농법은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해 왔다. 환경에 주는 부담을 최소로 하면서 농부들의 노동강도도 낮출 수 있어야 즐거운 농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를 거스르는 환경운동은 있을 수 없고, 사람이 고통받는 농업도 개선되어야 한다.  

 

"환경운동은 커다란 성취를 거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하다. 환경운동은 인간진보의 또다른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존의 환경운동계에서는 그것이 진보라는 것은 물론이고, 애당초 진보가 가치있는 목표라는 것조차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중략) 나는 공기, 물, 종, 생태계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표는 공유하되, 낭만이 흐르는 쇠퇴주의보다는 계몽주의와 낙관주의에 근거한 새로운 환경주의 개념을 제시하려고 한다." (196쪽)

 

일본은 36년동안 한민족과 아시아 지역에서 공출한 것을 기반으로 번영을 누렸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벨기에-네덜란드도 100여년 동안의 식민지배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상하수도 시설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개인들에게 축적된 부도 상당해서 오늘날처럼 깨끗하고 부유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후로도 그들은 계속해서 앞서 나가는 바람에 더욱 깨끗해졌다. 그런데, 식민 착취를 하지 않은 나라들도 부유해지면서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대도시가 그 사례들일 것이다. 결국 세마기술과 부가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청계천은 아주 오래전에 깨끗했다가 1960년대 이후로 더러워졌다가 10년전부터 완전히 깨끗해졌다. 중랑천과 한강, 도림천과 안양천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작은 개천들에는 오리들과 카누가 같이 헤엄친다. 세느강의 흙탕물에서도 물비린내는 나지 않는다. 라인강도 마인강도. 갠지스강에는 발도 담그기 싫다. 델리의 강도. 일죽의 청미천도 20년 전에 비하면 깨끗해졌고, 앞으로는 더 깨끗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부유한 국가일수록 환경이 깨끗하다. 가장 깨끗한 곳은 북유럽국가들이고, 환경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은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일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가장 위험한 두가지 형태의 오염 - 오염된 식수와 실내요리 연기는 가난한 국가가 겪는 불행이다. (중략) 가장 큰 오염원은 가난이다. (중략) 그래프에 따르면 기름유출사고는 줄었지만 기름의 운송량은 오히려 증가했다. 교차하는 두 곡선은 환경보호가 경제 성장과 공존가능하다는 또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정유사가 유조선 사고를 줄이기를 원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환경보호의 이해관계와 서로 맞아떨어진다." (209~11쪽)

 

아마도 2,3년전부터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 경기와 대도시의 사람들이 아파트에 열광하면서 더이상 시골 땅은 경쟁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덕분에 나는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강남사람들이 내는 높은 세금 덕분에 적은 돈이지만 지원을 받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욕망을 비판하기보다는 그들로 인해 내가 얻는 혜택이 많으므로 감사를 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비록 살고있던 아파트를 아직 처분하지 못해 이중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것 또한 도시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서 큰 불만은 없다. 핑커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정보기술을 비롯한 현대기술의 속성은 소유해야 할 물질의 양을 축소하고 있다고.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꾸준히 관심을 갖고 살펴볼 문제다.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면 시골 지역의 땅이 남게될 뿐 아니라, 누군가의 천장이 누군가의 바닥이 되어 출근, 건축, 난방에 필요한 자원도 절약하게 된다. (중략 / 탈물질화 dematerialization의 진전으로 환경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휴대전화는 수백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신주와 전화선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략) 테라바이트 단위의 저장공간을 갖춘 노트북이 있어 이제는 상자 단위로 책을 구입할 필요가 없다. (중략) 기술의 본성, 특히 정보기술의 본성에 포함된 무언가가 인류의 번영을 물질과의 결합으로부터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214~6쪽)

 

"목재, 석탄, 기름, 혹은 가스를 태우면 연료에 포함된 탄소가 산화해 이산화탄소를 형성하고, 기것은 대기 중에 섞여 들어간다. 일부 이산화탄소는 바다에 용해되거나, 암석과 화학 결합을 하거나, 광합성 과정에서 식물에 흡수되기도 하지만, 자연의 흡수 작용은 우리가 매년 대기 중에 뿜어내는 이산화탄소 380억톤을 모두 소화할 수 없다." (217쪽)

 

아, 이게 뭐지? 큰일났다. 한참 즐겁게 읽다가 그만 뒤통수를 맞았다. 핑커는 도그마에 오염되지 말고, 콩세기를 하듯 통계값에 주의하면서 기후환경문제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일단 독일, 프랑스, 미국이 탈원전 정책을 펼치는 이유를 살펴야 한다. 환경과 정치의 도그마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도저히 지금은 결론을 내릴 수 없으니, 안전한 원전과 원전의 안전한 사후처리에 대한 세마기술들을 검토하고 토의해 볼 일이다.

