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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학문의 경계는 없다, 경계를 열고 재미있게 공부하자_판타레이_230209 el nueve de febrero el viernes_девять февраль Пятница

세마책 science book은 읽는 것 모두가 지식이며 정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외우면 된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 즉 레볼루션이 서구사회에 던진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천문학 용어였던 레볼루션이 어느새 정치 혁명, 즉 사회 체제의 변화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레볼루션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세마 사고를 거쳐 뉴턴 역학을 탄생시켰고, 볼테르(Voltaire)가 유럽 대륙에 전파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프린키피아(Principia)』는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거듭되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마science는 치열한 정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세마학자scientist들은 혁명을 지지하기도, 반대하기도 하면서 서로 맞서기도 했으며,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며 총을 들고 직접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혁명은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낭만주의시대를 열었지만, 세마학자scientis들의 삶은 결코 낭만만은 아니었다.”(8쪽)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두 기둥으로 삼은 현대 물리학에서 판타 레이나 보텍스를 개념적 도구로 사용하는 일은 없어졌다. 이후 물리학에서 유체 역학은 서서히 잊혀졌다. 동시에 세마science와 철학을, 물리학과 생물학을, 학문과 사회를 연결하던 고리도 사라졌다." (12쪽)

 

[ 1부 ]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뜨르담' 중에서)

 

"위고가 활약하던 시절, 노트르담은 폐허로 버려져 있었다." (19쪽)

 

중세는 신의 시대였다. 신을 위한 성전을 짓는 일에 몰두하였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은, 신의 뜻과는 별도로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을 정리해 책을 쓰고 교류하면서, 성전에 모여 신을 경배하는 일을 점점 소홀히 하게 되었다.

 

[ 제1장 ] 레볼루션과 보텍스

 

유럽 역사에서 두 번의 거대한 혁명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켰지만, 수많은 사람의 피를 불렀던 혁명.

 

1517년의 종교혁명은, 본인은 별로 의도하지도 않았던 루터의 혁명. 루터는, 신의 대리인들이 사이비라고 규정했다.

1917년의 정치혁명은, 교과서대로 자유 평등 해방의 세상을 만들려고 싸워 이겼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의 세상을 만들려 했었다.

 

종교 개혁과 개신교 반지성의 뿌리가 마르틴 루터일 수 있다. 참 오묘하다. 

 

1) 개혁 : 교황 레오 10세는 면죄부를 팔아서 부를 쌓으려고 한 반면에,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신성모독이라고 비판한다.

2) 반지성 : 루터는 지동설을 비판하면서 구약을 들이 밀지만, 교황 레오 10세는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에 근거하여 지동설을 옹호(까지는 아니고 호감을) 가진다.

 

“율리우스력의 오차가 누적되자 교황청은 정확한 1년의 길이를 설명할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지동설)에 호감을 보인다. 

하지만 신교의 리더 마르틴 루터는 1539년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가톨릭이 옹호하던 지동설에 돌직구를 날렸다. 루터의 공격은 신교의 나라 프로이센으로 둘러싸여 있던 폴란드의 가톨릭 성직자 코페르니쿠스를 난처하게 했다. 

지동설이 종교 갈등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코페르니쿠스는 외부 활동을 줄이고 책의 출판을 추진한다. 하지만 출판 과정은 매우 더뎠고, 1543년 출판 교정이 마무리될 무렵 이미 코페르니쿠스는 뇌출혈로 쓰러진 뒤였다.” (25쪽)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왜 코페르니쿠스는 재판을 받지 않았고, 부르노처럼 사형되지도 않았을까? 그 의문이 풀렸다. 그가 로만 가톨릭의 고민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단 0.00008%의 오차를 가진 그레고리력을 발표하여, 이전의 율리우스력의 0.002%의 오차로 인해 발생한 세금과 의식 집전날자가 달라지는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레고리력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에 의해 지구의 운동을 계산한 결과를 토대로 만든 달력이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의 대자보를 읽어보고는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요지를 잘 정리한 논문 초록을 인용한다. 루터도 혹시 진영논리에 빠져 지동설을 부인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루터에 따르면, 개신교도 로만 가톨릭도 결국은, 신자들이라는 시민들에게 죄를 짓도록 허락하고 있다. 그들의 권능을 이용해서.

 

"마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의 출입문에 붙였다. (중략) 이것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중략/ 루터는 강론에서 면죄부는) “죄를 짓도록 허락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면허”라고 비판한다. (중략) 죄사함은 교황이 판매하는 면죄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략) 천국 열쇠는 ‘땅에서’ 권한을 갖고 있지, ‘하늘에서’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에게는 ‘죄사함’의 권세가 없다는 것이다.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마태복음과의 연관성 / 류호성(서울장신대학교) / 신약논단)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 출판된 1543년은,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운 해다. 서원은 고려말에 주자학을 도입해 국운을 회복하려던 안향을 기리는 곳이다. 고려말에 주자학을 배운 선비들은 사대부로서 '농자천하지대본'의 새로운 나라, 조선을 열었다. 유럽은 1543년을 기점으로 세마science에 근거한 이성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1장을 요약해 보자. 전쟁 - 종교 - 세마science의 대서사시다.

 

데카르트는 레볼루션을 설명하기 위해 인과론에 입각하여 보텍스 이론을 만들었다.

 

레볼루션은 파도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가톨릭 사제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정리되어,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율리우스력을 대치하는 그레고리력을 선포하는 바탕이 된다(De Revoluntionibus Orbium Coeletium, 1543년).

 

성서의 순수한 해석에 집착한 루터가 지동설을 받아 들이지 못하면서 면죄부와 지동설을 함께 공격한다. 루터가 죽은 후 가톨릭이 루터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만(1546년) 10년 가까이 벌어진 전쟁으로 피해만 커져간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에서 루터파는 공식 인정되고, 종교에 대한 선택권은 교황이 아니라 영주에게 넘어가고, 자유도시에는 종교의 공존이 인정된다. 

 

한편 종교개혁의 불길에 당황한 교황청은, 성령잉태설과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부르노가 지동설을 진리 판단의 근거로 삼자, 8년에 걸친 고문 끝에 뜻을 굽히지 않는 지오다노 부르노를 화형에 처하고 지동설을 부정한다(1600년).

 

가톨릭을 지지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의 프라하에 유럽 최대의 천문대를 짓고 브뤼헤와 케플러를 초청한다. 케플러는, 브뤼헤의 천문 관측자료를 검토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타원 궤도를 결합해 보다 완전한 지동설을 만든다(1625년, 부르노가 화형당한 지 불과 25년 후다. 종교는 가톨릭이지만 science세마를 믿은 무능력한 암군이 지동설을 완성하는데 기여한다). 파도바 대학의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여 케플러의 법칙을 확증하지만 가택 연금되고, 로만 가톨릭은 코페르니쿠스의 De Revoluionibus Orbium Coeletium을 금서로 지정한다(1616년).

 

루돌프 2세가 사망하고 신교도와 교류했던 마티아스 황제에 이어 페르디난트 2세가 집권하자 상황이 돌변한다. 루돌프 2세 시기에 '자유의 수호자' 10명을 선출하여 공화정의 맛을 본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신교를 탄압하려는 신성로마제국에 반발해 황제의 관리들을 프라하 왕궁 창밖으로 집어던진다. 전쟁의 끔찍함을 벌써 잊은 황제와 교황을 비롯한 인간들은 전쟁을 시작한다.

 

위그노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개신교도이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프랑스를 안정시킨 앙리 4세와, 프랑스는, 가톨릭을 옹호하는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를 - 특히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네덜란드와 연합해 개신교도를 지원한다. 30년 전쟁에 프랑스 귀족으로 참여한 데카르트는, 1620년 백산전투에서 보헤미아의 개신교 동맹군을 완파하고, 은퇴하여 연구활동에 힘쓴다. 의학과 법학을 공부한 데카르트는 사물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을 생리학psysiology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결합한 근대서양철학의 출발인데, 방법서설(1637년)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고 언명한다. '인간을 혈액이라는 순환 유체가 지배하는 유체 기계(33쪽)'로 생각한 데카르트는 인과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데카르트는, 물리법칙은 직접 접촉에 의해 힘이 작용하는 것이므로 진공은 존재할 수 없으며, 레볼루션은 에테르라는 유체의 보텍스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파스칼은 토리첼리와 함께 수은이나 물로 진공을 만들어 기압을 잴 수 있다고 반박한다.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치료를 받고 완치된 후에, 진공에 대해서는 틀렸지만 학자로써 그를 존경하게 된다.

 

보헤미아에서 시작된 전쟁이 독일로 옮겨져 끝나 버림으로써 인구의 1/3이 사망한 독일은 피폐해지고, 폴란드 북부의 작은 개신교 도시였던 프로이센이 강국으로 성장한다. 네덜란드는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면서도 실리를 챙겨 강국으로 부상했다.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명분으로 30년 전쟁을 이끈 스웨덴도  강국으로 독립하지만, 종교의 도그마에 갇힌 스페인이나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덴마크는 변방으로 쇠퇴한다.

