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안티고네가 계속 들려온다. 나는 읽지 못했는데, 여기저기에서 자꾸 인용이 된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읽기를 잘 했다. 별로 어렵지도 않고, 주제도 선명해서 이해하기도 좋다. 빨리 읽으시라.
남기호의 아래와 같은 생각은 처음부터 동의할 수가 없다. 안티고네는 오래된 인간의 법칙과 현재의 인간의 법칙의 충돌이다. 오래된 인간의 법칙을 신의 법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신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면, 동의할 수 없지만 존중한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각각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 가족과 정치 공동체, 여성과 남성을 대변하는 인물들로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자신을 관철하려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결과이다. 따라서 이 결과는 안티고네뿐만 아니라 크레온에게도 비극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고 정치 공동체의 보편만을 관철하려는 실정 권력으로서의 크레온에 비해, 이에 대항해 인간을 인간 자체로서 인정하려는, 자연법 원리의 수호자로서, 안티고네의 인륜 의식은 더 완전하다. " (남기호, '법철학의 관점에서 본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 중에서)
민주정치라는 '다수에 의한 정치'는 전체주의로 오염될 위험이 늘 있다. 다수의 지혜로 만들어진 제도가, 누군가를 겁먹게 하고,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길고양이가 있다. 나를 경외하는. 그녀를 위해서, 양지바른 골목을 잡아 깨끗한 그릇에 먹이를 담아준다. 내가 사라진 빈 공간에서, 비로소 그녀가 먹이를 먹는다.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며, 나를 경계하며.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자유가 위협 받으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길고양이에게 충분한 자유를 준 것일까? 그녀를 내 만족의 도구로 삼기 위해 노력한 것일 뿐일까?
지금까지 받은 삶의 고통의 무게가 너무 버겁기도 했겠지만,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알지 못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해 너무 쉽게 접근한다. 매우 신중을 기하고, 생명의 바퀴를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모를 삶의 의미가 생명의 바퀴가 돌아가면서 점점 더 많이 드러난다. 그러다가 죽음이 목전에 나타나면, 이렇게 생각해도 좋다.
"(안티고네 : 내가 경건한 범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이들보다도, 지하에 계시는 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지." (74~5)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 다만, 표현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관계가 중요시되는 인간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행동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생각과 말이 고귀해도, 현실에 적합한 행동은 다를 수가 있다. 크레온의 이런 생각에는 동의한다.
"(크레온)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에는 한 인간의 영혼과 심성과 생각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중략) 사악한 자들을 올바른 사람들보다 더 존중하지는 않을 것이오." (175~7 / 208)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같은 표현이었지요. 그리스어 원문을 읽는다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애플에서 제공하는 영어책을 찾아봤습니다. 멋진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2022년 12월 22일에 돌아가신 천병희 선생의 노고가 느껴지는 번역입니다.
"(파수꾼) 가까운 길이 먼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 무서운 소식은 오래 망설이게 하는 법이지요." (232 / 243)
"Much thought extends a furlong to a league. / The bearer of dread tidings needs must quake." (Oedipus Trilogy https://books.apple.com/kr/book/oedipus-trilogy/id955028346)
* furlong : 1/8마일 / league : 3마일=4.8km
* tidings : 소식, 정보 / quake : 덜덜 떨다
소포클레스가 기원전 5세기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부패와 사회악의 원인을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쯤되면 돈에 대한 욕심은, 인간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시작된 것이니, 마치 힘든 일을 싫어하는 마음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동양 특히 한국에서는 물욕이 나쁘다는 교육을 너무 많이 받다보니, 일부 특권층들만이 몰래 물욕을 채워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다.
"물욕과 돈욕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니, 그 욕망을 강아지 길들이듯이 잘 길들여서, 부유하면서도 자유롭고 건전하게 사는 방법을 찾아 행복하게 살자."고 새롭게 교육을 시켜야겠다. 모든 시민들에게.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것 중에 돈만큼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소. 돈은 도시들도 약탈하고, 남자들을 그들의 집에서 몰아내지요. 돈은 정직한 마음씨를 변하게 하여 수치스런 짓들을 하도록 단련시키지요. 돈은 또 사람들에게 악행을 저지르고, 온갖 불경한 짓을 다 알도록 가르치지요. 그러나 누구든지 돈에 팔려 이런 짓을 저지른 자는 언젠가는 벌받게 마련이지요. (중략) 너는 수치스런 이익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보다는 파멸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게 될 테니까" (295~314)
인간은 말한대로 이루어 내는 무서운 능력을 가진 존재다. 인간이 신의 인격화된 모습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신격화된 모습이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로마에서는 많은 인물들을 신의 지위로 끌어올려 숭배하였고, 동양에서도 공자나 관운장과 같은 신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있다.
