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홈페이지에서 책을 검색하고 예약을 한 다음에 다음 날 도서관에 가면, 사서들이 책을 찾아서 비닐끈으로 묶어 둔다. 대출자가 가서 도서관 카드와 이름과 전화번호를 대면 미리 준비해 둔 쪽지와 대조를 하고 맞으면 대출을 해 준다. 코로나 시대의 도서 대출 서비스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 두 권의 책을 빌려왔다.
1. 과학이란 무엇인가? : 리처드 파인만 강연 / 정무광 정재승 옮김 / 승산(2008)
강연이라는데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한 강연인지가 나오지 않는다. 역자 후기를 먼저 읽어 보기로 했다. 혹시 나올까 해서. 역자들은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일반인들이 소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부분이다. 주장과 소신이다. 주장과 소신은 둘 다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과학자들은 진리를 알고 있고, 시민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규칙 혹은 법칙은 이 시대에 주어진 관찰에 부합되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추측'인 것이다. (중략)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식이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이 정말로 옳은지 '의심'을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자세야말로 우리가 진실을 향해 조금씩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파인만은 자연을 이해하는 데 큰 성공을 가져온 이런 태도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제안인 것이다. (중략) 우리는 과학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며, 과학자들도 일반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들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170~3쪽)
철학과 과학의 공통점은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진리로 향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철학은 그렇다 치더라도 과학은 현재까지의 진리를 밝혀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고.
"과학자나 기업이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라고 판단해야 할까? 과학은 100% 확실한 '불변의 진리'의 집합체일까? (중략)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과학에 대해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이라 답하겠다. (중략) 과학이 발전할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은 커지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종교'로 대표되는 '우리들의 가치관'에 달려있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라고 했던 아인슈타인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73~4쪽)
나왔다. 기부를 받아 개최한 교양 강좌다. 역시 기부가 중요하다.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을 높이면, 그 세금보다 조금 더 돈이 나가더라도 기부를 해서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는 기부의 전 단계인 세금 높이기에 실패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세금을 인상하는 방법은 없을까. 상위 20%의 고소득자들의 세금을 인상하여 마련된 재원으로 전 국민에게 기본 소득을 매월 지불하면 어떨까.
"시애틀 소재 워싱턴 대학교에서 주최한 '존 댄스 강연' 시리즈의 일부로서 1963년 봄에 이뤄졌다. 존 댄스 씨는 그 지역의 영화관 수익의 일부를 워싱턴 대학교에 기부하면서 매년 강연회가 열릴 수 있도록 후원해 왔으며 이 전통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략) 음악이나 미술처럼, 과학을 문화로서 즐기는 시대가 언제쯤 올까?" (178~9쪽)
2. 모든 것을 바꾼 사람 : 바실 메이헌 Basil Mahon 지음 / 김요한 옮김 / 지식의 숲(2008)
1861년 러시아 짜르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해방(러시아 시민의 40%를 차지)을 통해 러시아의 산업혁명에 불을 당긴다.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은 이때 맥스웰 방정식을 발표한다. 맥스웰의 도깨비, 편광, 컬러 사진, 자동 제어 시스템, 원심분리기 등등.
불과 14살의 나이에 핀과 끈으로 원과 타원 이외의 기하학의 명제를 만들어 낸 맥스웰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전공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이유는, 과학자는 19세기 중반에도 아직까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산업혁명이 청나라나 조선, 인도가 아닌 영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이유가 뭔지 매우 궁금했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1637년)과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년)가 서양의 근대 과학시대를 열었기에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과학자'라는 단어는 아직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물리학자와 화학자는 스스로를 '자연철학자 natural philosophers'라 불렀고, 생물학자는 스스로를 '자연사학자 natural historians'라 불렀다. 과학적 작업을 한 많은 사람들은 독립적인 재력을 지닌 젠틀맨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뽑으라면 과학이 그저 취미일 뿐인 종교인이나 의사, 변호사, 사업가가 있었다.
(중략) 과학은 흥미로운 것으로 여겨졌지만 특별히 쓸모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산업과 교통 분야에서 급격한 발전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대부분 공식적인 과학적 배경이 거의 없는 실무 기술자가 거둔 성과였다. 바다에서 경도를 알아내는 문제는 수학 지식을 갖춘 천문학자가 아니라 존 해리슨과 그의 해상시계가 해결했다." (42~3쪽)
책의 설명이 부족했는지 14살 아이가 핀과 끈으로 이루었다는 기하학의 명제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과사전을 찾아봐야 할 모양이다. 백과사전과 동영상을 뒤져 봤지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궁금증을 스스로 풀어야 할 모양이다. 그런데, 친구에게 묻고 머리 속으로 대충 생각만 할 뿐이지 핀과 끈과 연필을 동원하지 않으려 한다. 무엇 때문인가. 시간 낭비. 실패. 다른 일. 이 모든 것들이 섞여서 궁금증을 던져 버린다.
맥스웰(1831~1879)은 18살까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수학이나 자연철학 강의는 너무 쉬워서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나로서는 대학에서 배운 어떤 것들도 쉽게 받아들인 것이 없다), 논리학과 철학은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선생과 제자가 서로를 키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환상이겠다. 나 스스로도 어떤 질문을 던져 본 적도 없고, 교수들도 제자들에게 뭔가 질문을 하려는 생각이나 있었을까. 나로서는 정운영 교수는 뭔가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는 기억이 난다.