 

30년 전쟁에서 '지동설을 거부한 개신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똑같이 '지동설을 거부한 로만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의 데카르트는, 대륙 합리주의의 비조로서 1650년 스웨덴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지동설은 정설이 되었으며, 과학은 종교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할 수 있었다. 

 

[ 제2장 ] 소용돌이와 저항

 

술을 죽을 때까지 먹기 위해 조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더 나아가 굉장히 많이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자극이 자꾸 들어온다. 술로 여흥을 즐기던 오랜 야만의 시대가 끝나고, 커피로 뇌를 각성하는 계몽의 시대가 등장했다. 이슬람으로부터 전파된 커피가 유럽의 커피하우스를 만들고, 그 토양에서 뉴턴과 핼리가 성장했다.

 

"(오스만투르크로부터) 17세기 유럽에 전파된 커피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진 커피하우스를 통해 유행처럼 번져 갔다. 사교를 담당하던 선술집에서 술에 빠져 있던 유럽 사람들은 새로이 등장한 커피의 각성제 효과를 만끽하며 비로소 맨정신으로 새로운 사상과 학문, 예술을 꽃피워 나가기 시작한다. (중략) 유럽이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통해 깨어난 것은 커피 대유행의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 (37쪽)

 

과거에는 반독재 민주주의를 위해 지하 서클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사실 탐구와 민주주의를 위해 지상 서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① 공부를 해서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

②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틀린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③ 틀린 것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⑤ 같은 것과 다른 것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진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아, 그런데, 다들 아직도 21세기를 산업사회처럼 살고 있어서, 심지어 정년 폐지까지 주장하면서,  돈과 비즈니스에 얽매어 너무 바쁘다. 우리의 시대는 이대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래, 니 똥 굵다'고 서로를 손가락질 하면서. 

 

"(갈릴레이가 죽은 1642년에 태어난 뉴턴은, 커피하우스 아르바이트와 대부업으로 돈을 조달하여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면서) 이미 중력 법칙의 많은 부분을 밝혀냈지만, 커피하우스에서 로버트 훅과 벌인 빛의 본질에 관한 논쟁에서 무참히 깨지자 훅이 주도하던 주류 학계와 연을 끊고 중력과 관련한 일체의 내용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중략 / 훅과 중력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 패배한 또 한 사람) 핼리는 뉴턴이 이미 오래전에 중력 법칙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 놀란다. 그는 뉴턴에게 이 결과를 발표하도록 권유하지만, 뉴턴이 계속 주저하자 핼리는 스스로 인쇄 비용까지 부담하며 책으로 출판하도록 적극 추진한다. 이 책이 바로 1687년의 『프린키피아』이다. (핼리는 1682년에 나타난 대혜성을, 뉴턴의 중력이론으로 계산하여 1758년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의 사후 실현되어 핼리혜성이라 불리게 된다.)" (39쪽)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청년 뉴턴은, 데카르트가 과대평가되고 있음을 알았다.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돈된 데카르트만을 배우기 때문에 그의 한계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파스칼과 뉴턴의 입장에서는 사실을 규명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런데,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어떻게 프랑스 혁명의 기반 사상이 되었다는 것일까?

 

"1644년에 출간된 『철학의 원리』에서 데카르트는 행성의 회전 운동, 즉 레볼루션을 일으키는 힘은 우주를 가득 채운 유체인 에테르가 일으키는 보텍스라고 생각했다. (중략) 하지만 케플러 법칙에 따르면 태양계 바깥쪽에 있는 행성일수록 공전속도가 느려지므로 보텍스 역시 바깥쪽으로 갈수록 느려져야 한다. 이렇게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에테르가 느려진다는 것은 보텍스 회전에 제동이 걸린다는, 즉 마찰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찰이 저항으로 작용하면 보텍스는 유지될 수 없다. 더군다나 행성들의 궤도를 가로지르는 혜성은 에테르의 마찰 저항을 거슬러 이동해야 한다. 진자 운동이 공기 저항 때문에 영원히 지속할 수 없는 것처럼 에테르 보텍스에 의한 행성 운동 역시 유체의 저항 때문에 지속될 수없다는 것이다." (40쪽)

 

[ 제3장 ] 소멸되는 것과 소멸되지 않는 것

 

 

 

[ 2부 ]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에서)

 

[ 제4장 ] 프랑스 혁명을 잉태한 살롱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유체의 저항이 없다. 유선형으로 만들기만 하면 완전 유체가 아니어도. 어떻게 증명했지? 게다가 양력이론으로 비행기가 뜨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그러면 비행기는 왜 뜨고, 새는 어떻게 공중에 떠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것이지? 공기가 흐르면서 양력을 만들어내지 않고서? 그렇다면 양력에 대한 이야기는 교과서에서 사라졌나?

 

유튜브를 계속 뒤졌지만 양력은 유력한 힘이다. 중력을 이겨내는 양력, 항력을 이겨내는 추진력, 그리고 맞면각을 조절하여 비행기를 공중으로 띄운다. 베르누이의 원리도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유체의 저항을 체험한다. 바람을 맞을 때나 수영을 할 때면 언제나 공기나 물 같은 유체의 저항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달랑베르는 베르누이 방정식을 이용해 유체의 저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달랑베르 역설(d'Alembert's Paradox)'이다(1749년). 

 

물론, 이것은 유체가 점성이 없고 압축성도 없는 이상적인 완전 유체일 때 적용되는 것이다. 실제의 유체는 반드시 점성과 압축성이 있기 때문에 물체 표면에 경계층이 생기게 되고 저항이 발생한다. 심지어 경계층이 벗겨지는 경우 소용돌이(보텍스)가 발생해 저항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유선형 물체는 이 경계층이 잘 벗겨지지 않아 저항이 아주 약해져 달랑베르의 역설에서 이야기한 상태에 가까워진다.

 

한가지 더, 달랑베르의 역설의 관점에서 보면, 항공 역학 교과서에서 많이들 사용하는, 베르누이 정리를 이용한 양력 설명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참은 아닌 설명이 된다. (중략) 달랑베르의 역설에 따르면, 공기 같은 유체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는 어떠한 힘도 발생하지 않고, 따라서 날개를 띄우는 그 어떠한 힘, 즉 양력도 발생하지 않는다." (78쪽)

 

아니다. 해결은 된 모양이지만, 아직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베르누이 정리와 오일러 방정식이 유체 점성항을 생략한 비점성 이론이기 떄문에 달랑베르 역설이 생긴다는 게 밝혀지는 것은 무려 100년이나 지난 1846년 생브낭의 연구를 통해서이다. (중략) 에테르 유체를 통과하는 행성의 저항과 빛의 이중성이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이슈로 떠올랐고,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탄생을 촉발했다." (82~3쪽)

 

작곡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미 루소가 실천을 했다. 주된 가락을 완성하면 그것을 토대로 복잡하고 화려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존재하지 않은 아름다운 선율을 하나만 생각해 내 보자. 

 

"달랑베르 역설이 발표된 1752년 프랑스는 오페라 논쟁으로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중략)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가 파리에서 크게 성공한다. 페르골레지 오페라의 성공에서 대중의 역할을 확인한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은 복잡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오페라에 반대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쉬운 선율을 중심으로 한 음악이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라는 오페라를 작곡한다. 음악 교육을 받은 적도 없던 루소의 오페라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 오페라에 사용된 노래들 중에는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와  찬송가 주여 복을 구하오니」로 (중략) 잘 알려진”(83쪽)

 

https://www.youtube.com/watch?v=EgohAxkaPCA

 

 

[ 제5장 ]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는 1776년

 

오랜 의문은 서양이 동양을 어떻게 넘어섰는가가 아니다. 왜 산업혁명이, 발전된 동양에서가 아니라 서양에서 일어났는가이다. 민태기의 대답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동안 내가 내린 결론을 먼저 제시하면, 1) 불균등 발전 2) 데카르트의 합리론(cogito ergo sum)이다.

 

첫번째 대답은 불균등 발전이다.  역사는, 내부에서 완전히 다른 씨앗을 잉태하고 성장시켜, 마침내 역사 자체를 변화시킨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호모 사피엔스는 농업혁명을 완수하여 이를 동양으로 전파한다. 동양은 농업혁명을 받아들여 "조화造火혁명 : 철기와 도자기"를 완성한다. 서양은 조화혁명을 받아들여 산업혁명을 완성한다. 역사의 주도권을 주고 받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에 만족한 지역은, 변화를 계속하는 지역과 문명에 주인공의 자리를 내준다. 세계는 균등하게 발전하지 못함으로써 변화를 만들어 낸다.