"(코러스) 무시무시한 것이 많다 해도 인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내리덮치는 파도 아래의 잿빛 바다를 건너며, 다함이 없고 지칠 줄 모르는 대지를 갈아엎으며 괴롭힌다네. 말(言)과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그는 독학으로 배웠다네. 다만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수단만을 손에 넣지 못하였을 뿐. 질병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은 이미 궁리해냈다네. 때로는 악의 길을 가고, 때로는 선의 길을 간다네. 그가 정의를 존중한다면, 그의 도시는 융성할 것이나, 무모함으로 인하여, 불미스런 것과 함께 하는 자는, 도시를 갖지 못할 것이네." (333~375 / 무일 씀)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배워,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고, 새로운 시도로부터 얻은 경험으로 과거의 경험을 개혁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판단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맹세해서는 안 된다. 경험의 개혁을 멈추면, 결국 극단주의나 원리주의에 빠져 파멸할 수밖에 없다. 2,500년이 하나로 이어진다.
"(파수꾼) 인간들은 어떤 일이든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것이 아닙니다. 나중 생각이 처음 의도를 거짓말로 만드니까요." (388)
그리스 문학에서 나타나는 신들은 결국 인간이다. 인간이 250만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축적한 사회 운영의 원리가 곧 자연법이다. 안티고네는 인간들이 합의한 자연법에 근거하여, 지혜로 가득차 보이는 실정법을 거부한다. 매우 분명하다.
"(안티고네)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그대의 명령이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떄문이지요. 나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려워서 그 불문율들을 어김으로써 신들 앞에서 벌을 받고 싶지가 않았어요." (453~459 / 무일 씀)
페미니스트들이 안티고네를 페미니즘 운동의 시초라고 보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크레온이 군주로서 갖는 권위가 여성으로서 갖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레온의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다고 느낄 것이다.
"(크레온) 불에 지나치게 달군 가장 단단한 쇠가 가장 쉽게 부러지거나 부서지고, 고집 센 말들도 짧은 고삐 하나로 길들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노예라면,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이번 승리가 벌받지 않고 그녀의 것으로 남는다면, 나는 사내가 아니고 이 계집이 사내일 것이오. 내가 살아있는 한, 여인이 나를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474~525 / 무일 씀)
자연법과 실정법의 병립을 시도하려는 생각이 크레온에게 있었다면, 안티고네의 주장이 결코 불복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실정법은 인간 지혜의 산물이다. 그러나 실정법이 인간 전체를 지배하기 어렵다. 도덕이나 문화의 영역으로 남겨둬야 할 부분들이 많다. 지혜의 영역에서 벗어난 부분에서 사랑이 - 자비심이 작동해야 한다.
"(크레온) 나는 그녀 때문에 나 자신을 시민들 앞에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 불복종보다 더 큰 악은 없다. 그것은 도시를 파괴하고, 집들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결코 한 여인에게 져서는 안된다. 꼭 그래야 한다면, 차라리 한 남자의 손에 쓰러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657~680)
안티고네를 구하려는 히이몬의 접근 방법은 매우 특이했고, 차분해서 좋았다. 아버지가 좀 더 귀를 기울였으면 좋았겠는데. 사랑하는 연인과 존경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꽉 막힌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은 서로의 의견 차이를 드러내는 안타까운 결말을 예고하고 말았다. 좀 더 감정에 호소하는 방향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크레온) 나는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하나?
(하이몬) 한 사람에 속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닙니다.
(크레온) 국가는 그 통치자의 것으로 간주되지 않느냐?
(하이몬) 사막에서는 멋있게 독재를 하실 수 있겠지요." (736~739)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의 죽음을 매우 고결하게 취급한다. 마치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나 정절을 지키려는 조선의 여인들을 보는 듯하다. 살아서 하데스의 땅으로 간다는 것은, 비난할 수 없지만 말리고 싶다. 그러지 말자. 제발.
"(코러스) 그대는 기진케 하는 병에 쓰러진 것도 아니며,
칼의 대가를 받은 것도 아니오.
그대는 자신의 뜻대로 살다가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산 채로 하데스로 내려가는 것이오." (819~822)
어리석음은 오만이다. 오만이 작동하는 이유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혜롭되 사랑이 넘쳐야 어리석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다.
지혜와 사랑이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지혜와 사랑을 시소의 반대편에 올려진 무게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시소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고, 지혜와 사랑이 앉아있다.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해 가는 과정이다.
