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는 처음 읽는 것이지만 중국인이야기를 또 읽을 필요가 있을까. 다 외워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을 때까지 읽고 싶다. 천재들은 한 번 들으면 절대로 잊어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 게다가 기억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필요한 곳에서 이 기억된 이야기가 툭툭 튀어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컴퓨터와 같은 검색 능력이 필요한 데 나는 그것 역시 되지 않는다. 그러니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중국인이야기 2권을 다시 읽으려 했는데, 전자책 7권이 출간된 모양이다. 검색에서 7권이 잡혀서 바로 마음을 바꾸고 7권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차를 봤더닌 장징궈의 이야기가 나온다. 별도로 장징궈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서 읽어도 좋겠지만, 일단은 이야기꾼 김명호를 통해 장징궈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물론 천재와의 대화를 통해서 김명호의 이야기도 일부 사실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흡인력이나 진실성으로 보자면 김명호를 따를 만한 학자 또는 사실 수집가, 이야기꾼이 있을까 싶다. 그가 만난 문화 노인들의 구수한 이야기 솜씨를 느끼고 싶다. 그래서 장징궈에 대한 깊은 관심은 김명호로부터 충분히 충전하고 싶다.
1. 토지 1부 2권 :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 북스(전자책)
말의 문제는 언제나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비겁하지 않으면서 너그럽게 침묵할 줄 알고, 누구도 다치지 않게 즐겁게 말하자고 수백 번을 되뇌이지만, 자제심 보다 빠른 입이 또는 키보드가 항상 사고를 친다. 두어 번 더 생각하고 검토해 봐도 되는 데 말이다. 아래의 속담도 기억해 둘 만하다. 여기서 '가리'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 사전을 찾아봤는데, 맞는 뜻이 없고, '갈의 : 갈포로 만든 옷'이 속담에 부합한다. 결국 거친 옷을 자꾸 두들겨서 부드럽게 만든다는 뜻일 것이다.
"가리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지는 벱이니께." (2권 17%)
2권에서도 이야기는 천천히 진행되지만 긴장감이 지속된다. 이야기꾼으로서의 박경리의 재능이 충분하게 살아있다. 경상도 사투리의 알아들을 듯 못 알아들을 듯한 문장들도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내가 50대 초반까지 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숨 가쁜 호흡으로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파멸이 누군가에게 가해졌던 작은 감정의 파문에서 시작된다는 복선을 직접 드러내는데,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즐겁게 이야기해야 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된다. 몰락한 역관 조준구의 마음속에 항상 존재했던 악마가 어떻게 드러날까. 말만 할수록 거칠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 즉 "희노애락애오욕"도 방치할수록 거칠어진다.
"죄를 지었다면 모를까 사람을 보고 피해가는 것은 오물(汚物)을 보고 피해 가는 것처럼 그 이상의 모욕이 없다. 그도 엇비슷한 경우도 아닌 상사람 신분으로서 노골적인 멸시를 퍼부었으니 (중략) 벌레 같은 놈들! 네놈들이 세상을 삐뚜룸하게 보면 어쩔 테냐?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썩어 없어질 놈들이.’ 조준구는 마음을 돌이켰다. 그러나 한조에 대한 이때의 미움은 후일 잔인한 보복을 낳게 되리라는 것은 조준구 자신도 예측치 못하였다. (중략) “삐뚜룸하게 세상을 보는구먼.” “하긴…… 삐뚜룸하게 세상을 보는 게 어디 그놈뿐이겠소.” 문벌을 내세워 도도하게 굴지만 너 자신도 세상을 삐뚜룸하게 보는 사람(아니냐)" (2권 13~14%)
삶의 고통은 자연법칙과 천륜을 거스른다. 이것을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많은 민초들이 그러한 삶들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행히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그악스러운 상황이 해마다 개선되어 왔다. 사랑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가 극심한 삶의 고통 속에 던져져 있다면 적극 손을 내밀어 도와야 한다. 개인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기에 세금과 기부금 납부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같이 좀 살자, 이런 분들과. 나도, 우리 중 누군가도 이분처럼 일하는 삶이 고통스러워 사랑이 짐이 될 수 있다.
"자식이고 뭐고 다 귀찮다. 울든지 말든지 배애지가 불렀이믄 처자빠져 자라! 젖꼭지만 물리고 있이믄 일은 지리산 중놈이 해줄 것가!” (2권 14%)
한국인의 이야기 구조에서 흔히 나타나는, 출생의 비밀. 박경리의 토지에서 그런 것이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는데, 토지 이야기의 핵심이 출생의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지저분하게 등장하지 않고, 매우 은밀하면서도 진실하고,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그렇게 등장한다. 김개주와 마님 윤씨, 최치수와 환이, 별당아씨와 구천의 구도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베일이 벗겨지는 것이, 긴장의 끈이 살아 있으면서도 뭔지 모르게 아름답다.