 

두번째 대답은, 르네 데카르트의 합리론이다. 조용히 난로가에 앉아 신의 존재 증명과 철학을 생각하기 전에, 데카르트는 코페르니쿠스 - 브루노 - 갈릴레이 - 케플러의 지동설을 받아들인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들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함으로써, 신이 지배하는 세계와 별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조용히 설파함으로써 - 죽기 싫었기에 - 세마science 연구의 자유를 선언했다.

 

나는 감히, 데카르트처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오만해지고 싶다. 
그러나 나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땅에 고개를 처박고, 
미물이지만 138억년 우주의 신비를 간직한 채 말없이 살아가는 모든 것들과 마주하는 
몸수로서 살아간다. 

"그리고 끝으로, 나는 그릇된 여러 학설에 대해 이미 그 정체를 잘 알고 있어서 
 연금술사의 약속에도, 점성술사의 예언에도, 마술사의 속임수에도, 
 또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떠들어 대는 어느 누구의 잔꾀나 허풍에도 
 더 이상 속지 않게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

 

민태기는, 산업혁명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 산업혁명 - 시민혁명이 동시에 발전하면서 드디어 동양을 극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의한다. 첨언하자면, 1776년이 있기 위해서는 데카르트(~1650년)와 불균등 발전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776년 3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진다. 같은 달, 수년간 자신의 특허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제임스 와트의 첫 번째 증기 기관이 완성되고, 같은 해 7월 제퍼슨과 프랭클린이 기초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된다. 이 세 사건으로 서양에서 '산업 혁명'과 '시민 혁명', 그리고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비로소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99쪽)

 

[ 제6장 ] 열과 저항

 

인류가 18세기까지 알고 있던 금속은, 금 은 수은 구리 등(원소 이야기에서 다시 확인해 봐야 하는데, 7종이 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연금술은 science세마로 도약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외로 그 시간이 길어서 18세기까지 였다는 이야기다. 

 

"17세기 뉴턴 역학으로부터 촉발된 세마혁명 science revolution(중략)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새로이 관측된 실험 결과들이 정량화되자 연금술이 무너지고 화학으로 대체되며 비로소 세마science는 신비주의에서 벗어난다." (101쪽)

 

스코틀랜드의 의사 조지프 블랙.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 제임스 허튼 함께 항상 거론되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이끈 인물. 1754년에 이산화탄소를 발견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처음으로 흔들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체=공기라는 이론이, 조지프 블랙의 이산화탄소 발견으로, 세상에는 공기라는 하나의 기체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럴수가. 1766년 캐번디시는 '가연성 공기'인 매우 가벼운 기체 수소를 발견한다.

 

조지프 블랙은 잠열과 비열을 발견한다. 잠열은 온도 변화없이 열이 흡수되는 현상이고, 동일한 열을 가해도 물질마다 온도 상승이 달라진다는 비열의 개념을 발견했다. 이게 왜 중요할까? 모르겠다.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들. 힘의 원천에 동일한 원리가 작용한다. 전자기력의 힘을 하나로 합친 장 field -> 전자기력과 중력을 연결하는 시도에서 탄생한 통일장 이론.

 

1) 1687년 뉴턴 :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2) 1750년 존 미셸 : 자기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3) 1765년 프리스틀리 : 전기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 제7장 ] 루나 소사이어티와 산업혁명

 

철과 도자기를 만드는 온도 1,300도. 이 온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양방향 풀무를 발명한 중국인이었다. 와트는 1776년 증기기관을 완성하여 용광로에 더 많은 산소를 불어넣어 온도 1,300도를 달성하게 했다.

 

볼튼의 로비로 1800년까지 특허기간 연장을 받은 와트는 증기기관을 완성했고, 볼튼은 증기기관으로 동전을 주조하여 영국의 서민경제에 돈을 공급할 수 있게 하였다. 테두리의 홈을 파는 화폐주조의 혁신을 통해 영국을 살린 뉴턴에 이어, 증기기관을 이용해 위조 불가능하고 저렴한 동전을 제조한 볼튼이 과학기술로 다시 영국을 살려냈다. 그리고 영국은 새로운 대포로 스페인과 나폴레옹을 뛰어 넘었고, 중국을 뛰어 넘었다.

 

"1776년 마침내 와트의 특허가 구현된 최초의 증기 기관이 만들어져 즉시 현장에 사용되었다. 와트의 증기 기관은 기존의 뉴커먼 증기기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효율을 자랑했다. 이후 증기 기관은 탄광에서 물을 퍼 올리는 용도뿐 아니라 다른 산업으로도 급속히 확대, 응용되며 대개 수력에 의존하던 영국 산업 전반에 증기기관 혁명이 일어난다. 특히 주철 생산 분야에서 적극 활용되기 시작한다. 초기 증기 기관의 역할은 용광로에 동양의 풀무보다 더욱 강력한 바람을 불어넣는 것이었고, 이 덕분에 철기 시대 이후 처음으로서양의 철강 기술이 동양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처럼 동서양 문명사의 역전에는 열유체에 대한 연구가 중심 역할을 했다." (122쪽)

 

[ 제8장 ]

 

[ 제9장 ] 대포와 화약

 

[ 제10장 ]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그들의 시대, 18세기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반(反)유태주의자, 노예 소유주, 결투 만능주의자도 있었다. 그들이 걱정했던 문제 중에는 우리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훌륭한 생각들 사이사이에 어리석은 생각들이 자주 출몰한다. 요컨대 그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근본 원리를 모두 알기에는 너무 일찍 태어났다."

 

[ 제11장 ]

 

[ 제12장 ]

 

[ 제3부 ] 과학은 오류투성이지만, 그런 잘못은 종종 저지르는게 좋아

 

[ 제13장 ] 낭만이 아닌 낭만주의 혁명

 

혁명이 낭만이었던 이유는, 콜드 플레이의 '인생 만세 viva la vida'에 나오는 가사 속에 답이 들어있다. 소금과 모래로 세운 성 안의 왕은 폐위되고, 시민들이 새로운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당파들은 끊임없이 준동하여 시민 주권론을 부정하려 한다.

 

1789년 대혁명(브루조아 혁명) - 나폴레옹 전쟁 - 1812년 비인체제 - 루이18세 - 샤를 - 1830년 7월 혁명(루이 필립 / 쁘띠 브루조아혁명)에 만족하지 못한, 공화파 학생 지도자였던, 아 ~ 스무 살의 갈루아는 칼을 들어 루이 필립에게 건배를 하다 감옥에 갇힌다.  출옥하여 걸린 콜레라도 이겨냈지만, '갈루아의 이론'을 논문으로 남기고 결투의 희생양이 되어 하루 동안의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7월혁명이 시민 모두에게 투표권과 참정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쁘띠 브루조아 이상의 중산층들에게까지만 자유를 허용했다. 콜레라와 빈곤으로 고단해진 시민들은 7월혁명의 진정한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되묻는다. 그리고, 진정한 시민모두의 혁명은 1832년의 6월혁명이었고, 갈루아와 라마르크의 죽음이 배경이었으며, 빅토르 위고는, 역사야 어떻게 기록되든지간에, 진정한 혁명은 6월혁명이었다고 선언했다.

 

감옥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콜레라를 이겨내며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결투 전날에 논문을 쓰는 갈루아, 낭만 속에 낭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되었던 1832년 6월 혁명은, 갈루아의 장례식과 라마르크의 장례식을 계기로 봉기한 젊은 청년들이 몰살당한 비극의 혁명이었다. 혁명의 이유는, 입헌군주제의 루이 필립도 폐위하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젊은 청년들 수천 명이 몰살당하는 이유가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osW0gulISQ

 

[ 제14장 ] 엔진이 만들어 낸 컴퓨터

 

증기기관이 만들어 낸 컴퓨터라니. 정부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의 프루니가 테일러 급수를 이용하여 만드는 '수학표' 프로젝트. 각종 로그함수와 삼각함수의 값을 표로 만드는 것을 말하고, 한다. 이를 본 영국의 찰스 배비지가 이 작업을 증기기관을 이용해서 지겨운 단순반복작업과 영국 수학표의 오류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설계한 것이 '두빼법 finite difference method'를 이용한 '두빼엔진difference engine'이다.

 

* 일본이 만들어 놓은 전문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나도 모르게 한국계 왜구가 되고 만다. 학문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 고유의 전문용어를 만들었다.

 

1) 두빼법 : n차 방정식의 값들을 일정하게 나열할 때, 두 개의 연속된 값을 뺄셈하는 법.

    ㄱ) 2차방정식에서의 두빼법

 

   ㄴ) 위 이차방정식의 값들을 뺄셈을 두 번까지 하게 되면, 모두 4가 나온다.

   ㄷ) 이 방법을 이용해서 f(5)를 곱셈과 거듭제곱을 하지 않고 덧셈과 뺄셈만으로 구할 수 있다.