 

"인류가 환경의 모든 측면을 가차없이 망가뜨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 하는 행위를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면 환경의 모든 측면이 되살아나리라는 이야기 역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중략) 학계에서 '올바른 정치'라는 도그마를 감시하는 한사람으로서 (중략) 자연과학자는 올바른 정치에 오염되지 않으며, 증거로만 말한다.

 

(중략) 우리는 정확한 통계를 무기로 사용해야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삶의 가치에 근거한 주장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중략) 마법이나 요술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따르는 우주에서는 콩 세기가 필요하다.

 

(중략) 온실기체 배출량의 대부분은 중공업(29%), 건설(18%), 운송(15%), 토지이용도 변화(15%), 그리고 에너지 공급에 사용되는 에너지(13%)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중략) 탄소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내처 0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보석을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큰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르기는 몰라도 전기, 난방, 시멘트, 철강, 종이, 여행 그리고 값이 적당한 음식과 의류까지 포기해야 한다고 말이다.

 

(중략)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풍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중략)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판매하는 화석연료기업을 악마화하거나 희생을 과시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미덕을 표현하면 기분은 좋아지겠지만, 그런 자기도취로는 파괴력이 센 기후변화를 막지 못한다.

 

(중략) 탄소배출량 감소분 중 일부는 풍력발전과 태양광 발전의 증가에 따른 것이지만, 대부분은 (특히 미국에서는) 석탄을 메탄가스로 대체한 결과이다. 오랜동안의 탈탄소화 흐름이 보여주는 것은, 경제성장이 탄소 태우기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 낙관주의자는 만일 이 추세가 다음 단계 - 저탄소 천연가스에서 탄소 제로의 핵에너지로 이어지는, 약칭 'N2N' 과정으로 이어진다면 기후변화가 연착륙하리라고 믿는다.

 

(중략) '제대로 된 탈탄소화 Deep Decarbonization'의 시작은 탄소 유료화이다. (중략) 탄소세를 도입해서 공공비용을 '내재화'하면 사람들은 탄소를 배출하는 모든 결정에서 피해 정도를 계산에 넣을 수밖에 없다. (중략) 핵에너지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동시에 확장 가능한 탄소 없는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이다.

 

(중략) 핵발전을 위해 우라늄을 채굴하는 과정은 석탄, 석유, 가스를 채굴할 때보다 환경에 훨씬 작은 상처를 남기고, 발전소 자체도 풍력발전소나 태양광발전소에 필요한 땅 면적의 1/500에 불과하다. (중략) 핵에너지와 비교할 때, 전기 1kwh를 생산할 때마다 천연가스는 38배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바이오매스는 63배, 석유는 243배, 석탄은 387배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다. 아마 1년에 100만명은 될 것이다.

 

(중략) 안타깝게도 핵에너지를 더 많이 활용해야 할 시기에 각국은 오히려 핵발전을 감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원자로 11기가 최근 폐쇄되었거나 폐쇄될 상황에 놓여있다. (중략) 부족해진 전력을 충당하느라 석탄화력발전소의 탄소배출량이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와 일본 역시 독일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중략) 하지만 핵발전은 비용이 많이 든다. (중략) 프랑스에는 두 종류의 원자로와 수백종의 치즈가 있는데, 미국은 그 반대이다. (중략) 핵융합에너지 역시, 이번에는 정말로 30년 앞으로(혹은 더 가까이) 다가와 있을지 모른다. (중략) 이 세계에 끼끗하고 풍부한 에너지를 가져다줄 이들은 역사 속의 성인, 영웅, 예언자, 순교자, 계관시인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인류에게 안겨줄 것이다." (216~37쪽)

 

[ 11장 ] 평화

 

평화. 전쟁보다 어렵다는 평화가 어쨌든 지속되고 있다. 내가 경험한 시기에도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지만 확실히 줄어드는 듯 하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다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폭력이 감소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했던 것은 접촉가능성 편향 heuristic availability와 부정 편향이었다. (중략) 근래에는 전쟁중인 열강이 전무하다. 열강간의 마지막 전쟁은 한국에서 벌어진 미국과 중국의 전쟁 (중략) 두번째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전쟁의 세가지 평가 항목인 빈도, 기간, 치사율이 다같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그후 세계는 긴 평화 long peace라고 불리는 시기에 들어섰다.

