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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오이디푸스 왕_230129 el veintinueve de enero el domingo_двадцать девять январь Воскресенье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이오카스테의 '신탁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어머니가 어떻게 자식을 버릴 수 있는가? 권력자의 옆에서 편안한 안락을 영원히 누리기 위해 자식을 버릴 수 있는가? 자식이 너무 과하다면, 친구를 버릴 수 있는가? 헐, 버릴 수도 있겠다. 친구도 과하다면, 이름모를 대한민국의 시민은 버릴 수 있겠는가? 오, 버릴 수 있겠다. 내가 살고 봐야지. 이러니까 이 희곡이 말이 되는 모양이다. 어쨌든 소포클레스의 이 끔찍한 상상은 제발 사라져 버리기를 바란다. 

 

“(코러스) 오만은 폭군을 낳는 법. 오만은 (중략)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가 가파른 파멸 속으로 굴러떨어진다네. (중략) ”(873~77 / 883~87)

 

“(이오카스테) 제발 내 말 들으세요. 부탁이에요. 더는 따지지 마세요. 나는 좋은 뜻에서 당신에게 최선의 조언을 하는 거예요. 오오, 불운하신 분. 당신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기를!”(1064~68)

 

“(오이디푸스)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1184~5)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토끼같은 김건희 여사께 드리는 소포클레스의 헛소리로 읽힌다.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1529~30)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20여 쪽은 긴박감 넘치는 드라마다. 파멸로 가는 숨막히는 과정이다. 천병희 선생의 번역히 호흡을 잃지 않고 잘 유지되었다. 별도로 정리할 필요조차 없다.

 

친구가 이런 독후감을 보내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죄를 마주하고 스스로를 벌한다. 자신의 죄 앞에서, 아들이자 아버지로서의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추방을 요구한다. 눈 앞에 두고도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해 살해하고, 오랜 시간을 곁에 두고도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해 네 명의 자식을 만든, 자신의 장님같은 눈으로는 더 이상 세상의 무엇도 볼 수 없다는 듯이. 그가 자신에게 가한 형벌은,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죄책감 때문에 죽음으로 도피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의 선택보다는 용감했으나, 마음 한 켠이 짠하다."

 

이런 생각이 오이디푸스 왕을 읽는 건전한 태도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소포클레스는 피치 못할 사정을 부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상황에 동조한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비극의 화살이 꽂히는 최후의 장소가, 나 자신과 부모형제라는 것을 설정했다. 이 부분을 견딜 수가 없다. 상상조차 해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1) 아버지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죄

2)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 죄

3) 아들들을 파멸에서 구하지 않은 죄

4) 조카를 사형에 처한 죄

5) 형제를 죽이려고 한 죄

 

물론 가정불화로 별의 별 일이 다 벌어지는 것을 보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인의 행위가 충돌한 것이 아니라, 중병환자들의 발병 사고다. 미친 사람이 발병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마치 인간 일반이 가지고 있는 고뇌처럼 그럴싸하게 분석하는 것이 제대로 된 관점일까.

 

물론 부모형제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떨쳐내야 할 생각이다. 이 생각을 붙들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 3부작은 인간 상상력의 병리현상을 지나치게 미화한 쓰레기 같은 작품이다. 오이디푸스의 참회, 안티고네의 불복종까지는 좋다. 이 두 주제를 이런 식으로 풀 필요는 없다. 자연과 인간 윤리의 근간을 흔드는 악마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