          가) x - 11 = 4    x = 15

          나) f(5) - f(4) = 15    f(5) = 15 + 22 = 37

    ㄹ) 두 값의 뺄셈을 두 단계(n단계) 진행하면 같은 값이 나온다는 것에서 두빼법이라고 이름지었다. 

 

2) 두빼엔진 difference engine : 찰스 배비지는 오류가 많은 영국의 수학표를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증기기관을 이용한 단순반복계산하는 기계 = 사람 computer가 아니라 기계 computer를 설계했고, 1831년까지 제작하려고 노력했지만 자본과 기술부족으로 완성하지 못했고, 1991년 영국 정부에 의해 완성되었다. 

 

https://youtu.be/t8aYkow-Fv8

 

찰스 배비지 charles babbage 1791~1871는,

 

1) 컴퓨터computer를 사람에서 기계로 바꾸려고 한 사람이다. 단순하고 지루한 계산을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증기기관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전용 프린터까지 달려있고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컴퓨터인 두빼엔진 difference engine을 실제로 설계하고 1831년까지 제작했다. 1991년에 설계대로 완성되어 영국과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정상 작동한다. 

 

2) 아담 스미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분업 생산은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체계로 가야하고, 단순하고 위험한 작업은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며, 인간은 교육을 통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통찰한 사람이다. 증기기관이 있기에 이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계와 생산의 경제학에 대하여 on the economy of  machinery and manufactures(1832년)'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유럽 대륙에 소개되었고, 마르크스에게 직접 영향을 주게 된다.

 

3) 이해엔진 analytical engine은 더 어렵지만 설계에 성공했다. 두빼엔진이 단순 수치계산기였다면, 이해엔진은 명령어를 입력하면 기억장치와 중앙처리장치에서 명령을 이해하고 계산해서 결과를 내놓는 엔진이다. 이해엔진을 설계대로 구현하려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2030년에 완성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해엔진은 배비지가 설계하고, 이탈리아 학자가 설계를 연구하여 프랑스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그의 아내인 에이더 러브레이스가 이 논문의 영어번역을 맡았다고 한다. 유럽은 전체가 하나의 학문 세계에 속해 있었다.

 

[ 제15장 ] 원격 통신의 시작

 

"고대로부터 자력이나 정전기는 닿지 않고 작용하는 힘, 즉 원격으로 작용하는 힘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자력과 정전기에서 출발하여 / 무일) 과학 혁명 이전 사람들은 염력이나 마술, 우주의 기운 등 보이지 않고 숨어 있는 힘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신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직접 접촉에 의해서만 작용하는 기계론의 인과율을 과학의 기본으로 삼았다.

 

(중략) 따라서 데카르트에게는 행성을 움직이는 힘의 전달 매개로 우주를 가득 채운 유체 에테르가 필요했고, 에테르의 소멸하지 않는 운동인 보텍스가 행성 운동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뉴턴은 유체의 점성 저항을 도입하여 유체 유동은 지속하지 못하고 소멸한다고 지적했다. 대신 행성은 에테르의 보텍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 스스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중략)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자력이나 전기력에도 마찬가지로 힘의 매개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229~230쪽)

 

1780년 이탈리아 의사 갈바니 : 죽은 개구리의 근육 경련 관찰 - 생체 조직이 만든  전기에 의한 운동이라고 해석

1794년 친구 볼타 : 근육 경련의 원인은 전기 - 전기는 금속 칼과 사체의 화학 반응의 결과로 만들어진 전기라고 해석

1800년 볼타 : 화학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전류 발생 장치 제작 - 인류 최초의 배터리 : 전기 화학의 탄생

 

뉴턴은 시에 대해 '교묘하게 새로운 헛소리 a kind of ingenious nonsense'

 

[ 제16장 ] 혁명과 유태인

 

혁명의 소용돌이 현장에서 살아간 사람들 중에 프랑스의 카르노와 독일의 마그누스를 최고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혁명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켜야 할 지를 알고 실현했다. 인재들의 소중한 생명은 지켜내야 하고, 무지와 혼돈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폭동을 자제하여 유혈사태를 막고, 교육과정의 체계를 잡아가는 일로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갔다.

 

"1848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마그누스는 혁명의 대의에 공감하고 적극 지지했지만, 시가전이나 폭동 사태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팡스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처럼 무장한 학생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막기 위해 베를린 학생들이 구성한 혁명 연대의 사령관을 스스로 맡았다. 그는 지휘권을 행사하여 학생들이 유혈 사태에 개입하는 것을 적극 막았다. 혁명은 진압되었고 혁명에서 보인 그의 역할로 오히려 마그누스의 도이치 내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온건 자유주의 개혁파였던 그의 주장 상당 부분이 받아들여져 도이치란트 대학의 전면 개편이 이루어진다. 이로써 도이치에서 실험과 실습과 세미나가 병행으로 이루어지는 체계를 갖춘 대학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후 도이치 물리학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마그누스가 기초를 닦은 커리큘럼이 세계 대학 시스템의 표준이 되었다.“ (253쪽)

 

[ 제17장 ]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전환되는 것

 

존재하는 방식을 바꾸면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되는데,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운동량과 에너지다. 패러데이는 비천한 신분에서 굳이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오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에 오롯이 몰두할 수 있었다. 

 

"심지어 빛이 전자기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패러데이의 연구는 뉴턴의 중력 발견에 필적할 정도로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발견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나 왕립 아카데미 회장직을 두 번이나 사양하고 기사 작위까지 고사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말년의 그에게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뉴턴 옆자리를 묘지로 제안했으나, 그는 끝까지 거부하여 결국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 묘지에 묻혔다.”(267)

 

"도이치란트에서 꽤 성공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엥겔스는 (중략) 영국 맨체스터로 건너가 아버지의 사업을 확장했다. (중략) 맨체스터에서 직접 기계화된 공장을 운영하던 엥겔스는, 정치투쟁에만 집중하던 친구 카를 마르크스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며 경제학으로의 방향 전환을 권유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시기 맨체스터에서 활동하던 동년배 사업가 줄의 성과에 대해 언급한다. 이들은 줄의 실험이 열, 운동, 전기, 자기 등 다양한 에너지와 힘이 서로 다른 형태로 바뀌기도 하고 상호 전환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후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신들의 경제학에 줄의 성과를 반영하여, 노동이 상품이 되고 상품이 화폐가 되고 화폐가 상품으로서의 노동을 구매하는 과정을, 보존량으로서의 '가치'가 형태를 바꾸어 가며 전환된다는 물리학의 개념으로 분석한다. 이렇게 하여 카를 마르크스의 최초의 경제학 저술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가 1859년에 출판된다. 이 책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매진되자 고무된 마르크스는 이 책을 확장하여 새로운 책을 저술한다. 이것이 바로 1867년의 『자본론』이다.

엥겔스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주장한 '노동가치설'을 비판한 '잉여가치설'이다. 잉여가치설에서 노동labor과 노동력labor power은 구분되어,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하고 노동자는 노동을 공급한다. 우리가 몇 마력 혹은 몇 킬로와트(kW)의 출력을 가진 엔진이나 세탁기를 구매하지만, 엔진과 세탁기는 이 동력에 시간을 곱한 킬로와트시(kWh)의 일(Joule)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노동과 노동의 구분은, 같은 시기 동년배 사업가 줄의 연구를 잘 알던, 맨체스터에서 줄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고용하고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자본가 엥겔스의 관점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267~8쪽)

 

[ 제18장 ] 에테르, 다시 문제는 저항과 보텍스

 

라그랑주를 기반으로 패러데이에서 캘빈을 거쳐 맥스웰로 이르는 발전 과정을 이해하고 싶은 데, 수학을 모르던 패러데이처럼 꽉 막혔다. 어떤 공부를 해야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돌파해 볼 수 있을까?

 

"(맥스웰 방정식 Maewell's equation) 1865년 불멸의 저작 <전자기장의 역학 이론(A Dynamical Theory of the Electromagnetic Field)>이 탄생한다. 여기서 맥스웰은 전자기 현상을 에테르로 채워진 공간을 이동하는 파동으로 보았고, 이를 전자기파라 불렀다. 그 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았다. 이제 공간으로서의 '장'의 개념은 물리적 법칙을 매개하는 실제가 되었다. 이후 우주를 가득 채운 유체로 믿었던 에테르의 존재를 실험으로 증명하려는 시도가 계속된다. 여기서 시간과 공간을 결합한 상대성 이론이 탄생하게 된다.