 

(중략) 역사상 민족국가간 총력전이 사망자를 수십만, 수백만씩 낳은 것과 달리, 오늘날 정규군이 벌이는 소규모 전투의 사망자는 수십명 수준이다. (중략 / 접촉가능성 편향) 400만명에 이르는 시리아 난민의수도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발생한 난민 1천만명, 1947년 인도 분할과정에서 발생한 나민 1,400만명 (중략) 세계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시리아가 문제다." (247쪽 ~53쪽)

 

전쟁이 줄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무역의 증가, 민주주의, 전쟁의 불법화, 전쟁 낭만주의의 폐기 때문이다. 통계값으로 확인했다고 하니 믿을만하다.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래, 계속 이렇게 가자. 민주주의를 위해 발언하고 실천하며, 전세계와 교류하고, 전쟁은 결코 낭만이 아니며 범죄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자. 아직도 사람들은 야만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대체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여부동락' 부를 함께 즐기자.

 

"많은 계몽사상가들은 온화한 상업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① 국제무역은 전쟁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중략) 무역관계가 밀접한 나라들끼리는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작다. (중략) ② 민주정치가 '영광에 취해 국가를 의미없는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는 지도자'에게 제동을 건다고 주장한다.

 

(중략) ③ 이제 전쟁은 불법이다. 인류사에서 거의 없었던 일이다. 힘이 곧 정의였고, 전쟁은 수단만 달리한 정치의 연장이었으며, 전리품은 승자에게 돌아갔다. (중략) 세계의 국가들은 자위목적이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인준없이는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국가는 불멸을 얻었고, 국경은 정해졌으며, 정복전쟁을 벌이는 국가는 다른 세계의 묵인이 아닌 비난을 예상해야했다. (중략 / ④ 군국주의나 전쟁의 낭만이 제거되었다.) 두번째로 일어난 더 끔찍한 전쟁을 치른 뒤에야 결국 전쟁에서 낭만을 제거할 수 있었고, 비로소 평화는 서양과 국제사회가 세운 모든 제도의 분명한 목표가 되었다.

 

(중략) 사실 전쟁은 전염병, 굶주림, 빈곤과 마찬가지로 계몽된 종이 넘어서는 법을 깨우친 또 하나의 장애물일지도 모른다." (256~262쪽)

 

[ 12장 ] 안전 safety

 

자연으로부터 사람에게 가해지는 천여가지의 위험은 도시를 통해 대부분 방지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에 의한 상해 또는 살인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매우 어렵고 힘든 문제인데, 한의학의 원리를 적용하면 간단하다고 핑커는 주장한다. '병인은 달라도 증상이 같으면, 같은 치료를 한다.' 실제로 범죄율은 1960년대 이후 날개가 없이 추락하고 있다.

 

"범죄가 들끓던 그 시기에 대다수의 전문가는 폭력범죄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조언했다. (중략 / 근본 원인주의 root-causism은) 사회의 병폐는 보다 깊은 곳에 자리한 도덕 질병의 증상이며, 썪어있는  핵심을 치료하지 않는 단순한 치료법으로는 완화할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심오해 보이는 헛소리이다. (중략)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드러난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 문제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가 있다.

 

(중략) 폭력범죄는 해결 가능한 문제이다. (중략) 살인사건의 분포가 측정 단위마다 어느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략) '50-30', 즉 살인사건발생률을 30년 안에 절반으로 줄인다는 목표는 실현가능할 뿐아니라 오히려 여유있는 수치에 가깝다. (중략) 증상 - 폭력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동네와 개인에 달라붙어 폭력을 유발하는 나쁜 이익과 기회를 없애야 한다. (중략) 적법한 법집행, 피해자 보호, 신속하고 공정한 판결, 적정한 처벌, 사람에게 어울리는 수감시설 등에 기초한 효과좋은 법치는 목숨을 위협하는 폭력을 계속해서 줄이는데 확실한 역할을 한다."(266~73)

 

담배조차 마약으로 지정해서 금연하게 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는데, 핑커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한다. 그럴듯하다. 오늘날 담배 때문에 폭력범죄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와, 시각을 바꾸니 마음이 더 편안해진다. 마약이든 담배든 적정한 가격에 적절한 양을 소비하도록 하고, 모든 책임을 개인과 가정이 지게 하면 된다. 그게 자유민주주의의 원리 아닌가? 다만, 마약과 담배가 개인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내면 된다. 아, 정말 좋은 방법이다.

