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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전쟁을 피하려는 마음이 없었다_국향전 03_200907 el siete de septiembre el martes_Семь вторник

국향전은, 국가 향연 1차세계대전사를 함께 읽으려고 묶어 놓은 말이다. 

 

"1차세계대전사"를 비롯한 세 권의 책을 빌려다 놓고 세 달이 넘었는데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한 줄 한 줄이 너무 끔찍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구절이다. 총론으로 유럽의 비극을 다루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다시 세 달 전에 읽었던 것을 또 읽는데도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난감하다. 베낄 수 있는 곳까지 베끼고, 끔찍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느끼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이다. 오늘도 비가 내리고, 내일도 비가 내린다면 진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시 농원으로 간다.

 

1. 1차세계대전사 The first world war : 존 키건 지음 / 조행복 옮김 / 청어람미디어

 

그리스와 로마의 터전이었다가 오스만 제국의 변방이자 유럽과의 경계지였고, 2차대전 후 유고슬라비아로 30년 간 평화로웠으나 소련의 분열과 함께 종교와 민족분쟁으로 비극의 시간을 보냈던 발칸반도는 이제 좀 안정을 찾았을까. 여행이 대체로 가능한 나라들이 되었으니 

 

"최악의 피해를 입은 나라는 세르비아로, 전쟁 이전의 인구 500만 명에서 12만 5,000명이 군인으로 전사하거나 사망했고 추가로 65만 명의 민간인이 궁핍이나 질병에 의해 사망하여, 전체 인구의 15%가 사망했다. 비교하자면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사망률은 전체 인구의 2퍼센트에서 3퍼센트 사이였다." (19쪽)

 

이탈리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 세르비아 - 루마니아/불가리아 - 몰도바 - 우크라이나 - 러시아가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발칸반도의 비극이 끝났기를 빈다

 

글 쓰는 방식을 이해 못하는 것인지, 핵심을 잡지 못해서 그러는 것인지, 꼴랑 70쪽을 읽는데 두 달 반이 걸리고 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시간을 내어 보는데도 그렇다. '1장 유럽의 비극'에서 키건은 유럽이 막을 수 있는 전쟁을 막지 못해서 찬란한 19세기의 발전된 문화가 파괴되었고, 2차 대전까지 잉태한 것은 크나 큰 비극이라고 했다. '2장 전쟁계획'에서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불변의 불확실안 전쟁계획들을 수립했고, 무능한 군주들과 민간 정치가들이 군인들의 전쟁 그림을 제어하지 못했다고 했다. 요만큼이라도 정리하고 넘어가야 다음 글들을 읽어낼 수 있겠다.

 

"(군인들은) 국제위기의 해결방법이 아니라 위기가 발생하면 어떻게 군사적 우세를 확보할 것인가를 배웠다. (중략) 1904년 유럽의 모든 군대에는 오랫동안 확립해두었던 군사 계획이 있었는데, 이 계획들의 대체적인 특성은 불가변성이었다.  어떤 군사계획도 오늘날의 이른바 '국가안보정책'으로 통합되지 않았다. (중략) 군사 계획은 가장 엄격한 군사 기밀로 유지되어야 했다. 계획을 수립한 자들만 아는 비밀로 평시에는 정부 내의 민간인 수장들에게도 누설되지 않았(다.   / 중략 / 슐리펜 계획은 Schlieffen Plan) 지난 100년 간 가장 중요한 공식 문서로 입증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 계획으로 전장에서 벌어진 일과 그 계획 떄문에 생겨나고 꺾인 희망의 귀결이 오늘날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슐리펜 계획은 위험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계획이었다. 계획이 달성하고자 했던 신속한 승리가 불확실했으며, 애초에 의도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어떤 상황이 초래될지는 더욱 불확실했다. (중략 / 슐리펜 계획에 따르면) 둘레가 400마일에 달하고 입구는 200마일 정도 벌어진 거대한 원형 집게가 프랑스군을 집어삼킬 것이었다. (중략) 동원 후 42일이면 서부전선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독일군은 자유롭게 기차를 타고 되돌아가 독일을 지나 동부전선에 도달하여 러시아를 궤멸시킬 것이었다.

 

(중략) 슐리펜에게 필요했던 '8개의 새로운 군단'이 결정적인 전투장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실상 더 빠르게, 더 많이 전진해야 했는데 그럴 가망성은 없었다. (중략) 번개같은 승리라는 슐리펜의 계획은 본질적으로 결함을 지녔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계획은 훗날을 위해 보존되었다.