열유체 방정식을 응용해 수학과 물리학의 난제를 푼 사례로 맥스웰 방정식만 있는 게 아니다. 2000년 클레이 수학 연구소는 이제 막 시작된 21세기에 해결해야 할 7개의 수학 난제를 제시한다. 이를 '밀레니엄 문제(Millennium Prize Problems)' (중략) 2012년 러시아 수학자 그리고리 페렐만 Grigori Perelman은 <리치 유동에 대한 엔트로피 방정식과 기하학의 응용(The Entropy Formula forthe Ricci Flow and Its Geometric Applications)>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밀레니엄 문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Poincaré conjecture)'을 풀었다고 주장한다. (중략) 무려 3년이나 걸린 검증 끝에 최초로 풀린 밀레니엄 문제로 공식 인정되었으나, 페렐만은 수상을 거부(했고, 지금은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에 도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282쪽) 

 

[ 제19장 ] 작은 배와 큰 배

 

앵글로색슨족과 프랑크족이 결혼해서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아이가 팡스에서 공부하여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1825년 아버지와 함께 템즈강 터널을 쉴드 공법으로 완성한다. 유럽은 uk를 포함한 거대한 한 덩어리다. 브루넬은 영국의 철도망이 10년 만에 3,200km를 돌파하는 데 주요한 공헌을 하고, 대형 증기선을 건조하는데 투신한다. 1838년 77m -> 1845년 99m -> 1859년 222m 그레이트 이스턴호의 건조를 성공시키고 브루넬은 죽는다.

 

러시아의 니꼴라이 1세는 1853년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하고 초기 해전에서 폭발하는 포탄을 이용해 오스만의 함선 10척을 수장한다. 지중해를 점령하고 있던 잉글랜드는 즉시 개입해서 기독교-이슬람 연합군이 사상 처음으로 구성된다. 팡스의 나폴레옹 3세도 참전한다. 2년 반만에 6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피해가 커지자 당황한 잉글랜드는 패러데이에게 전쟁 무기 개발을 요청하지만 완곡하게 거절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왜 그랬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행위였을까?

 

러시아의 군수업자였던 노벨의 아버지는 러시아 제국의 패배로 인해 도산하고, 스웨덴으로 돌아간 노벨은 새로운 화약인 다이너마트 개발에 성공한다.

 

[ 제20장 ] 레볼루션과 에볼루션

 

 [ 제21장 ]

 

[ 제22장 ] 되돌이킬 수 없는 것, 엔트로피

 

1789년 팡스의 대혁명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선언했다. 계몽주의에 근거한 노예 해방은 인권과 자본주의의 신장의 결과다. 유케이 1807년, 팡스1848년 2월 혁명, 러시아와 미국은 1864년이다.

 

"1861년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한다. 역사상 미국이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기록한 전쟁은 (중략) 바로 이 남북 전쟁이다. 이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보다 내전이 훨씬 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화약 군납 회사 듀폰은 은행가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과 손잡고 북군 장교를 이용해, 문제가 있는 불량 소총을 하나에 3.5달러에 사서 다시 북군에 22달러에 되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또한 금 시세를 조작하여 떼돈을 번다. 바로 이 듀폰과 모건의 협업에서 현대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지배하는 군산 복합체가 탄생한다." (326쪽)

 

계몽의 시대는 17, 8세기를 가르친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활약을 했을까? 

 

  • 토머스 홉스 (1588년 ~ 1679년)
  • 존 로크 (1632년 - 1704년)
  • 샤를 드 몽테스키외 (1689년 ~ 1755년)
  • 볼테르 (1694년 ~ 1778년)
  • 장자크 루소 (1712년 ~ 1778년)
  • 드니 디드로 (1713년 ~ 1784년)
  • 장 르 롱 달랑베르 (1717년 ~ 1783년)
  • 임마누엘 칸트 (1724년 ~ 1804년)
  • 체사레 베카리아(1734 ~ 1794)
  • 앙투안 라부아지에(1743 ~ 1794)
  • 니콜라 드 콩도르세 (1743 ~ 1794)
  • 라자르 카르노 (1753~1823)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 ~ 1832) : 헤겔을 계몽주의 학자로 나열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1853년 크림 전쟁에서 참여하지 않았으면서 전신과 철도망을 건설하며 국력을 키운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이름을 빌린 어릿광대(빅토르 위고의 명명)' 나폴레옹 3세의 팡스군을 격파하고,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도이치란트 제국 선포식'을 가진다.

 

미국 최초의 공학박사인 깁스는 1873년,

 

"전통의 물리량인 온도와 압력 그리고 부피 외에 엔트로피를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그래픽 표현법을 개발한다. (중략) 퍼텐셜은 달랑베르와 베르누이의 유체 방정식에서 출발하여 켈빈과 맥스웰을 거쳐 전자기학에 도입되었다. 이제 퍼텐셜은 열역학을 거쳐 화학 반응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엔트로피의 개념은 화학 반응의 비가역성, 즉 화학 반응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331~5쪽)

 

[ 제23장 ] 내전의 시대

 

"1834년에 시작되어 1847년에 완성된 다르시의 프로젝트는 12.7킬로미터 떨어진 상수원에서 물을 끌어와 총연장 28 킬로미터에 달하는 파이프라인으로 모든 건물과 각 층의 모든 가구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다르시는 수도관 라인을 설계하기 위해 파이프 속의 유체 저항식을 유도한다. (중략) 푸아죄유의 법칙은 혈류와 같이 속도가 느리고 지름이 작은 경우에서만 유효했고, 수도관에는 맞지 않았다.  (중략) 다르시는 또한 정수 필터 기능을 하도록 모래를 통과하는 구조를만들어 가정마다 깨끗한 물을 공급한다. (중략) 이로써 서양은 고대 로마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각 가정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시스템을 갖게 되었으며 그 시작이 바로 디종이었다. 이후 파리, 런던 등에서 이를 모방한 수도 체계가 만들어졌다." (339쪽)

 

"1871년 2월 보불 전쟁의 항복 조약을 비준할 프랑스 국민의회가 독일의 배후 조종으로 소집되자 파리는 술렁이기 시작한다. 3월 1일 항복 조약이 비준되고,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지만, 파리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3일 뒤 조용히 철수한다. 당황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가 3월 18일 국민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하려고 하자, 양측이 충돌하고 파리는 스스로 선거를 통해 3월 28일 자치 정부를 구성한다. 이것이 파리 코뮌으로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이다. 1871년 5월 21일 프랑스 정부군이 파리에 진입하기 시작하여, 프랑스 군대끼리 전투가 벌어지는 내전이 발생한다. 진압군은 거리에 보이는 비무장 시민들조차 보이는 대로 무차별 사살, 매장하여, 사망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10만여 명이 체포된다. 이를 '피의 일주일'이라고 한다.

 

나폴레옹 3세에게 추방당해 벨기에서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하던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뮌(1871년)이 탄생하자 귀국해 총을 들고 방어선에 나섰다. 여기에 이탈리아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하던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도 합류했다. 이처럼 파리 코뮌에는 당시 유럽 전역의 좌파들이 총집결한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종결되었고, 겨우 살아남은 빅토르 위고는 오랜 망명지였던 벨기에로 돌아간다. 하지만 벨기에 사람들은 파리 코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대문호 위고에게 돌팔매를 던졌다." (343~4쪽)

 

 

"1887년 본격적인 에펠탑 건축이 시작되고 수백 미터 높이의 대형구조물이 파리 시내 한복판에 올라간다. 파리 예술계는 흉측하다며 에펠탑을 강하게 반대한다. 선두에는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로 프랑스 건축계의 대가가 된 가르니에가 있었고, 음악가 샤를 프랑수아 구노(Charles- François Gounod), 소설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등이 뒤따르며 각종 칼럼과 논평으로 에펠을 맹공격한다. 반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에펠의 전략은 속전속결이었다. 무려 250만개의 리벳과 1만 8000개의 철골 구조물 모두를 머리카락 굵기 이내의 공차로 관리해 조립 시간에 낭비가 없게 했다. 이로써 단 2년 만에 324 미터 높이의 구조물이 세워진다. 오페라 가르니에의 공사 기간이 무려 14년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건축 기술의 엄청난 발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탄생 (중략) 기술과 예술의 대결인 듯한 논란이 벌어지자, 에펠은 에펠탑 4면에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72명의 프랑스 과학 기술자들의 이름을 보란듯이 금으로 새겼다. (중략) 보르다, 쿨롱, 라그랑주, 라부아지에, 몽주, 라플라스, 르장드르, 프로니, 푸리에, 앙페르, 게이뤼삭,푸아송, 나비에, 코시, 코리올리, 카르노, 클라페롱, 스트럼, 푸코 등이 있다." (344~6쪽)

 

프랑스는 이집트와 공동으로 건설한 수에즈 운하의 관리권을 영국에게 빼앗기고(로스차일드의 유태인 자본을 이용)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추진한다. 에펠이 참여한 이 사업에도 유태인 자본이 도입되었는데, 뇌물 사건이 터져 에펠은 구속되고 운하의 건설은 미국으로 넘어간다.

