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부터 비가 내리더니 아침에도 계속 비가 온다. 잠깐 비가 잠잠한 순간에 St. Andrew 병원 응급실로 세수를 하러 갔더니 어제와는 달리 사람들이 전혀 없고 내가 왜 들어오는지 궁금하게 쳐다보았다. 무시하고, 양치하고, 세수하고, 다시 한 번 발을 씻고 나오는데 여전히 쳐다본다.
일단 병원에서 컴퓨터를 충전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서 차 안에서 못다 쓴 일기도 쓰고, 여행 계획도 세우기로 했다. 하루의 일정을 죽 따라가면서 적는데도 컴퓨터 충전된 것이 완전히 방전된다. 거의 90분 정도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다. 전지 기술이 많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디스플레이가 LCD인 이상은 더 이상의 효율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back light가 필요 없는 유기 EL이 빨리 실용화되는 것이 쓰레기도 줄이고 사람들도 편리해 질 것이다.
일기를 쓰는 동안 잠을 깬 천재아들이 배가 고프단다. 바깥에서 비가 심하게 오고 있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커피숍으로 가 보았다. 여의치 않으면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이곳에서 먹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문은 닫혀 있었고 야외에 있는 그늘막과 테이블이 식사하기에 적당하였다. 천재에게 얼른 밥 준비를 하라고 하고 나도 부지런히 준비를 했는데, 천재가 자기 자리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또 짜증이 났다. 재빠르게 움직여 주기를 바랐는데 이상하게 행동이 느리다. 지금까지 그렇게 편안하게 움직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나도 집사람도 이상하게 동작이 빠른 것이겠지. 그래서 결국은 큰 소리로 야단을 치고 나니 나도 천재도 기분이 상해 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참고 기다려 주지 못할까? 계속 긴장된 상황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 자기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항상 여유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주장하던 무일이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리 그러려고 해도 안 된다. 그저 여유 있을 때 여유 있는 정도가 무일의 한계인 모양이다.
Old Windmill이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산책 겸 언덕을 오르는데, 막상 찾아보았더니 1800년대 초반에 돌로 만든 방앗간이었다. 지금은 전망대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역시 여행안내 책자에 나와 있는 볼거리들은 억지로 만든 볼거리가 많다.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기는 하지만 실망스럽다. 다리를 건너 South Brisbane으로 갔다. 박물관과 Art Gallery가 있다고 해서다.
박물관은 그야말로 동물 박제들의 집합장소요 공룡 뼈다귀들의 모임 장소였다. 200년이 안되는 짧은 역사에서 그들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속옷에서부터 가죽 신 만들던 공구까지가 전부였다. 그래도 볼만한 것들이 있었다. 초기에 개발되어 시험 비행을 했던 비행기의 잔해들과 기계문명의 상징인 증기기관의 엔진과 자동차, 모터사이클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Art Gallery는 상황이 꽤 좋았다. 예술작품을 전시해 놓은 곳이니 공간도 충분하고, 입맛에 맞는 그림들도 간혹 있었다. 실내에 거대한 연못을 만들어 넣고 거기에 생뚱맞게 풍만한 아주머니의 구리 조각을 얹어 놓은 것에 웃음이 절로 난다. 좋아서가 아니라 정말 유치해서다. 그런데, 왜 그렇게 경비 서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Queensland 주립 도서관은 역시 브리즈번 강을 따라 산뜻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컴퓨터실을 들어갔더니 온통 한국 사람들이다. 이곳저곳에서 다음과 사이월드를 켜놓고 메일도 보내고 미니 홈피에서 놀고 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몇 명이냐? 강변의 경치 좋은 곳에 유흥시설이 아닌 사람들의 지식과 교양을 위한 장소인 도서관이 반듯하게 자리 잡은 것만큼은 부러운 일이었다.
만국기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기 좋은 장소였는데, 사람이 없었다. 네팔 가든의 집들은 어떻게 고증되고 왜 생겼는지 궁금했지만 별다른 안내가 없다.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열심히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사람씩 돌아가면 사진을 찍고 있다. 어쨌든 가이드는 그 이유를 알 것이다.
