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이 없는 상태에서도 원하는 공부를 매일같이 해내지 못하고 있다. 운동도 해야 하고, 집안 일과 명절 준비도 해야 하고, 음악도 휴식도 등등. 돈 버는 일에서 해방된 지 10년이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완전히 자유롭게 무엇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러 가지 꼭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강하게 든다. 인생은 너무 짧고, 하고 싶은 일은 이루기가 어렵다. 심지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잊는다. 매일을 즐겁고 바쁘게 보낸 것만은 분명한데도 말이다.
2부 식량생산의 기원과 문명의 교차로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신석기시대는 농업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농업은 사피엔스를 노동의 구덩이로 몰아넣었지만 잉여 생산물의 축적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유도 만들어 주었다. 식량 생산으로 정주 생활, 가축, 전문가가 나타났다.
"식량 생산은 간접적으로 총기 gun, 병원균 germ, 쇠 steel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선행 조건이었다. (중략) 가축화 작물화된 동식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유라시아에서 제국, 문자, 쇠 무기 등이 제일 먼저 발달했고 다른 대륙에서는 그보다 늦어지거나 끝까지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궁극적 원인이 된다" (119/127쪽)
05. 인류역사가 갈라놓은 유산자와 무산자
아주 반가운 내용이 나온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정말 오래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제대로 조사도 해 보지 않았고, 가끔 검색을 해 보는데도 알 수 없었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정확한 연대 측정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과거의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동식물에 흡수된 탄소가 몸을 구성하는데 쓰인다는 것은 알겠는데, 생명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탄소 14가 붕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똑같은 탄소 14일 텐데 생명체 속에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탄소에 극소량 포함되어 있는 성분이며 생명체에 반드시 존재하는 요소인 방사성 동위원소인 탄소 14가 서서히 붕괴 (중략 / 탄소 14는) 대기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된다. 식물은 대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는데, 그 탄소에서 탄소 14와 다량으로 포함된 동위원소인 탄소 12의 비율은 거의 일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약 1: 1,000,000).
식물의 탄소는 그 식물을 먹은 초식동물의 몸을 형성하고 다시 그 초식동물을 먹은 육식동물의 몸을 형성한다. 그러다가 식물이나 동물이 죽으면 탄소 14가 붕괴되어 탄소 12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약 5,700년마다 그 함유량이 반으로 줄어든다. 약 4만 년이 지난 후에는 탄소 14의 함유량이 매우 적어져서 측정하기 어려워지거나 탄소 14를 함유한 소량의 현대 물질에 오염되어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나온 물질의 연대는 그 물질의 탄소 14와 탄소 12의 비율을 보고 계산할 수 있다." (131~2쪽)
고맙게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각 장의 내용을 마지막에서 잘 정리해 둔다. 인용하기 전에 옥수수와 호박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 감자는 라틴아메리카, 커피는 에티오피아, 밀과 완두콩과 올리브는 메소포타미아, 벼는 중국, 해바라기는 미국 동부, 사탕수수와 바나나는 뉴기니, 참깨와 가지는 인도 등이다. 작물들의 최초 재배시기는 BC 2,500년에서 BC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식량 생산이 독립적으로 발전한 곳은 세계의 몇 지역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각각 시기가 크게 달랐다. 일부 이웃 지역의 수렵 채집민들은 그 같은 핵심 지역으로부터 식량 생산을 배웠고, 기타 이웃 지역의 사람들은 그 핵심 지역의 식량 생산자들로 교체되었으며, 역시 각각의 시기는 크게 달랐다. 마지막으로,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생태학적으로 식량 생산에 적합한 곳인데도 선사시대에 농업을 시작하지도 습득하지도 못했다. 근대에 와서도 바깥세상의 물결에 휩쓸릴 때까지 수렵 채집민의 생활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식량 생산을 일찍 시작한 지역의 민족들은 총기, 병원균, 쇠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도 일찍 출발한 셈이었다." (166~7쪽)
06. 식량 생산민과 수렵 채집민의 경쟁력 차이
사피엔스들은 식량 생산을 목적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식량 생산으로 '진화'하였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네 가지 이유를 드는데,
1) 채집인들의 증가로 먹이가 되는 대형동물의 수가 줄어들었고
2) 홍적세 말기의 빙하기가 끝나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야생 곡물이 풍부하게 자랐으며
3) 야생 곡물을 가꾸고 수확하고 저장하는 여러 기술들이 개발되었으며
4) 인구가 늘고 곡물 생산에 유리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식량 생산자들이 주류를 이루게 진화하였다.