 

"(대혁명 이후 공화정에 대한 요구는, 1871년 파리꼼뮌의 비극으로 끝났지만) 에펠탑이 완성되었고, 1889년의 파리 박람회가 대성공을 거두며 비로소 프랑스 제3공화국은 안정에 들어서게 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공화정이 시작되었지만, 프랑스 제1공화국은 12년, 제2공화국은 불과 4년을 버텨, 프랑스 제3공화국이 탄생한 1870년까지 81년 동안 공화정이 실시된 기간은 단 16년뿐이었다.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이 모두 군사 쿠데타로 몰락했으니, 제3공화국의 (쿠데타를 도모한 전쟁장관) 불랑제 장군에 대한 두려움과 견제는 당연했다. 이러한 위기를 잘 극복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안정을 찾고 1940년 나치 점령까지 70년을 지속한다. 이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 유지된 공화국으로, 현재의 프랑스 제5공화국은 1958년에 시작되어 아직 6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제3공화국 시대는 프랑스 문화 예술 및 과학 기술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기억되어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로 불린다." (346쪽)

 

[ 제4부 ] 정말이지 그때는 아름다웠다.

 

[  제24장 ] 혼돈과 불규칙

 

양자역학의 시대가 온 것은, 유체역학 보다 양자역학이 쉬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1895년 논문에서, 원래 의도와 달리 레이놀스는 난류 발생 메커니즘을 규명하지는 못했다. (중략) 좀머펠트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을 선형화한 '오어-좀머펠트 방정식(Orr-Sommerfeld equation)'을 만들어 불안정성을 보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였던 천재 수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좀머펠트 방정식을 풀다가 기겁하여 지도 교수까지 바꾸며 양자 역학으로 도망가 버린다. (중략 / 램은) 말년에 “이제 나이가 들어 하늘나라에 가서라도 규명해야 할 물리학의 난제를 생각해 본다면 양자역학과 난류가 있는데, 그나마 양자 역학은 답이 좀 있을 것 같은데 난류는 영 희망이 없어.”라고 실토하며 하이젠베르크와 견해를 같이했다." (360쪽)

[ 제25장 ] 연속과 불연속

 

다구가 자주 이야기했던 연속과 불연속의 문제. 우리가 연속으로 이해하는 자연계의 모든 것은 불연속이다. 전자의 궤도가 그렇고, 반도체도 0과 1의 불연속이며, 양자역학의 세계도 그렇다. 그렇다고 무엇이 문제인가? 연속이면 어떻고 불연속이면 어떤가? 인과론으로 이해하면 어떻고, 인과론이 깨지면 어떤가?

 

"달랑베르에서 시작된 소리의 파동 방정식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푸아송에 의해 풀리기 시작한다. 1848년 스토크스는 '이동파(traveling wave)' 형태로 전개되는 이 해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음파의 방정식을 만족하는 해에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19세기 중반 유체 역학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충격파(shock wave)'가 학계의 이슈로 등장한다.

(중략) 당시 스토크스는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문장인 "자연은 비약을 만들지 않는다(Natura non facitsaltus)"의 신봉자였기에, 이러한 불연속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레볼루션의 단절보다 에볼루션의 연속을 믿었던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이 문장을 무려 일곱 번이나 언급했듯이, 라이프니츠의 이 문구는 19세기 대부분 학자가 받아들이던 신념이었다." (365쪽)

 

고대의 원자론이 무려 2천 년 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연속이라는 감각 때문이었을까?

 

"고대 그리스 초기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등의 자연철학자들은 나뉠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아톰(atom, 원자)'이라는 미립자가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의 본질은 불연속이었다. 이를 원자론으로 부활시킨 것은 19세기 초 줄의 멘토였던 맨체스터의 돌턴이었고, 이를 계승한 카를 마르크스는 1841년 박사 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 철학의 차이」를 통해 헤겔 철학을 극복하는 도구로 삼았다." 

 

대충이라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정리는 하고 있지만, 절대로 앎에 접근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고 있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흔적을 남겨두기 위해서다.

 

"볼츠만은 클라우지우스와 맥스웰이 이론을 발전시켜, 통계 역학으로 엔트로피의 비가역서을 설명하려고 했다. (중략) 엎질러진 물이 스스로 컵에 담길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는 것. 따라서 볼츠만은 통계 역학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연의 불연속을 가정한) 원자 가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지만 (중략) 당시의 기술로는 미립자의 세계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다. (중략) 볼츠만은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을 시간의 방향성과 결합하여 다윈의 '에볼루션'을 강력히 지지했기에, 진화론까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중략 / 충격을 받아 볼츠만이 자살하고 나서야) 아인슈타인이 1905년 발표한 브라운 운동과 광양자에 대한 두 논문은 마흐가 집중 공격한 원자론의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중략 / 사회주의 사상가 중) 마흐에게 맞선 유일한 사상가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 정도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1909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출판된다. (중략)  톰슨이 1906년 전자를 발견하고, 제자인 러더퍼드가 1911년 원자핵을 발견하면서, 현대의 원자 모형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자연에는 불연속이 없다는 믿음이 깨지고, 연속체 continuum가 아닌 불연속을 의미하는 양자 quantum가 지배하는 미시 세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372~6쪽)

 

[ 제26장 ] 판타 레이와 새로운 산업의 탄생

 

플라스틱의 뿌리가 천연섬유의 재료인 셀룰로스라는 사실. 천연 셀룰로스를 분해하여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려면 소와 같이 위가 여러 개인 반추동물이 세균이 분비하는 효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천연 고분자 셀룰로스에 질산이 첨가되면 강력한 폭발 물질이 되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다. 이것이 나이트로셀룰로스로서, 같은 시기 발견된 나이트로글리세린과 함께 기존의 재래식 화약을 급속히 대체한다. 한편 1869년, 코끼리 상아 하나에서 당구공을 8개밖에 생산할 수 없어 당구공 수요를 도저히 맞출 수 없던 미국의 당구업계는, 당구공 공급 부족을 해결할 대체 물질 개발에 거액의 상금을 건다. 이에 미국 발명가 존 웨슬리 하얏트는 나이트로셀룰로스에 몇 가지 첨가물을 더해 셀룰로이드를 개발하여 상아를 대체한다. 이렇게 인류 최초의 플라스틱이 탄생한다. (중략) 고분자 혁명의 시발점이 된 셀룰로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존재하는 천연 고분자이다. 인류는 이를 이용한 옷감으로 빙하기를 이겨 냈으며, 종이를 만들어 문명을 이룩했다." (381쪽)

 

"1889년 프랑스에서 한 남자가 펑크 난 던롭 타이어를 때우기 위해 미슐랭을 찾았다. 최초로 고무를 방수 재료로 사용한 찰스 매킨토시의 조카딸로부터 시작된 미슐랭은 정작 고무로는 별 재미를 못 보고 농기계 수리나 하며 회사를 연명 (중략)  던롭의 타이어를 유심히 살펴보던 미슐랭 형제는 펑크가 났을 때 접착제로 때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기존의 공기 주입식 타이어를 현재와 같은 착탈식으로 바꾸어 쉽게 교체하도록 만들었다. (중략) 미슐랭은 자전거 타이어 시장을 평정해 버린다.

1895년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가 둘로 분열한다. 당시 최대 스포츠 신문 르 벨로는 무죄를 지지하고, 라이벌신문 로토는 유죄를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미슐랭이 주요 주주였던 로토는 자신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기 위한 이벤트를 만든다. 이것이 1903년 시작된 자전거 경주 대회 '투르 드 프랑스'이다. 로토의 바람과 달리 1906년 드레퓌스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중략) 1900년 미슐랭은 자동차 타이어 시장에 진출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팔리지 않자, 타이어를 많이 팔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한다. 자동차 여행용 안내 책자를 만들어 미슐랭 타이어 교체 방법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지점들을 슬쩍 집어넣는 것이다. 여기에는 '믿을 만한 호텔과 식당'을 표시함으로써 여행자들의 주목을 받도록 했다. 이 책이 미슐랭가이드이다." (385~6쪽)

 

[ 제27장 ] 유동성 에너지 석유와 자동차 혁명

 

파나마를 콜롬비아로부터 강제 분리시킨 제국주의자 시어도어 루즈벨트. 반독점법의 시행으로 자본주의 경쟁 체제 유지.

 

1901년 공화당 대통령 매킨리 암살 ->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직 승계

1902년 셔먼 반독점법 실시 -> 록펠러와 스탠다드 오일, J.P.모건을 비롯한 43개의 재벌 해체(테디 베어의 탄생)

1904년 러일전쟁에서 비밀리에 일본 지원 -> 미국 중재로 포츠머스조약 체결 -> 루즈벨트 노벨평화상 수상

1907년 미국 공황발생 -> J.P. 모건 주도로 구제 금융안을 만들고 1913년 FRB 설립 

 

헨리 포드라는 인물이 문제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사의 평가는 인색하다고 할 것이다. 균형을 잘 잡고 있었던 민태기가, 헨리 포드에 와서는 갑자기 한 쪽으로 치우친다. 왜? 포드의 성과와 혁신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한다. 특히 그의 혁신은 "제대로 보상하고, 제대로 쉬게 하고, 제대로 일하게 하자"다. 인간 세계의 영원한 꿈인 -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낙원에 도달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 하지만 그의 과오도 만만치 않았다. 노조를 거부한 것은, 자신만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엘리트주의의 반영이다. 굳이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다.