사실 또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이 마치 문창살처럼 조금씩 제대로 된 틀을 만들어 가고 있는 모양이다. 귀납 원리와 실험으로 진리를 발견해 가야 한다는 상식 학파의 생각에 과학자의 상상력이 결합되면서 과학은 진보하였다.현재 시점은 1850년이다. 조선은 세도정치가 극성을 이루어 조선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살던 조선의 백성들과 지식인들은 끔찍했을 것이다. 추구할 것은 없고 오로지 희망없는 생존을 이어가야 했으니 말이다. 부패한 관료와 무능한 지도자는 얼른 얼른 정리해야 하는데, 그 작업 또한 어려우니 삶은 참 고단하다.
맥스웰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 비록 어린 시절에 외우기와 폭력만을 앞세운 교육자로부터 받은 상처가 깊었지만 말이다.
"자신의 해괴한 질문에 꿈쩍도 않고 척척 답하는 한 사람을 만난 셈이었고, 때때로 돌아오는 답변이 한층 더 깊이 있는 질문의 형태로 자신에 전달될 때는 더욱 행복감을 느꼈다. 나중에 맥스웰이 자신의 작업에서 도움을 얻는 심오한 철학적 접근법이 이 해밀턴의 수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바 없다. (중략 / 이 철학적 접근법의 배경에는)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란 이가 있었다.
(중략) 수학을 제외하고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부분이 실은 그저 어림짐작이라는 것이었다. (중략 / 상식학파는 common sense' school) 세계가 존재하는지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었다. (중략 / 그래도) 과학적 진보로 가는 길은 실험 결과와 (중략) 귀납적 원리의 엄격한 해석이 단순히 한데 어우러져 생성된 결과라는 것이다." (48쪽)
제대로 답하지 못한 1983년도의 정치학 원론 문제. 한국 정치의 문제는 무엇인가. 1) 사실과 주장의 혼재로 거짓이 힘을 발휘하는 정치, 언론, 사법, 문화, 소비생활 2) 공동체에 대한 헌신 보다는 자신과 그 주변만을 위한 이기주의 행태 3) 대안과 관용이 죽어버린 토론 문화 등등으로 답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어쩌면 교수들은 제대로 된 과제를 냈었고, 나만 홀로 대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대학 생활 내내 행복하지 못하고 두려웠다.
맥스웰에게 던져진 이런 과제도 참 근사하다.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학 시험 문제로 이런게 나온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겸손해질까. 물질의 특성은 무엇일까. 물질의 특성은 끊임없는 상태 변화다. 물질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영속한다. 신처럼. 아니다, 신은 빼야 한다. 과학과 이성의 영역에서 신은 언급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물질의 특성에 관해 기술하라는 해밀턴의 과제에 대해 제임스는 이렇게 적어냈다.
이제 감각으로 직접 인지할 수 있는 단 하나는 바로 힘이다. 빛, 열, 전기, 소리, 그리고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이 힘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49~50쪽)
조금씩 조금씩 맥스웰에 대해 알아 가기는 하지만, 칸트가 사물은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는 명제에서부터 계속 삐꺽거리기 시작한다. 알지 못하는 영역의 문제들이 계속 쌓인다. 핀과 끈의 기하 문제처럼 말이다. 왠만큼 읽었으니(달랑 3쪽) 그려볼까.
맥스웰의 이야기 중에서 '물질은 감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50쪽)'는 말이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다. 세계를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하면 정신 활동을 제외한 모든 것이 물질이고, 물질은 오감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일단 쉬운 추정은, 우리가 오감으로 인식하는 물질의 모습과 특징은 정확한 실체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기, 빛의 흡수와 반사, 물질 내부의 양자들의 움직임 등등이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어야 물질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더 나올 수 있으니 이 정도로 하고.
맥스웰의 저작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모든 과학저작은 오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여지 없이 깨부순다. 과학자들은 오류를 범하고, 맥스웰도 마찬가지였다. 그 오류가 이론을 뒤집을만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증명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는데 어떻게 결과가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말이 안된다. 이 부분 역시 더 살펴야 할 모양이다.
"맥스웰은 대수학적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 그의 성향을 전혀 줄이려고 하질 않아서 몇몇 실수가 그의 논문 속에 들어가 있다. 논문 속 개념 역시 매우 미묘하고 독자적이어서 학자들은 여전히 맥스웰이 정확히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두고서 논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스웰은 최고 수준의 출판물을 남겨놓았고, 그의 업적에서 여전히 오늘날의 물리학자와 공학도가 사용하는 많은 표준 텍스트를 끌어올 수 있다." (52쪽)
중간중간에 많은 생각과 의문들이 떠오르고, 맥스웰이 행한 실험들이 무엇인지도 매우 궁금했다. 그렇지만 넘어가야 한다. 계란형 타원처럼 금방 그려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4월부터 11월까지 농사일을 도우라며 대학문을 닫았다는 스코틀랜드의 분위기도 재미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만만한 시절이 아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이고, 산업혁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윌슨 교수의 도덕철학 강의에서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제임스에게 이 강의는 모호한 생각은 그릇된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해줄 뿐이었다. (54쪽) (중략 /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길 때) 그는 이미 모든 주제에 걸쳐 광범위한 양의 지식을 쌓았다. 그의 독서량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평생토록 읽을 분량을 훨씬 앞질렀다. 그는 노련한 실험자에다 벌써 세 편의 수학 논문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어떠한 압력에 의해 작업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의 곳간에는 어마어마한 지적 능력이 채워져 있었다."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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