"식량 생산을 도입한 수렵 채집민 집단들은 곧 그렇지 못한 집단들보다 인구가 많아졌던 것이다. 그 결과 식량 생산에 적합한 각 지역에서 사는 수렵 채집민들은 대부분 두 가지 중 한 가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웃의 식량 생산자들에 의해 쫓겨나든지 스스로 식량 생산을 받아들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180~1쪽)
07. 야생 먹거리의 작물화
와플기에 크로아상 생지를 구워 아로니아 잼을 찍어서 먹었다. 믹스 커피를 달지 않게 물을 20% 더 붓고 같이 먹었더니 단맛도 적당해서 좋았다. 2년째 만든 아로니아 잼이 걸작이다. 아로니아 생과를 요구르트와 섞어서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아로니아가 그렇게 혈관에 좋은 열매라면 어떻게든 잘 먹어야 한다. 그래서 믹서기로 갈아서 설탕을 섞어서 잼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미의 생각이었다. 작년에는 믹서기에 간 아로니아를 면포에 내려서 잼을 만들어 올해 맛을 보니 부드럽고 달콤했다. 마치 야생 작물들이 농작물들로 진화하면서 인간을 길들이는 것과 같다.
벼야말로 가장 진화가 완벽하게 일어난 식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모든 곡류와 콩류는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이용해 진화해 온 것이었다. 7장의 이야기를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요약했다.
"인위 선택에 의한 이 농작물 개발의 원리는 바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6쪽)
이 장의 이야기에서 첫 번째 즐거움,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를 먹으며 막연히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작물들이 각 대륙에서 사피엔스들이 최초로 작물화한, 사피엔스를 길들인 야생 작물들의 돌연변이들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즐거움, 식물의 자가 수분은 돌연변이의 결과물로, 인간이라는 동물을 이용해 작물로 진화한 식물들의 자연선택의 결과였다. 식물도 동물처럼 암수 딴몸이거나 서로 다른 꽃과 수정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생식조차 돌연변이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세 번째 즐거움, 주요 식량 생산 지역에서 열량을 담당하는 탄수화물을 보급하는 곡류와 단백질을 공급하는 콩류가 함께 재배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동물은 생명활동을 위해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국의 벼와 메주콩, 메소포타미아의 밀과 완두콩, 아프리카 사헬지대의 수수와 동부콩, 아메리카의 옥수수와 누에콩 등이다.
네 번째 즐거움, 참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는 사피엔스에게 필요한 풍부한 영양이 있었어도 다람쥐와 경쟁해서 사피엔스들이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야생나무를 쫓아다니며 채취하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다.
"고대 수렵 채집민들은 토종 야생식물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고대 농경민들은 작물화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식물이라면 거의 빠짐없이 발견하여 작물화했던 것이다. (중략 / 딸기류와 견과류와 같이) 근대에 들어와서 개발된 농작물들은 밀, 옥수수, 벼 등의 고대 주식에 비하면 그 중요성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203쪽)
08. 작물화하는 데 적합한 식물의 식별과 성패의 원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지중해성 기후는 온난다습한 겨울과 고온 건조한 여름을 특징으로 한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의 고지대는 해발 고도가 5,600미터에 달한다. 한 해 살이 풀이 성장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양한 기온 분포를 가진 지형의 영향으로 식물들은 전 세계 어느 곳의 지중해성 기후 지역들보다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지형과 기후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먼저 많은 수의 식량 작물이 재배될 수 있었다. 이런 식물들의 생태를 과연 11,000년 전의 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을까.
시골에 살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환갑을 넘은 할머니들이 자루 하나를 메고 산을 헤매다 돌아오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산에 가면 금방이라도 뱀에 물릴 것같고, 새끼들을 데리고 있는 멧돼지의 습격이나 최소한 산모기들과 말벌에 쫓겨오지 않을까 늘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참 신기한 일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뉴기니의 동료들과 생태 탐사를 하다가 보급기지로 돌아오지 못해, 야영을 해야 했다. 뉴기니의 친구들이 주변에서 잔뜩 구해 온 버섯 구이를 해 먹으려고 하자, 불안한 그가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굶는 것을 제안했을 때 들은 말이 정말 재미있다.