 

"포드는 단순한 자동차 생산자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시대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포드 시스템으로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추었고, 주 5일제의 시행으로노동자에게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을 가져다 주었으며,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소득주도 성장'으로 인류를 대량 소비의 사회로 이끌었다. 또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하여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보장 (중략) 이 때문에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조차 새로운 이념으로 떠오른 '포드주의'를 사회주의 모델로 간주했다. 하지만 1929년의 대공황으로 노동자의 천국 디트로이트에서 노동분쟁이 시작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헨리 포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대폭 수정되었다. (유태인을 싫어했으나 흑인과 장애인을 차별없이 고용했고, 노동조합을 싫어했으나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였다.)" (406쪽)

 

"멕시코 혁명 화가 디에고 리베라가 1933년 완성한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 노동자의 역동성을 강조한 이 그림이 큰 인기를 끌자, 록펠러의 아들 역시 리베라에게 벽화를 의뢰했다. 리베라는 뉴욕 한복판에 그려진 록펠러의 벽화에 더욱 대담하게 카를 마르크스와 레닌, 트로츠키 등을 등장시킨다. 이에 미국 예술계가 발칵 뒤집히고, 격렬한 논쟁 끝에 그림은 철거되었다. 이후 멕시코로 돌아간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부부에게 소비에트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에게 밀린 트로츠키가 1940년 망명해 왔다. 부부의 도움으로 은신하던 트로츠키는 결국 같은 해 암살된다. 트로츠키의 유언 “인생은 아름다워.”는 나중에 이탈리아 좌파 영화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의 1997년 영화의 모티프가 되었다. 한편,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 「인생 만세(Viva La Vida)」는 프랑스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영국 록 그룹 콜드 플레이의 최신 히트곡의 모티프가 되었다." (407쪽)

 

[ 제28장 ] 인류의 비상

 

산토스 뒤몽과 같은 안타까운 죽음과 노벨과 같은 행동을 저울에 달아볼 수는 없겠지만, 늘 스스로의 생명을 존중하는 쪽으로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한다.

 

"브라질의 부유한 집안에서 금수저로 태어난 산토스 뒤몽은, (파리에서) 비행기 개발에 집중해 1906년 자신이 직접 개발한 비행기의 시연에 성공한다. 그는 특허에 목맨 라이트 형제와 달리 모든 기술을 공개해 프랑스 항공산업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중략) 1931년 브라질로 돌아간 산토스 뒤몽은 1932년 발생한 브라질 혁명에서 자신의 비행기가 대량 학살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자살한다. 그의 업적을 기려 브라질 리우 공항은 산토스 뒤몽 공항으로 불린다." (410쪽)

 

[ 제5부 ] 명백한 것들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제29장 ] 전쟁의 소용돌이

 

[ 제30장 ] 제국의 몰락

 

80년대에 프레디 머큐리를 보면서 '왠 미친 놈이지?'라며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퀸의 노래들은 대체로 좋아했다. 왜?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와 별개로 그의 리듬이 좋았기 때문이다. 파르시에 게이, 그리고 마약까지. 인간은 비천하면서도 독특하기에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헤디 라마르도 그런 사람이다. 아, 만나고 싶다. 비록 그녀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겠지만.

 

"헤디 라마르(Hedy Lamarr)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치의 집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명인 중 하나였다. 그녀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끼로 1930년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신 노출 영화 엑스터시에 출연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중략) 어릴 때부터 과학 기술에 심취했던 그녀는 미국 망명 후 저녁마다 화려한 할리우드의 파티보다는 지식인들과의 토론을 즐겼고, 거기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발명하는 것에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가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어뢰의 무선 조종을 획기적으로 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특허를등록한다. 당시 기술로 그녀의 특허는 상용화가 힘들었지만, 1990년대 이후 무선 통신이 발달하며 휴대전화의 기본이 되었고, 와이파이, 블루투스 등에도 응용되면서 그녀의 업적이 다시 부각되고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2000년 미국에서 사망한 그녀는 빈 중앙 묘지 볼츠만의 묘 근처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에는 "영화는 순간이지만, 과학 기술은 영원하다."라는 평소 그녀가 늘 하던 말이 새겨져 있다. 한편, 그녀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랍대령의 집으로 등장하는 잘츠부르크 저택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이 영화가 오스트리아와 나치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예를 들어,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하는 에델바이스는 오스트리아 전통곡이 아니라 영화 속 창작곡이다." (450쪽)

 

 

[ 제31장 ] 유동성과 경제대공황

 

혹시 민태기는 계몽주의 시대의 디드로나 달랑베르처럼 백과사전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 철학, 정치, 외교, 음악, 미술을 아우르는 21세기의 백과사전. 백과사전은 논문이고 이야기다. 논문을 읽게 하기 위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관심을 최대로 끌어모은 다음에 논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세상을 무지에서 깨어나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빈분리파 미술관(비엔나 세제시온즈게바오이데 Wiener Secessionsgebäude), 1897년 유럽 최고의 부호였던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가 지어준 건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어린 시절 그의 집에는 아버지가 후원하는 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나 구스타프 말러 (GustavMahler)는 그냥 주말에 가족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었고, 구스타프 클림트(GustavKlimt)는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일개 화가일 뿐이었다.

 

엄격한 철강 재벌 아버지와 달리 아들들은 모두 감수성이 예민했다. 세기말 빈의 분위기에 편승해 2명의 형이 자살하며 비트겐슈타인 역시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원래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는 당시 귀족들이 하던 것처럼 최고의교수들을 고용해 집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들의 연이은 자살에 남은 아들들을 급히 일반 학교로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고등 교육 기관인 김나지움에 보낼 생각이었지만,입시 교육을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비트겐슈타인은 입학 시험에 떨어진다. 대신 1903년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 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는 동급생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있었으나, 워낙 내성적인 비트겐슈타인의 성격 탓에 두 사람이 알고 지낸 것 같지는 않다.

 

한편, 기존의 보수적인 화풍에 '단절'을 선언한 클림트를 선두로 등장한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는 빈의 세기말적 분위기가 더해지며 에곤 쉴레(Egon Schiele)에 계승되었다. 클림트와 에곤 쉴레는 1918년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린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한다. 이 독감은 코로나19 이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바이러스로 제1차 세계 대전 사망자의 3배가 넘는 사망자를 기록한다. 이 때문에 종전이 앞당겨졌다는 평가도 있다." (458쪽)


생각해 보면, 독이 든 사과나 한 입 베어먹은 사과를 멋진 그림으로 탄생시킨 인간들의 능력은 참으로 위대하다. 버려진 그 무엇이, 실제로는 처참하고 참혹할지라도, 우리들의 뇌는 어차피 제어된 영화를 끊임없이 상영한다. 조작이 가능하다. 해 보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해냈다. 한 입 베어먹은 사과, 유디트의 살인, 반고흐의 작은 방 등등. 인간은 참으로 비천하고, 대단히 재미있는 존재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강의가 시작되자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1931년 입학한 앨런 튜링도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튜링은 세상 모든 현상을 반복된 기계 연산만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현대적인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기반이 되었다. 나중에 그는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하는데, 그의 이야기는 영화화되기도 했고, 애플 컴퓨터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앨런 튜링을 꼽았다." (463쪽)

 

손자의 36계 줄행랑도 다시 생각해 보자. 유체역학을 수학으로 풀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두 명의 천재가 과제로부터 도망쳐서 마침내 성공한다. 하이젠베르크와 화이트 헤드. 반면에 끝까지 부여잡고 고민하던 볼츠만은 자살한다. 전쟁 특히 독립전쟁의 시기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나 스스로 해결 불가능한 과제에 부딪혀 많은 지식인들이 좌절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도망가는 방향이 적들의 품이 되면 반역자가 된다. 36계를 비웃는 사람들이 많은데, 늘 36계를 생각해야 한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고장난 벽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최용식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내 머리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가동해서 예측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늘 예상을 하고는 한다. 대체로 틀리거나 고장난 벽시계와 같은 헛소리나 하고 있다. 정의는 승리한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집단지성. 