 

"오늘날 코카인, 헤로인, 마리화나가 밀거래되는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연안국가들에서도 같은 현상이 - 폭력범죄가 급증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마약과 관련된 폭력사건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국제문제로 남아있다. 어쩌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마리화나의 합법화와 미래에 있을지 모를 다른 약물의 합법화가 관련 산업을 무법천지의 지하세계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릴지 모른다. 한편 앱프와 윈십은 '마약을 심하게 단속하면 마약퇴치효과는 거의 없고, 대체로 폭력이 증가'하는 반면에, '마약 법원과 중독치료는 실효성을 보인 오랜 역사가 있다'라고 논평한다." (275쪽)

 

사고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상해 또는 살인. 이렇게 명칭을 바꾸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사고를 일으키는 환경을 개선해야 의도하지 않은 상해와 살인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불운은 고용주에게는 편리한 설명이 되어 주었고, 사망사고를 신의 뜻이나 운명으로 돌리는 숙명론은 최근까지도 널리 퍼져있었다. 오늘날 안전공학자들과 공중보건연구자들은 운명의 변덕스러운 손가락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사고 accident라는 말을 아예 쓰지 않고, 대신 '의도하지 않은 상해 unintentional injur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89쪽)

 

부패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사람이 다치거나 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것이 흔한 일이 된다. 이것은 추정이다. 그렇다면 통계값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행동이 사룸을 구한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는 하느님의 생명책 book of life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 깊어지고, 생명의 가치가 훨씬 더 귀중해 짐에 따라 더 분명해질 것이다." (296쪽)

 

[ 13장 ] 테러리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대는 독재자와 테러리스트들은 거의 사라졌다. 남아있는 독재자나 테러리스트들도 학살이 쉽지는 않다. 그들에게 당할 확률은 0.00001의 확률도 안되는 수준이다. 여전히 희생자가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세상은 정말 좋아졌다. 우리 시대는 여기까지 진보했고, 다음 세대가 더 진보시킬 것이다. 그것을 믿고 건강하게 사회를 바라보면 된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아주 약한 힘을 평화와 진보를 향해 계속 작동시키면서.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무차별 학살로 세계는 불안에 떨었고, (중략) 사회참여 지식인, 특히 서양 문명이 언제나처럼 붕괴에 직면해 있다는 징후를 찾아 영원히 헤매는 문화 비관주의자들까지 혼란에 빠뜨렸다. (중략) 테러리스트들은 그들이 내세우는 대의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힘을 사용해서 정부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놀라운 반응을 일으켜셔 새로운 동조자를 모집하거나 (중략) 정부가 시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인상을 확산시켜 정부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테러를 저지른다.

 

(중략) 1960년대 이후 조직되었던 수백건의 테러리즘 운동은 전략목표를 달성하지 못한채 소멸하거나 서서히 사라졌다. (중략)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테러라는 연극이 상연되면 무정부 상태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나고 사회질서가 붕괴하기 직전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수백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끝낸 뒤 우리는 폭력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왔다. (중략) 전쟁을 좋아하는 종교, 민족주의 , 마르크스주의처럼 무고한 이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나은 가치관과 신념체계로 대응할 수 있다. (중략)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거꾸로 안전함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297~307쪽)

 

[ 14장 ] 민주주의

 

놀라운 일이지만, 핑커는 과거에 대한 환상을 갖지 못하게 대못을 박는다. 성군이 다스리던 시대는 없었거나 잠깐이었고, 여전히 야만의 시대였다. 그 야만의 시대도 혼돈의 시대보다는 덜 위험했다. 그러니 경험하지 않은 과거를 낭만의 환상으로 그리지말고, 오지 않은 미래를 조금 더 노력해서 평화와 사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자.