강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한 친구가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가 도착을 하니까 갑자기 멈춰 선다. 무일은 그것이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코인을 던지라는 것이었다. 무일 대신에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동전을 던져 넣자 다시 노래가 시작된다.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그 앞에 멈춰 서자 다시 노래와 동작이 멈추고, 아가씨들이 무슨 일이냐고 의아해 하는 동안에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깜짝 놀란 아가씨들이 도망을 가버린다. 이 친구는 풍부한 쇼맨쉽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반면 어쿠스틱 기타를 맨 빡빡머리 백인 친구는 자기 노래에 열중은 하고 있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노래를 들어 달라는 것인지 담력을 기르는 훈련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브리즈번 강가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 여기저기서 생일 파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귀찮아서 강변 벤치에서 브리즈번 시내와 강변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했다. 한강처럼 큰 강 보다 브리즈번강처럼 작은 강이 인간에게 더 정감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계천이든 안양천이든 양재천이든 서울 주변의 모든 강들이 되살아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들 작은 강들이 수량이 풍부해져서 작은 놀이배들을 띄우고 아이들이 들어가서 뛰어놀 수 있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큰 행복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기껏 청계천 복원한다고 고층빌딩이나 지어서 땅장사 하는 시정 담당자들이 도대체 이런 즐거움을 알겠는가.
주차장으로 가서 일단 밥을 지을 수 있는 환경인지를 보니 밥도 지을 수 있고 컴퓨터 충전도 할 수 있을 상황이었다. 약 1시간에 걸쳐 밥도 하고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브리즈번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일단 북쪽에 있는 누사 해변으로 출발할 계획으로 길을 잡았다. 지도가 없으니 어느 방향이 북쪽으로 가며, 어느 길을 타야 M1 Motorway를 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다리는 다시 건너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리를 건너기 위해 한 번의 맴돌이를 했고 공항 방면이 북쪽이었다는 생각에 공항 가는 길을 잡으려고 또 다시 한 바퀴 맴돌이를 했다. 마지막 확인 작업으로 길을 물었는데, 유난히 웅웅거리는 발음 때문에 this way와 sign을 따라가라는 말 밖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어쨌든 Motorway를 잘 탔다.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또 나왔다. 무엇인가 다른 볼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Highway 중간에 초라한 visitor center가 있었는데, 나이 드신 할머니와 젊은 아주머니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Cairns까지 올라간다고 했더니 중요한 지도와 관광책자를 잔뜩 주셨다. 누사해변이 어떠냐고 했더니 좋기는 한데 모든 것이 비싸다고 한다. 그러면서 Mooloolaba가 좋으니까 그쪽으로 가란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상책. 이곳 사람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비싼 곳에서 돈쓰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무일의 체질에 맞는 사람들이다.
Mooloolaba의 해변은 관광지의 전형이었다. 급히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우리 생애에서 가장 높은 파도를 온몸으로 받으며 놀 수 있었다. 바닷물도 많이 먹기는 했지만 짜릿한 흥분과 즐거움이 있었다. 잔잔한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이 재미가 있을 것 같은데 이곳의 바다는 유난히 파도가 세다. 그러니 suffer's paradise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높은 파도에서 보드 타고 노는 게 꿈이었는데, board가 없는 것이 큰 아쉬움이다. 하나 사버려?
높다란 아파트들은 관광객들에게 주당 1,200$ 이상을 받아가며 빌려주고 있었다. 특별한 돈벌이가 없는 이곳 사람들의 유일한 돈벌이인 모양이다. 뉴질랜드의 더니든이라는 도시에서는 세든 사람도 크리스마스 연휴나 여름 휴가철이 되면 집을 비워주어야 한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 집을 호텔처럼 빌려 주고 한 여름 장사를 하는 것이 법으로 보장되고 있는 관광 천국의 나라이다. 그렇지만 유럽처럼 물 마실 곳도 제대로 없다거나 화장실 가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어느 곳에서나 물과 샤워와 화장실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하기는 항상 여름인 나라이니 그 정도의 기본 시설은 갖춰져 있다고 보아야겠지.
사흘 만에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바닷가 바위위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다행히 밥이 채 식지 않아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천재는 이곳이 지금까지 식사한 곳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깨끗하지 모기도 없지 바다 바람도 시원하고 이곳저곳이 절묘하게 아름다운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밥을 다 먹고, 천재는 간식으로 또 찬밥을 고추장에 비벼 먹는다. 그리고 후식으로는 재미있게 생긴 그리고 맛도 꽤 괜찮은 토마토를 먹는다. 이렇게 잘 먹으니 우리의 여행이 큰 아픔이 없이 잘 유지되고 있다.
지금은 resort의 front desk 앞에서 컴퓨터 충전을 하며 오늘의 일기를 정리하고 있다. 9시가 가까워 오면서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바깥은 아마도 젊은 아이들이 열심히 뛰놀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토요일 즐거운 주말에 아름다운 해변이 앞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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