"당신은 벌써 수십 년 동안 우리에게 수백 가지 나무나 새의 이름을 꼬치꼬치 캐묻고 다녔는데 어떻게 버섯의 이름도 모를 거라며 우리를 모욕할 수 있는가? 독버섯과 안전한 버섯도 구별하지 못할 만큼 멍청한 놈들은 미국인들뿐이다." (225~6쪽)
수렵 채집 생활이 아니라 식량 생산이 이루어지려면 단백질과 열량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식물들이 열 가지 정도는 있어야 하고, 그래도 부족한 단백질의 공급을 위해서 동물도 가축으로 길들여져야 했다. 식량 생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모든 지역의 문제는 사람이나 어느 식물이나 동물의 문제가 아니라, 동식물 모두의 문제였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북아메리카산 사과를 작물화하지 못한 이유가 인디언 때문이었느냐 아니면 사과 때문이었느냐는 질문 (중략)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주어진 야생 동식물 전체의 문제였다. 그 동식물들이 가축화 작물화에 그다지 유망하지 않아서 북아메리카에서는 식량 생산이 늦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243쪽)
09. 선택된 가축화와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개의 식용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려 주었다. 개는 식용으로 가축이 되었다. 귀여운 송아지와 양들처럼 사람의 가족으로서 그리고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우리나라에서 guns germs steel이 그렇게 많이 읽혔다면 개의 정상 사육을 위한 법과 제도,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244쪽)
아메리카와 호주, 남북극 대륙에는 후보 동물도 적었고, 가축으로 길들여진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넓은 유라시아 대륙에는 다양한 식물들 만큼이나 가축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건을 동시에 갖춘 대형 포유류들이 72종이나 되었다. 후보 동물이 51종이나 되었던 사하라 이남의 포유류들은 각자의 이유로 단 한 가지도 가축이 되지 못하고 세렝게티의 초원을 따라 자유롭게 뛰논다.
가축이 되지 못한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사는 데까지 자유롭게 살다가 어느 날 사라져 버린다. 인간의 잔인한 손길이 내려지지 않아서 그들은 행복했다. 이런 측면에서는 식용 가축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게 또한 행운이다. 도시의 개들이 먹히지 않고 버려져서 들개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안타깝지만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제 한국의 산야에서 아프리카를 가지 않고도 가젤 영양처럼 자유롭게 뛰노는 멋진 들개들의 모습을 곧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후보종들을 접할 수 있었던 토착 목축민도, 현대의 유전학자들도, 최소한 4,500년 전에 이미 가축화된 고대 14종 이외의 다른 대형 포유류를 유용한 가축으로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중략)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에 부합된다. 야생 후보종이 가축화 되기 위해서는 많은 특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필수적인 특성들 중에서 단 한 가지만 결여되어도 행복한 결혼을 만들려는 노력이 실패하는 것처럼 가축화의 노력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259~60쪽)
가축과 작물에 대해 막연히 조선시대 정도의 조상들의 지혜에 존경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홍적세 말기의 마지막 빙하기 이후인 BC 13,000년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어 거의 5천 년 이상이 걸려서 작물과 가축이 만들어졌고, 전 세계에 퍼졌다. 한 민족의 농부가 아니라 사피엔스의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10. 대륙의 축으로 돈 역사의 수레바퀴
유라시아 대륙은 야생 동식물을 작물과 가축으로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작물과 가축의 전파 난이도도 유라시아 대륙과 다른 대륙은 차이가 컸다. 마음을 여는 사람들은 어디에고 있기 때문에 자연 환경의 방해만 없다면, 작물과 가축은 만들지는 못해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을 것이라는 게 재레미 다이아몬드의 생각이다. 브로콜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루꼴라와 콜라비 등을 보면 기후가 맞고 입에만 맞는다면 키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농부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취를 하려는 현대의 농부라면 샤인 머스켓의 재배 경쟁에 뛰어들 듯 주저 없이 새로운 작물과 가축에 달려든다. 매일 비슷한 음식들만 먹는 것처럼 지루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식물의 작물화가 단 1회로 그쳤다는 증거가 있으면, 그 농작물은 야생식물로부터 작물화된 후에 그 야생식물이 자생하는 분포 지역 내의 다른 여러 곳으로 신속하게 전파되었으므로 동일한 식물을 독립적으로 다시 작물화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중략) 서남아시아에서는 작물화가 대개 1회로 끝났고 남북아메리카에서는 흔히 여러 번 이루어졌다는 것은 곧 농작물들이 남북아메리카 내부에서보다 서남아시아에서 바깥 지역으로 전파되기가 더 쉬웠다는 증거가 된다." (276쪽)
세로로 긴 축을 가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인도아대륙까지 작물의 빠른 전파가 어려웠다. 기후, 성장조건, 전파의 난이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사막이나 고원, 아주 좁은 땅. 농업의 발전과 함께 수레와 문자를 발명하게 되는데 유라시아 대륙의 13,000km에 달하는 기다란 축이 작물과 가축의 전파에 유리했고,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전파에도 유리했다. 인종의 문제나 작물과 가축의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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