 

(중략) 유럽의 강국들 사이에 상설 협상 수단이 존재했다면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던 전쟁 계획들이 당장에 사용될 수 있는 위험은 사라졌을 것이다. (중략) 1914년 이전에는 기술적 제약으로 즉각적이고 빈번하게 통신할 수 없었지만, 그러한 결여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방법을 찾으려는 마음의 부재였다. (중략) 1914년의 위기에 카이저는 슐리펜 계획의 돌이킬 수 없는 진행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통제해야 했던 기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만 깨닫고 공황에 빠져 종이 한 장이 사건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었다." (46~73쪽)

 

3장 '1914년의 위기'에서 1차대전이 폭발하는 전 과정이 숨막히게 그려진다. 멈출듯 갈듯, 갈듯 멈출듯, 그렇게 비극의 시대로 들어간다. 정리 한 번 해야겠다.

 

한국 정치가 민주주의를 향해 갈듯 멈출듯, 멈출듯 갈듯 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거짓과 거짓에 기반을 둔 선동이다. 민주 열사 박근혜와 최순실이 만들어 놓은 기회의 땅을 잘 다져가야 한다. 배수로도 만들고,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내 놓아야 한다. 거짓에 대한 단호한 대응도 필요하다. 그래야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잘못된 정보, 오해, 오만, 불안 등이 1차대전을 만들었듯이 거짓말, 불신, 그릇된 선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타락시킨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시민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합스부르크제국 군대의 1914년 여름 기동훈련은 보스니아에서 열렸다. (중략 /  페르디난트는 6월 28일에) 처와 함께 주의 수도인 사라예보로 향했다. (중략)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오스만튀르크가 물러난 후 압제자의 역할을 합스부르크제국이 떠맡은 것으로 보였다. 주 행정당국은 페르디난트의 방문이 환영받지 못할 것이며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페르디난트는 경고를 무시했다. (중략) 대공의 부인은 즉사했고, 대공은 10분 후에 사망했다.

 

(중략) 7월 2일에 암살단의 3명이 완전히 자백했다. (중략) 그들은 세르비아 병기고의 무기를 공급받았으며 세르비아 국경수비대의 도움으로 국경을 넘었다. 그 정보는 세르비아의 적의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뿌리 깊은 믿음을 확증하기에 충분했으며, 제국 내에서 질서를 어지럽힌 작은 왕국을 처벌하려는 오스트리아의 강한 욕망을 일깨우기에도 충분했다.

 

(중략) 세르비아인은 소수민족인 동시에 정교회를 믿어 종교적으로도 소수였고, 러시아가 정교를 보호한 까닭에 강한 자만심을 갖게 되었다. (중략) 한 민족에 양보하는 것은 곧 다른 민족들에게도 양보해야 함을 뜻했고, (중략) 제국 정부의 여러 사람들에게 세르비아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중략)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승인을 구하지 않고 즉각 움직였다면, 세르비아는 도덕적으로 고립되었을 뿐아니라 전략적으로도 고립되었음을 깨닫고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략) 황제가 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쟁이 변화를 가져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제국의 안정을 해친다고 판단 (중략) 7월 5일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점심식사를 하면서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전면 지원에 의지할" 수 있다는 점을 황제 프란츠 요제프에게 말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중략)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에 시달렸던 오스트리아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중략 / 헝가리의 수상) 티서는 군사 조치의 이행에 앞서 요구 조건을 담은 문서를 먼저 제시해야 하며 어느 조건도 세르비아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굴욕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중략) 외교문서에는 우선 세르비아 정부가 정부신문의 1면에 제국 영토의 일부 분리를 주장하는 모든 선전을 비난하라 (중략) 암살에 연루된 세르비아 공무원들의 체포와 심문, 처벌에 대한 이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무원들이 세르비아 땅에서 필요한 절차에 참여해야 한다고 요구

 

(중략) 전달시점은 7월 23일 목요일 (중략) 베오그라드에서는 영국 공사는 건강이 나빴고 러시아 공사는 얼마 전에 사망하여 아직 대체되지 않았으며 신경쇠약에 걸린 프랑스 공사의 후임자는 이제 막 도착했다. 그리하여 세르비아 내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서 높은 안목의 외교적 조언을 얻을 기회를 박탈당했다. (중략) 세르비아의 장관들은 파시치(수상)가 부재한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외교문서에 골몰하면서 겁을 집어먹었다.

 

(중략)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경의 서한과 파리에서 보낸 서한이 도착했는데, 둘 다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최대한 많이 수용하라고 조언했다. (중략) 7월 25일 아침, 비록 마지못해 하는 일이었고 이따금 싸워보자는 말도 터져 나왔지만 세르비아는 여전히 항복을 감수하는 상황이었다.

