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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시지프의 신화_바위를 던져 버려라, 시지프_알베르 까뮈_220720

1. 세상은 왜 부조리한가?

 

까뮈는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까뮈가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자꾸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세상은 부조리할까?

이유 1)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나의 의식이다.

세계와 내가 세상을 만들어 간다. 나는 1이고, 나 아닌 세계는 9조 9,999억개 이상들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나와 세계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왜 나의 의식은 세상을 부조리하다고 보는 것일까? 세계를 부조리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나의 의식이다. 의식은 뇌에서 만들어진다. 뇌는, 감각을 통해서, 나의 생존에 가장 유리한 형태로, 세계를 규정한다. 어떤 것은 과도하게 좋고, 어떤 것은 과도하게 나쁘다. 그러다보니 나의 의식은 착각을 한다. 정지된 영상을 초당 24프레임 이상의 속도로 연속으로 보여주면, 움직이는 영화가 된다. 나의 의식은 착각한다. 착각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 뇌의 의식이다.

 

이유 2) 세계는 나보다 훨씬 부지런해서 나의 의식은 세계를 부조리하게 느낀다.

나는 1이고, 세계는 엄청나게 크다. 세계 속에서 나는 열심히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세계는 나보다 훨씬 부지런하다. 그래서, 세계는 나보다 훨씬 더 잘 생존한다. 내 뇌속의 의식은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불편하다. 세계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내 뇌의 의식의 착각이다. 의식 말고 내 몸은 세계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내 의식만이 착각 때문에 세계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이유 3) 세상의 구성 요소인 내가 있어도 세상은 알아서 움직인다. 나의 기대와 희망과는 상관이 없다.

 

세계는 분명히 나와 함께 존재하고,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세상은 나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나와 공감하는 세계는 언제나 작고, 나 아닌 세상은 여전히 너무나 넓다. 세상은 나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세계의 많은 것들이 나와 공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세상은 나의 생각대로 움직인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만, 특수하게 그렇다. 나머지 대부분의 것들이 나와 공감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아왔고, 그래서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이유 4)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간다고 착각하기에 세상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내가 느끼는 태양빛은 8분 전의 빛이다. 현재의 빛은 따로 동시에 존재한다. 태양보다 100배 먼 곳에 있는 별의 빛을 내가 보고 있다면, 그 빛은 13시간 전이다. 나는 13일 전이나 13년 전의 빛도 볼 수 있다. 별과 태양의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존재한다. 반대로 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생명체가 머나 먼 우주공간에 존재한다면, 그들은 나의 13년 전을 지금 보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나'와 '13년 전의 내'가 우주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면 현재와 미래도 공존한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우주 속에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지 않고 공존하다는 것을, 나의 뇌가 이해하지 못하니, 세상이 부조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2. 세상이 부조리한데도 삶의 의미는 있고, 자살하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있다.

 

살아야 할 이유 1) 세상은 부조리하지 않다. 내 의식의 착각으로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느낄 뿐이다. 그러니 착각 속에서 깨어난다면, 세상은 나의 기대와 희망과는 관계없이 운동하고, 잘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살아야 할 이유 2) 아무 것도 나를 속박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이나 어떤 폭력도 나를 좌지우지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나도 나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내가 원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 된다. 필요하면 돈을 벌고, 여행을 떠나고, 사랑하고, 서로 돕고 살아가면 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내가 선택한 세상에서 내 생각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면 된다. 삶 자체가 자유이며 축복이다.

 

살아야 할 이유 3) 적당한 과제가 관계를 통해 주어진다. 

 

사실 자유롭게 던져지더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기가 어려운데, 인간에게는 적당한 과제들이 언제나 주어진다. 성장하고, 운동하고, 공부하고, 돈벌고, 놀고 등등. 시지프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무의미하고 힘든 과제를 받았지만,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보면, 딸을 찾아주고, 물을 끌어대어 시민들을 먹여 살리는 등 스스로 선택한 많은 일을 해낸다. 모든 과정이 그래서 다 좋다. 

 

살아야 할 이유 4) 힘들 때는 도망쳐서 도움을 청하면 된다. 

 

가족에게 도망쳐도 좋고, 친구에게 도망쳐도 좋다. 아내든 남편이든 자식이든 동네 아저씨든, 정부든 국가든 다 좋다. 힘들면 도망쳐서 도움을 받으면 된다. 도움을 받는 순간에 나는 느낀다. 야, 정말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이렇게 도움을 받다니. 시지프는 언젠가 도망칠 것이다. 이제 바위는 밀만큼 밀었다. 나는 또 내가 할 일을 할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과제와 짐은 벗어던지고 도움을 청해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의식의 착각일 뿐이다. 나는 자유롭기 때문에 언제든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 자신을 가져라. 그러면 인생에는 살 만한 이유가 차고 넘친다.