 

"Early governments pacified the people they ruled, reducing internecine violence, but imposed a reign of terror that included slavery, harems, human sacrifice, summary executions, and the torture and mutilation of dissidents and deviants. (중략) Chaos is deadlier than tyranny."

 

문명 초기의 정부들이 내부 폭력을 줄임으로써 사람들을 안정시켰지만,  노예 제도, 하렘, 인간 제물, 즉결 처형, 반체제 인사와 일탈자에 대한 고문과 절단과 같은, 공포 통치를 사람들은 겪어야 했다. (중략) 혼돈은 폭정보다 더 위험하다." (199쪽)

 

민주주의의 역사도 간단하지 않은데, 계몽주의와 미국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이래로 3차례에 걸친 파고를 넘어 21세기는 세계 정치체제의 거대한 쓰나미가 되었다. 그렇다. 18세기부터 300년에 걸친 도전과 실험의 결과다.

 

"If the world has become more democratic over time, that is progress. (중략) The first swelled in the 19th century, when that great Enlightenment experiment, American constitutional democracy with its checks on government power, seemed to be working. (중략) cresting at twenty-nine (countries) in 1922. The first wave was pushed back by the rise of fascism (중략)  a second wave gathered force as colonies gained independence from their European overlords, pushing the number of recognized democracies up to thirty-six by 1962. (중략) And the second wave was soon pushed back by military juntas in Greece and Latin America, authoritarian regimes in Asia, and Communist takeovers in Africa, the Middle East, and Southeast Asia.  (중략) democratization's third wave - more like a tsunami - erupted. " (199~200)

 

"만약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계 속에서 점점 더 민주주의 제도가 확대되었다면, 그것은 진보다.

 

(중략 / 민주주의를 향해) 19세기에 첫 번째 파도가 일었다. 정부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를 갖춘 미국의 헌법 민주주의라는, 위대한 계몽주의 실험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1922년에 29개 (국가)에서 싹이 텄다. (그러나) 첫 번째 물결은 파시즘의 부상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중략) 두 번째 물결은 1962년까지, 유럽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이 힘을 모아 인정된 민주주의 국가의 수를 36개로 늘렸다. (중략) 그리고 두 번째 물결은 그리스와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 정권, 아시아의 권위주의 정권, 아프리카, 중동 및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밀려났다.

 

(중략 / 1974년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의 파시스트 축출 이후 1991년 소련의 해체까지 ) 민주주의를 향한 제3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분출했다."

 

민주주의가 대세인 듯 했지만,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터키의 에르도안 등 여러나라에서 다시 권위주의 독재정부가 들어서고 있다. 비관론을 따르는 정치평론가들은 다시 또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고, 민주주의는 서양에나 어울리는 것이지 다른 나라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혼란스러운 질문에 핑커는 분명하게 대답한다. 두 가지 이유로 그것은 아니다.

 

"Could recent history really  imply that people are happy to be brutalized by their governments? The very idea is doubtful for two reasons. Most obviously, in a country that is not democratic, how could you tell? The pent-up demand for democracy might be enormous, but no one dares express it lest they be jailed or shot. (중략 / The other is heuristic availability bias) crackdowns make the news more often than liberalizations." (Enlightenment Now, 201쪽)

 

"최근의 역사rk, 사람들이 그들의 정부에 의해 야만스럽게 통치받는 것을 기꺼이 즐거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생각은 두 가지 이유로 의심스럽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 시민들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억눌린 요구는 엄청날지 모르지만, 감옥에 갇히거나 총살당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략 / 두번째는 접촉가능성 편향) 억압은 자유보다 뉴스를 더 자주 만든다."

 

민주주의가 좋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그 말을 쓰기 시작해서 이제는 너무 흔해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민주주의의 상태를 세어볼 수 있을까? 그래야 셈학 -> 세마 즉 science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As always, the only way to know which way the world is going to quantify. This raises the question of what counts as a 'democracy', a word that has developed such an aura of goodness as to have become almost meaningless. A good rule of thumb is that any country that has the word 'democratic' in its official name, isn't one."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이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셈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 '민주주의'로 간주되는 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이 단어는 선한 의미가 거의 퇴색해 버릴 정도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대충 생각해봐도, 공식 명칭에 '민주'라는 단어를 넣은 나라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dk

 

(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