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햄프턴은 꽤 큰 도시다.
주변을 돌아보니 예쁜 기와집들이 즐비하다.
일단 식물원과 동물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위험하지 않은 동물은 그냥 풀어서 기르는 모양이다.
근사한 공작새가 생김새와 달리 불쾌한 목소리로
동물원이 마치 제 집인 것처럼 꺽꺽대며 돌아다닌다.
코알라 먹이주는 시간 오후 세시 십분.
이런 너무 일찍 왔군. 바로 옆이 또 골프 코스다.
어제의 엉터리 같은 플레이도 여전히 머리에 남아있건만,
걷기 운동이라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골프장으로 갔다.
아가씨에게 그린피를 물어 보았더니 11불이란다.
이런 뉴질랜드보다도 싸군.
어제는 22불이었는데. 일단 드라이버를 빌리고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이 골프장은 바비큐 플레이트까지 있었다.
천재아들의 아이디어로 그 판 위에 라면을 끓여 보기로 했다.
무려 삼사십분 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 드디어 물이 끓기 시작한다.
그런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리의 첫 라면은 맛있게 완성되었다.
오랜만에 라면을 먹었더니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함께 가서 샤워를 하고, 라운딩을 시작했다.
오늘도 여전히 빵점짜리 플레이의 연속이었다.
파에서부터 쿼트리플 보기까지 참 다양하게도 나온다.
점수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황당하고 못마땅한 것은 공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짐이 무거워 많은 공을 뉴질랜드에 두고 왔는데,
공이 없어서 헤매고 있으니 한심스러웠다.
세 번째 홀에서 황당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제법 잘 친 공을 보고 이번에는 어떻게 파나 한 번 잡아볼까 하고
열심히 공을 향해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를 새 한 마리가 쪼고 지나간다.
무슨 일인가 하고 그냥 가려는데 다시 한 번 공격해 온다.
어 이게 왠일이야.
뒤를 돌아보니 제법 커다란 검은 새가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얼른 골프채를 꺼내 들어 근접을 못하게 한 다음에
따가운 눈총을 느끼며 플레이를 했는데,
물론 좋은 결과는 오지 않았다.
마침 두 홀을 더 지나가자 잔디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있어 물었더니,
구월에서 십일월 사이에 그 새가 새끼를 키우느라고
그렇게 골퍼들을 공격한다고 한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아 그렇군. 내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서
거대한 인간에게 조차 덤벼들 용기가 있다는 말이지.
마지막 두 홀을 남기고 더위와 배고픔과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 나오는데,
왠 할머니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기분이 왜 그렇게 않 좋으냐고 묻는다.
오늘 최악의 플레이를 했고, 공도 다 잃어 버렸다고 했더니,
공을 줄테니 계속 플레이를 하겠냐고 묻는다.
너무 고마웠지만 걷기도 실컷 걸었고, 골프에는 흥미가 없는 상태였기에 포기했다.
대신에 이곳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사냐고 했더니
열다섯 사람 이상이 산다고 한다.
이름도 처음듣는 곳에까지 한국인들이 산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는 나도 우리 가족과 함께 일정한 직업을 갖고 있다면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곳 록햄프턴 사람들은 다들 여유가 있어 보였고
다른 사람들을 잘 도와주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정말 살 만하지 않겠는가?
다시 샤워를 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주변에 볼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관광안내소에 물었더니
산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와 강가 주변이 좋다고 한다.
쇼핑센터에서 쇠고기와 당근, 토마토를 사고 오랜 만에 시원한 커피 우유도 마셨다.
한국에서 마시던 바로 그 맛이었다.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제대로 개척되어 있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강가로 향했다.
바비큐 판에 사 가지고 온 쇠고기를 올려놓고 소금과 후추를 뿌려가면서 구웠다.
고기는 부드럽고 고소했지만, 크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영양 보충 차원에서 맜있게 먹었다.
오늘은 록햄프턴을 무조건 떠나야 한다.
한 백킬로 위 쪽에 말보로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곳에서 자기로 하고 출발했다.
깜깜한 밤 중에 남십자성과 초생달이 나란히 우리의 앞길을 밝혀준다.
참 환상적인 하늘의 풍경이다.
좋은 카메라만 있다면 꼭 기록으로 남겨서 다른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마음에 들게 찍히지를 않는다.
말보로는 아주 한적한 마을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우체국 앞에 전화기가 있어서 그리미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는다.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담배를 피우러 나온 이웃집 아저씨에게 여기에서 자려고 한다니까,
조금만 더 가면 수영장 앞에 공원이 있고 화장실도 있으니 거기서 자라고 한다.
아 무서운데.
그래도 친절한 안내를 거절할 수가 없어 그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어두우니 공원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 차를 세우고,
맥카페였다면 컴퓨터를 했겠지만 이곳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한국으로 보내는 엽서를 쓰기로 했다.
나는 세통을 썼고 천재아들은 한 통을 썼다.
이렇게 시간이 간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두고 잠을 청했다.
유난히 더워서 중간중간 에어컨을 켜 몸을 식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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