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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인간 이재명_220428_el veintiocho de abriel_двадцать восемь апреля

'아직도 위인전을 읽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답한다.

 

1) 어떤 시절에도 위인은 있었다. 그들의 기록 속에서, 그들의 시대와 삶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 전태일 평전, 백범일지, 난중일기, 장준하의 돌베개 등 뛰어난 책들이 많다. 읽지 않아 문제다.

 

2) 사회는 사람들의 집합이고, 사람은 행동과 기억의 덩어리다. 사람의 기억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도 사회도 이해할 수 없다. 

 

인간극장에 나올법한 이야기들로 엮어진 아주 쉬운 이야기책이다. 이재명의 어린 시절 일기장을 토대로 작성한 글이니 더욱 생생한다.

 

세 명의 선생님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 끔찍한 이야기는 믿고싶지 않은 이야기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에 가깝다고 믿는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듣도보도 못했다. 참고서를 무료로 나눠 준 선생님들은 많이 보았다. 영훈중학교 김창묵 선생님이 나에게 두툼한 국어 참고서를 선물해 주셔서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수학여행비를 대신 납부해 준 일죽초등학교의 선생님 이야기도 알고 있다. 사실로 기록해 두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아름답게 만드신 선생님들이다.  

 

"벼 이삭과 보리 이삭줍기도 싫었다. (중략) 식구들이 먹을 양식이 모자라는 줄 뻔히 알면서 벼와 보리를 달라고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이재명은 그냥 선생님에게 얻어터지는 쪽을 선택했다. (중략) 어떻게 팔촌인 친구의 빰을 때리겠어요. 처음에는 마지못해서 서로 살살 때리죠. 하지만 선생님이 몽둥이로 등을 후려치면서 세게 때리라고 다그치면 어쩔 수 없이 서로 조금씩 세게 때리게 되요. (중략) 어느 순간부터는 둘 다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의 뺨을 죽일듯이 후려치는 거예요.... 그건 정말 나빴어요." (17~18쪽)

 

"이재명을 부른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 딸린 밭의 돌을 골라내는 일을 하라고 시켰다. 수학여행을 갈 수 없는 처지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이재명은 그 밭에서 키운 보리를 베는 일도 했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일당 200원을 쳐줬고, 이재명은 그 돈을 모아 수학여행비 1,300원을 마렸했다. 5학년 담임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은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 매점을 학생들이 운영토록 하고 그 수익금이 가난한 학생들에게 돌아가게 했다. 그 덕분에 그해 5학년 학생들은 모두 수학여행을 갈 수 있었다." (30쪽)

 

노동자에 대한 악랄한 착취도 우리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소년공에 대한 착취라니.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한 사장의 사정을 헤아려줘야 할까. 웃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성장이 참으로 놀랍다. 극심한 착취가 사라졌다. 물론 농업부문의 "낮은 농산물 가격"정책이라는 큰 틀의 착취구조는 존재하지만 농업노동자나 농장주들은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는다. 위대한 시민들이 아까운 목숨을 수없이 희생하며 만들어놓은 세상이다.

 

"사장은 3개월이나 월급을 미뤘다. (중략) 이튿날 아침 출근을 했는데 공장 문이 잠겨 있었다. 아뿔싸 사장이 야반도주한 것이다. 그는 석 달 동안 일한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등록도 되어 있지 않은 공장의 사장을 열세 살 소년공이 찾을 방법은 없었다. 취업연령 미달인 그는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 (중략) 소년공들은 야근과 철야를 좋아했다. 이재명도 그랬다. 집에 들고갈 라면 한 봉지가 생기는 데다 일당도 더 주기 때문이었다." (45~9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은, 너무 하찮아서 누구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아직도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불필요한 차별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찾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그런 차별은, 깊은 상처와 좌절을 남길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초등학교에서는 무수히 보이지만, 점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애인들처럼.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깊은 슬픔을 우리는 알려고나 하는 것일까. 퇴직금으로 50억원을 받는 사람이,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들을.

 

"차비가 부족해서 그는 학원에 갈 때는 걸어서 가고 올 때만 버스를 탔다. 학생용 회수권은 쌌지만, 학교에 다니지 않고 학원에 다니는 그와 같은 소년공들은 일반요금을 내야만 했다. (중략) 수원에 있는 경기도 교육청에 가서 검정고시 원서를 내려면 도장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의 도장은 보이지 않고 재영 형과 재선 형의 도장만 있었다. (중략) 도장을 새로 새기려면 천 원이었다.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 다니던 그는 발을 동동 굴렀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꼬깃꼬깃 접어서 감추어두었던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이재명은 차마 어머니의 비상금을 축낼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재영 형의 도장을 연필 칼로 살살 고쳤다." (96~7쪽)

 

지금 당장 행복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처럼, 지금 당장 군부독재는 끝장을 내야 한다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생각했다. 아니, 생각은 그렇지 않았으면서도 그런 것처럼 말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적당하게 싸우면서 힘을 비축하는 것이 훨씬 좋은 전략이었다.

 

"집안 형편이 그러면 데모하면 안 되지 않아 (중략) 학력고사 성적 전국 5천 등 대로 특대 장학생이 된 이영진도 얼마든지 사법고시를 노려볼 수 있었다. (중략) 특대 장학금 받아서 매달 부모님 생활비로 5만 원씩은 보내 (중략) 자기는 사법고시 붙은 다음에 판검사 안 하고 변호사로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으면 내가 안 믿었을 텐데 재명이는 정말 그럴 거라고 믿었어요. " (179~180쪽)

 

당대를 사는 사람들은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민주주의 큰 역사를 쓴 우리 세대들도 눈높이가 달라서 시대의 변화를 깊이 공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끔찍한 세월에서 정말로 많이 빠져나왔다. 용기있는 사람들의 떨리는 행동에 의해 역사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위대한 국민이 이 변화들을 이끄는 정신을 보호하고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이 연수원생 185명의 서명을 받아 <사법부 독립에 관한 우리의 견해>란 성명을 발표한 것은 1988년 7월 1일이었다. 전두환에 이어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전두환이 임명했던 김용철 대법원장의 유임을 추진했다.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37명이 시작한 항의 성명에 전국의 판사 430명이 가세했다. 그러자 노태우는 김용철의 후임으로 정기승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다. 정기승은 전임 김용철 대법원장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중략) 이재명은 안기부 직원이 법원에 상주하며 재판에 개입하는 일에 가장 앞장서온 판사가 대법원장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중략) 봉천동 여관에 문무일과 최원식 등이 다시 모여 (중략, 문병호) 이재명을 비롯한 사법연수원생 185명이 참여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반대투쟁은 대한민국 사상 두 번쨰로 벌어지 법조계의 반독재 투쟁이었다. (정기승의 지명이 철회되었다)" (217~9쪽)

 

(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