 

“죽음이라는 유일한 숙명을 제외하고는 기쁨, 행복, 결국 그 모든 것이 자유이다. 인간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을 뿐이다. 인간을 결박했던 것, 그것은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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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시지프의 신화를 읽는다. 이해가 안되서 이리저리 읽으며 이해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까뮈의 시대에, 과학과 종교가 이야기하는 세계는, 명쾌함을 간절히 원하는 인간에게, 확실한 답변이 아니었다.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과학과 종교에 집착하는 인간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럼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계와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달은 키에르케고르는, 만찬을 즐기며 슬퍼하는 삶을 살았다. 죽지 않았다. 자살은 인간의 특권이기는 하지만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리석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열망하는 인간들은 명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곤 자신의 혜안과 자기를 둘러싼 벽에 대한 확실한 인식뿐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침묵하는 세계의 비합리성, 이성과 행복을 향한 인간의 열망”(부조리와 벽 중에서)

 

1960년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까뮈에게는 현재의 과학이 주는 놀라운 깨달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과학 지식에는 허점들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과학의 시대에 산다. 종교처럼 혼란스럽지 않다.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의미없는 삶이라도 죽어서는 안되고, 사랑 때문에 죽어서도 안된다는, 까뮈와 돈 주앙의 생각에 무척이나 공감이 된다. 사랑을 할 수 없는 늙은 몸이 되었을 때, 돈 주앙은 무의미한 삶이라도 당당하게 이어간다. 돈 주앙은 신들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는 사랑,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는 사랑을 했다.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모든 사랑의 순간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지금조차도 후회스럽지 않으며, 담담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다. 수도원으로의 유폐는, 자신이 더 이상 사랑에 빠질 수 없어서 '사랑의 공간인 삶의 공간'에서 '사랑이 필요없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옮긴 것이다. 사랑이 없더라도 삶을 살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그 마음은 세상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감정, 단 하나의 존재, 단 하나의 얼굴, 그러나 모든 것이 고갈되어버린 것이다. 돈 주앙을 움직이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사랑, 그것은 해방하는 사랑이다. (중략)  “육체에  버림받고, 제때에 죽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신과 얼굴을 마주 대고, 삶에 봉사해온 것처럼 신에 봉사하며, 공허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이마저 없다고 알고 있는 무언의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며 종말을 기다리는 가운데 희극을 끝까지 연출하는 인간의 모습, 이보다 더 소름 끼치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 (돈 주앙주의 중에서)“

 

1단계 : 권력을 가진 왕들은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피지 않고, 부자와 귀족들을 위해 정치를 펼치나? 미국과 유럽,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한국과 중국,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며 함부로 죽이고, 빼앗고, 지배하였다. 그들이 가진 사악한 마음과 끔찍한 행동력은, 그들보다 더 강력한 힘에 의해 제지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이 필요하고, 신은 존재해야 한다.

 

2단계 : 신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창조하는 완벽한 신인데, 왜 신이 창조한 세상은 이렇게 부조리한가? 오이디푸스를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하여 딸까지 낳는 비극을 감내해야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부조리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신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신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신이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이것으로 자살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너는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라고 그는 외친다. (중략)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신에 달려 있으며 우리들은 신의 의지에 반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키릴로프에게 있어서도 신을 죽인다는 것은 그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다. " (키릴로프 중에서)

 

완벽한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므로, 인간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없다. 그런데 신이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면, 남은 것은 나와 같은 인간과 뭇생명들이니, 나의 의지와 행위대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신이다.

 

그런데 세상은 내 의지와 행위와는 다르게 이상하게, 부조리하게 존재한다. 내가 신인데도, 내가 무엇을 하는 순간, 세상은 내 의지와 행위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신이어야 하는데, 신이 있다고 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부조리하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세상은 부조리하다. 만일 내가 신이라면, 죽은 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살해야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키릴로프가 신이다. 만약 신이 없다면 키릴로프는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키릴로프는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해야만 한다.”

 

인간이 마주해야 하는 온갖 부조리한 상황에는 신의 개입이 필요한데도 신은 개입해 주지 않았따. 그래서 그런지 자유의지를 가진 시지프는, 신을 배제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았다. 

 

1) 딸을 되찾으려는 아버지의 삶과 깨끗한 물을 원하는 자신의  삶을 하나로 이어주는 삶을 살았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최고의 신 주피터가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2) 제사라는 형식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아내에게 복수하는 대신에 아름다운 세상을 즐기며 살았다. 저승의 신 플루톤의 협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3) 스스로 결정한 삶을 통해, 아름답고 유용했으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삶이 끊임없는 바위 끌어올리기일지라도, 신들이 희망이 없는 무익한 고통을 그에게 선사했지만, 무시했다. 바위와 함께 삶을 살아내었다.

 

돈 주앙과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발견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삶은 부조리하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자살로 끝내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용기있는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삶이 가장 비참해 보이는, 늙은 오이디푸스와 돈 주앙, 바위와의 끝없는 씨름을 하고 있는 시지프에게서까지, 까뮈는 삶의 기쁨을 찾아낸다. "고통과 투쟁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다.

 

인간이 인식과 행동으로 부조리를 느끼는 것이지, 나와 인간과 세계가 부조리한 것은 아니다. 

 

공간 속에 나와 지구와 별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지구와 별들이 공간을 만든다. 내가 느끼는 공간은, 천천히 운동하면 넓게 느껴지고, 빨리 움직이면 작게 느껴진다. 즉 시간과 공간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나에 의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시공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은 나와 지구와 별들이 만드는 것이므로, 별들과 지구와 내가 곧 시공간이다. 

 

까뮈 덕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세계와 생명, 인간과 사회에 대한 편견만 가득하다. 나 이외의 한 생명이라도 설득할 수 있는 진리는, 얻지 못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갈망과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희열, 함께 한다는 즐거움과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고통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아름다운 세계 속을 거닐었던 시지프의 기쁨을, 지구위에 생존하는 기쁨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느낌을, 인간은 누구나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지프스에게 제안한다.

 

바위를 던져버려라, 시지프여.

그리고 또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라.

죽음이 그대를 찾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