 

(중략) 세르비아 대사는 러시아의 분위기가 세르비아에 지극히 우호적이라는 말을 전했다. 차르는 아직 동원을 선포할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11시에 예비 '전쟁준비태세'를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르비아 내각은 모든 결정을 뒤집었다. 아침에 세르비아 내각은 몇 가지 단서를 달기는 했어도 오스트리아의 열 가지 요구를 전부 수용하기로 합의했었다. 이제 내각은 (중략) 오스트리아 관료가 세르비아 영토에서 암살을 조사하는 데 참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조항을 단호히 거부했다.

 

(중략 / 26, 27일)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결정적이거나 호전적인 것이 아니라 반성적이고 기대를 품은 이야기였다. (중략) 영국 외무부는 자체적으로 수집한 정보에 입각하여 러시아가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중재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희망적인 상황을 감지했다. (중략) 그러한 바람의 약점은 이론적인 전쟁 계획이 일단 시작되면 어떻게 작동할지를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몰랐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중략) 모든 위기에서 시간은 해결책을 구하는 데 꼭 필요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요소다. 시간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일시 중단하자는 협정을 맺는 것이다. (중략) 빈의 베르히톨트는 그레이의 회담 제안을 알았을 때 그날로 독일 대사에게 "모든 중재 시도를 무산시키기 위해 내일, 늦어도 그 다음날에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할 작정 (중략) 7월 28일 화요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중략) 베르히톨트는 세르비아와 묵은 원한을 푸는 동안 외교적 활동이 다른 나라들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지연시키기를 원했다. (중략) 러시아 장군들에게 최악의 상황이란 오스트리아를 세르비아에서 전쟁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려는 자신들의 준비태세에 독일이 자극받아 총동원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중략) 부분동원의 명령과 더불어 총동원 명령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략 / 7월 29일) 차르를 알현하여 부분동원은 물론 총동원 명령서에도 서명을 받아냈다.

 

(중략)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전쟁 계획은 오스트리아가 다른 곳에서 더 큰 전쟁을 수행할 가능성을 배제했다. 세르비아 군대는 비록 작았지만 이미 입증된 전투력 (중략) 불의의 일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국의 준비태세를 살폈다. (중략) 7월 29일 오후, 카이저는 사촌인 차르에게 영어로 전보를 보내 "발생할 수 있는 난제를 원만히 수습하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중략) 카이저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분쟁에서 구경꾼으로 남음으로써 유럽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에 끌어들이지 않는 것은 실로 가능하다"라고 얘기했으며 또다시 자신을 중재자로 표현하며 끝을 맺었다. (중략) 결국 부분동원의 명령만 내려졌다.

 

(중략 / 독일 참모총장 몰트케는) 러시아의 동원에 강력하게 맞서라. (중략 / 오스트리아의 베르히톨트는) 나는 독일이 손을 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책임 있는 군부로부터 최고로 안심이 되는 견해를 전달받았다. (중략 / 사조노프는) 적대국이 지중해와 더 넓은 세계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흑해 출구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중략) 차르는 결정을 내렸다.

 

(중략) 전쟁 조치를 전부 중단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동원이 뒤따를 것이다. (중략) 34일 전에 사라예보 암살사건으로 시작된 위기는 7월 31일 오후에 중대한 시점에 이르렀다. (중략) 오스트리아는 단순히 (비록 단독으로 행동할 용기가 없었지만) 세르비아를 처벌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독일은 외교적 승리를 거두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가 유럽인들의 눈에 더욱 강하게 남기를 바랐다. (중략) 위기를 전쟁과 평화의 양자택일 문제로 만든 것은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고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최후통첩을 보낸 7월 31일의 사건이었다.

 

(중략) 독일이 동원하면 양국도 동원만 할 수 있었다. 독일이 전쟁을 선포해도 군사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조약은 발효되지 않을 것이었다. (중략 / 8월 2일) 프랑스는 도발하는 듯한 인상을 피하기 위해 독일이 동원을 선언할 때까지 동원 선포를 늦추려 했다. (중략) 독일 대사는 사조노프에게 전쟁 선포를 통고했다. (중략) 독일은 이번에는 벨기에에 프랑스에 대한 작전에서 그 영토를 이용해야겠다고 요구하고 만일 거절할 경우 적으로 취급하겠다고 위협 (중략) 영국 내각이 마침내 벨기에에 대한 최후통첩은 전쟁의 이유라는 결정  (중략) 그리하여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자정을기해 독일과 전쟁에 돌입했다.

 

(중략) 최초 위기의 원인 제공자인 세르비아는 잊혔다. 전쟁은 이후 14개월이 지나는 동안 그 작은 왕국에 찾아오지 않았다."  (76~105쪽)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