“인간에게는, 지혜가 가장 큰 행복이고, 어리석음이 가장 큰 재앙이다.” (결말 가까이에서)
그리스 비극은 아이스퀼로스에 의해 정리되고 소포클레스에 의해 꽃을 피웠다. 그들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은 처절하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해서 무시하지는 말자.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이해하자. 특히, 가장 큰 적과 가장 죄악은, 나이면서 나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오이디푸스가 죽인 것은 아버지가 아니고, 나의 또다른 자아이다. 크레온이 처벌한 안티고네도, 크레온의 또다른 선한 모습이다. 자신의 선한 모습을 죽임으로써 자신을 잃게 되었다.
"(소포클레스의 스승인 아이스퀼로스의) 현존하는 7편의 비극들은 모두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작품들이고 그의 어느 작품도 그가 이 전쟁에서 몸소 체험한 신의 섭리라는 근본 사상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시칠리아에 있는 그의 묘비명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그는 시인으로서보다는 마라톤의 전사(戰士)로서 후세에 기억되기를 원했을 만큼, 이 역사적인 전쟁에 참가한 것을 평생 동안 자랑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이 전쟁을 민족 간의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역사가 헤로도토스처럼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자유와 예속 간의 투쟁으로 보았으며, 희랍인들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인간의 교만(hybris)을 응징하는 신의 섭리로 보았던 것이다." (천병희 서문 중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신의 응징과 고난을 통하여 지혜에 도달한다."
안티고네를 시작으로 결국은 오이디푸스 비극 3부작을 다 읽게 되었다. 오래 묵은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아이스퀼로스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희랍 비극의 발전에 공헌을 했는데, 그가 처음으로 배우의 수를 두 명으로 늘리고 코로스(choros)의 역할을 줄여 대화(對話)가 비극의 중심이 되게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시학』 제4장 참조), 또 세 편의 비극이 통일된 전체를 이루는 이른바 '커넥티드 트릴러지(connected trilogy)’의 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던 것이다.” (천병희 서문 6쪽)
"그리스 비극은 우주와 자연보다는, 인간 자신을 탐구 대상으로 삼던 시대정신에 따라,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려던 진지하고도 치열한 시도였다." (천병희)
안티고네는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523) 라면서, 인간의 기본 의무를 실천하려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의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합당한 일일까? 아니다. 생명은 유지되어야 한다. 소포클레스는 이런 의문이 아예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안티고네의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다보니, 단순히 오빠의 장례의식이 아니더라도, 안티고네는 이미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 마지막 결심을 위한 계기를 실정법이 제공했다.
크레온은 융통성 없이 통치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다. 실정법의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의사결정을 한다. 조카인 안티고네의 호소와 아들인 하이몬의 정세 판단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국가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정법을 지키는 것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은 통치자 본인 뿐이다. 그래서 틀렸다. 아내도, 아들도, 조카도 잃고, 자신도 무너지고 만다.
실정법은 자연 상태의 인간들에게 질서를 부여하여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법 집행은, 폭력이다.
크레온은 실정법이라는 지혜만을 앞세우고, 자비롭지 못해서 파멸했다.
[1] 도저히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없는 설정이다. 온갖 잔인한 범죄자로 치환해야겠다.
1) 오이디푸스 ; 부모와 자식을 해치는 자 : 나의 이익을 위해 나와 국가와 공동체에 반역하려는 나
2) 이오카스테 ; 아들을 죽이려 했던 자 : 나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안락에 굴종하는 자
3) 하이몬 ; 친부를 죽이려는 자 : 나의 이익을 위해 천륜을 저버리는 자
4) 폴리클레이토스 ; 형제를 죽인 자 : 나의 이익을 위해 의리를 저버리는 자
5) 클레온 ; 조카를 죽이려는 자 : 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
[2]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뜻 :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추구하는 도덕 규율. 자연법. 거의 모두 인간들의 행위의 결과를 신의 뜻이라고 치부했다. 해석하기 부끄럽거나 어려우니 신을 핑계로 끌어들인다. 아무 일에나 신을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신성 모독이다.
[3] 그리스-페르시아전쟁(기원전 492~480년) : 아이스퀼로스는 이 전쟁을 정의와 불의의 전쟁이라고 했다. 페르시아인들과 같은 아시아의 민족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아테나이가 약속을 깨고 페르시아의 반란자들을 지원한 것이 원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전쟁은 전쟁이다. 전쟁을 자극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일당과 미국이 결코 정의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말도 못할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어리석음으로 고통까지 자초했다. 헬라스 또한 페르시아를 자극해서 승리라는 기쁨은 잠시였고,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내전에 이어 마케도니아와 로마의 지배까지 받아들여야 했으니 말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계기가 된다. 정의라면, 이런 결과에 이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