 

"케인즈는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며 직격탄을 날린다. (중략) 공황을 설명하기 위해 '유동성 liquidity이라는 유체 역학 용어를 경제학 전면에 도입한다. (중략) 가격이 내리면 소비가 증가하지만, 경제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아무리 가격을 내려도 지갑을 닫게 된다. 그 이유는 가계의 입장에서 위기 상황에서는 '화폐 유동성(cash flow)'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플레이션이 계속될수록 소비는 더욱 수렁에 빠진다. 케인스는 이를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미 22세 때 뉴턴 프린키피아 초판본을 구매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뉴턴 전문가였던 케인스는 자신의 경제 이론에 이처럼 물리학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케인스가 바라보는 유동성은 단순한 유체가 아니라 끈끈한 점도를 가져 방향성에 따라 '저항(resistance)'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중략) 위기상황에서는 시장의 기능이 마비되어 가격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므로(시장의 실패) 정부가 나서서 '소비'와 '노동'을 일부러라도 만들어야 '유동성'이 회복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사회주의 계획 경제로 인식되어 초기에는 많은 반발에 직면한다. 하지만 케인스가 미국에서 이 내용을 발표하자 정부의 공공 개발 프로젝트인 '후버 댐'으로 경제난을 돌파하려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즉각 지지를 보낸다. (중략) 영국 정부는 케인즈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동성 확보에 걸림돌이던 금본위제를 폐지한다. (중략) 케인즈는 공황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사회주의 이념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자본주의를 구원했다." (465~6쪽)

 

세상이 단순히 돌고 돌아 제자리에 있다고 볼 수 없듯이, 좌우가 각각의 역할에 따라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공감할 수가 없다. 좌파는 늘 새로운 생각과 만물평등의 이상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만들고 실현해 간다. 자신을 지키는 임기응변에 능한 우파들은, 사회를 지키는 건전한 날개로 보기 힘들다. 오로지 자신들만을 위해 만물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로켓처럼 날아가는 데,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좌파라는 한 방향의 추진력에 의해 추동된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추락하지만.

 

"코페르니쿠스가 화폐의 유동성 문제를 제기한 이후 뉴턴과 프랭클린, 매슈 볼턴이 뒤를 이었고, 의사 케네의 경제 순환에 대한 물리학적 관점에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이 탄생했다. 시대에 따라 가장 민감한 이슈를 다루던 경제학은 대공황과 세계 대전과 맞물리며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분야가 되었다. 이처럼 경제학이 과학 못지않게 중요해지자, 1969년부터 노벨 경제학상이 만들어졌다.

 

코페르니쿠스의 레볼루션과 뉴턴 이후, 과학이 시대 상황과 정치 배경에 무관하지 않았듯이, 경제학 역시 현실 정치와 결합한 지배 권력의 관점이 철저히 투영되었다. 시대별로 변화하는 시각에 따라 초기에는 폴 새뮤얼슨(1970년)과 같은 케인스의 후계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하지만, 곧 하이에크(1974년), 프리드먼(1976년)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수상하고, 나중에는 다시 스티글리츠(2001년), 폴 크루그먼(2008년) 등 케인스주의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것이 그 예이다." (472쪽)


[ 제32장 ] 로켓의 정치

 

프란틀의 유태인 제자 폰 카르만은 미국의 로켓시대를 연다. 매카시즘의 광풍을 맞으며. 덕분에 중국도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핵무기를 완성한다. 

 

"(거짓으로 포장된) 이념논쟁은, 한 국가의 발전을 수십 년 뒤처지게 했다." (482쪽)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다윈과 함께 비글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 피츠로이는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기상학자였다. 그런 그가 다윈의 진화론을 부정하면서, 그런 다윈을 만든 것이 자신이었다며 자살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과학자도 믿을 수가 없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어떤 동의가 이루어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것이 공부하는 자세이고, 또한 즐거움이다.

 

1) 폰 카르만, 천쉐썬을 칼텍 박사과정으로 받아들이다. 1936년.

2) 천쉐썬, 로켓 동아리 JPL 가입, JPL은 위험한 폭발 시험으로 자살특공대라 불린다. 마르크스 연구. 

3) 카르만-천쉐썬, 도이치란트 V2 로켓 책임자 프란틀과 폰 브라운의 연구자료 접수. 1945년.

4) 천쉐썬,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시민권 신청이 거절되고 미국에 구금. 1950년.

5) 마오쩌둥, 한국전에서 사로잡은 미군 조종사 11명과 천쉐썬 가족을 교환. 1955년.

6) JPL 과학자들 탄압, 암살인가 사고인가.

7) 소련,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1957년.

8)  폰 브라운과 JPL 멤버들로 구성된 NASA 설립, 미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발사. 1958년.

9) 천쉐썬, 핵무기와 수소폭탄 완성. 1964/67년.

10) 천쉐썬, 중국 최초 인공위성 발사. 1970년. 

11) 중국 상임이사국에 선정. 미중 수교. 1971/79년

 

[ 에필로그 ]

 

돌이켜보면 중학교 시절이 참 좋았다. 매일매일 깨달음의 기쁨을 만끽하던 시절이었다. 너무 좋아서 밤늦게까지 산동네를 뛰어다니며 놀 시간이 없어져 버렸다. 영훈중학교에서 0교시와 9교시를 소화하느라 잠 잘 시간도 부족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과목들은, 한문-세계사(?)-물상-영어-수학(은 마스터 수학으로 혼자 공부했다. 선생들은 때리기만 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그렇게 학생들에게 자신있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까?)

 

이공계 교육을 받고 나온 안철수의 한심한 정치행보를 보더라도 균형있는 교양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몇 년후부터 중학교에서처럼 고등학교에서도 문이과를 분리하지 않고 교육을 한다고 하니, 많은 학생들이 폭력이 없는 상태에서 균형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한다.

 

"(1950년 6월 26일, 최규남은) 인텔리 계층의 인문계 과목 편식을 우려하며 이공계 학문과의 통합 사고를 강조 (중략) 요지는 '왜정 시대'에 시작된 문과와 이과의 구분으로 인해 이러한 불균형 교육이 시작되었음을 밝히며, "자연과학에 혐오감을 가지고 공부하기를 기피하던 학생이 고등학교에 와서 자연 과학의 과목이 거의 없는 문과를 마치고 또다시 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순수한 문과계의 학문만을 학습하여 가지고 교문을 나온 그네들은 자연 과학에 아무런 교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학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반신불수의 대학 졸업생들이다. (중략)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발표하며 애플이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의 교차점에 있다며 보여 준 슬라이드 한 장으로 우리나라에 느닷없이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리버럴 아츠는 그리스 로마에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 교육에서 출발했다. 이후 중세를 거쳐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이 탄생하자, 대학 교육에서 기초 과목으로 정착한 리버럴 아츠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등의 인문학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을 포함했다." (484~5쪽)

 

교육이,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떤 벽을 넘어가는 사다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다리는, 공식을 증명하는 참고서일 수도 있고, 이론의 의미를 풀어주는 해설서일 수도 있고, 이론이 만들어지는 역사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사다리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부하려는 의지를 가진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다.

 

"수학과 과학의 논쟁들은 당대의 시대 배경 및 정치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역사의 산물들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굴절광학과 기하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칸트의 박사 논문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과 헤겔의 박사논문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를 상기한다면, 그들의 철학은 결코 정신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다. (중략) 또한 프랑스 혁명의 사상 기반이 되었던 볼테르의 철학 서간은 뉴턴 역학을 소개하는 책 (중략) 과학자들은 과학으로만 소통하지 않았고, 동시대의 음악, 미술, 문화 소양을 끊임없이 흡입하여 이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또한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백 년에 걸친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단 한 번도 과학기술은 순수한 과학 그 자체로 독립해서 존재한 적이 없고 끊임없이 다른 영역과 섞이며 스스로를 재창조하거나 소멸시켰다. 역대의 그 어떠한 대학자도, 노벨상을 받은 이 시대의 석학들도 결코 한우물을 판 적이 없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사회는 과학자들에게 경주마와 같은 눈가리개를 씌우고 특정 분야 속에만 가두려 하고 있다. 이런 반쪽 시각 때문인지 이를 틈타 일부 과학 평론가들은 현대의 과학 성과들을 전혀 상관없는 내용과 연결시켜 과학을 신비화하기도 한다. " (485~6쪽)

 

"과학은 고립된 개별 분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탄생시킨 우리 사회에 대한 전체를 포괄하는 통합 사고의 산물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모든 것이어야 한다.

                  - 카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487쪽)

 

긴 이야기에 비해 결론이 너무 짧았기에 민태기도 에필로그라는 이름으로 균형있는 교육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정리한다. 

 

오랫동안 읽어야 했다. 한 장 한 장을 전부 확인해 보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실현할 수 없는 욕망이겠지만, 어쩌면 또 하나의 꿈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싶은 것은 전부 알도록 하자.

 

정말 오래된 내 과제 중의 하나가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돛단배 문제다. 83년 1학기 교양 물리학의 문제였는데, 답을 쓰지 못했다. 그 뒤로도 계속 이 문제가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 왜 나는 답을 하려 하지 않았을까? 포기하지 말자. 볼츠만이나 앨런 튜링, 괴델, 존 내쉬처럼 미치거나 자살에 이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수박 겉핥기라도 좋으니, 알려고 노력을 하자. 그러면 나아가는 기쁨,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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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