"치수를 가까이하지 못한 것은 물론 죄의식 때문이나 그보다 젖꼭지 한 번 물리지 않고 버린 자식에 대한 연민 탓이기도 했었다. (중략) 나를 용서하시오. 살아주어서 고맙소. (중략) 부인의 아들이 헌연 장부가 되었소. (중략) 그 말을 내 입으로 전해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왔소. (중략) 기여 아무 말씀 안 하시는군. 그 도도한 양반의 피에 경의를 표하고" ( 2권 19%)
2. 중국인이야기 7 : 김명호 지음 / 한길사(전자책)
국공내전이 한창인 1948년 상하이에는 장제스의 기둥 두 명이 있었다. 장징궈는 1937년에 소 두 마리를 사던 100위안을 1947년에는 성냥 3갑 밖에 살 수 없는 상황을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제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 즉, 관료 상인 경찰 등등의 부패문제라고 정의했다. 1948년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구권, 외환, 황금 등을 신권과 교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경제경찰을 지휘해 저항하는 이들을 총살해 버린다. 중국 민중들이 환호한다.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도시다. 경제관제의 성패는 전국의 성패와 연관이 있다. 상하이의 상인들은 상도덕을 망각한 지 오래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첫째가 돈이다. 둘째 셋째도 모두 돈이다. 남이 애써 만든 물건을 제 것으로 둔갑시키고, 탐관오리와 결탁하는 재주에 정부는 흔들리고 민심은 동요한다." (7권 94% / 상하이 민생경제 탐방에 대한 결론을 적은 장징궈의 일기 중에서)
300만 위안=1원, 물가 동결, 신고자 포상금 30%, 경제범죄자 총살 등 살벌한 조치가 짚신을 신은 장제스의 아들에 의해 시행된다. 때려잡아야 할 것은 호랑이 즉, 부패한 대자본가다. 결론이야 뻔하다. 중국 대륙을 중공에게 내어주고 타이완으로 물러나야 했다. 너무 늦었거나 그런 식으로 호랑이들을 때려 잡기에는 중국 대륙이 너무 넓었다. 타이완은 가능했고, 21세기까지 여러 가지 문제는 있지만 타이완은 살 만한 나라가 되어있다. 자유. 그것이 부족한 것은, 레닌 시대에 공부를 시작해서 스탈린 시대의 하방으로 끝난 장징궈의 미진한 사회주의 공부와 경험 때문이 아닐까. 겨우 12년.
장징궈의 상하이에서의 실패는 본인이 책임질 사항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택하고, 친구에게 버림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하이 시민들에게 실패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하고 타이완으로 떠나야 했다. 장징궈의 부패와의 전쟁 1라운드는 76일 만에 이렇게 패배했다. 부패와의 전쟁 제2라운드를 벌인 타이완에서 한 달에 많게는 천여 명, 적게는 300여 명을 간첩죄 등으로 처형하면서 '최후의 독재'를 실시했다.
48년 11월에 장징궈는 상해를 떠났고, 49년 5월에 중공이 상하이를 접수했다. 역사의 흐름을 장징궈가 바꿔내지 못했다. 부패와의 전쟁은 가혹하고 끔찍했지만 참고할 만하다. 인간에게 재산보다 소중한 것은 생명 밖에 없다. 그러니 생명을 빼앗거나 생명을 담보로 협상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두웨성은 그것을 보여 주었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의) 큰조카 쿵링칸은 상하이의 거상이었다. 비밀결사 청방의 수령 두웨성과도 끈끈한 사이였다. (중략 / 장징궈의 전쟁으로 두웨성은 아들과 자신을 살리기 위해)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불법 물자를 숨겨놓은 기업 명단이 적혀 있었다. 쿵링칸이 경영하는 양쯔 공사의 비행이 가장 상세했다. (중략 / 우궈전은) 장징궈는 권력 업고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경멸한다. (중략) 억울한 자본가가 속출한다. (중략 / 개혁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장징궈는) 사심 없이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며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중략 / 장제스가 내린 결론) 역사상 진정으로 공명무사한 공직자는 단 한 놈도 없었다. 그게 인간세상이다.
(중략 / 장징궈는) 효를 다한 후에 국가에 충성하겠다. 쿵링칸을 석방해라. (중략 / 발끈한 자이빈은) 너는 내 희망이었다. 국민당은 부패했다.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새로운 길을 찾겠다. (중략) 자이빈은 중공에 투항했다." (7권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