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읽었다고 leer 하는데, 나는 읽지 않은 yo no Leo '장미의 이름'을 읽는다 leo. 전자책이라 대출기간이 짧다. 잠을 자면서 듣기도 했는데, 집중이 되지 않아서 자장가처럼 들린다. 눈으로 읽으면서 들은 것을 떠올리는 재미도 있다. 움베르토 에코를 Umberto Eco 소개하는 글부터 참으로 요란하다. 1932년에 태어나 9개 국어를 하는 천재이며 아퀴나스 철학에서부터 현대의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지식을 쌓은 석학이라고 한다. '장미의 이름'에 대한 소개는 더욱 거창하다. 아마도 번역자 이윤기가 썼을 것같은데, 이렇게 어려우면 읽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다 읽어내면 정말로 이런 지식을 내가 다 이해하는 것일까. 에코가 위대해서 어려운 이론들을 쉽게 풀어내어 준 것일까. 만 권의 책이 집약된 결정체라고. 다 읽지 못했지만, 일단 과하다. 다 읽은 다음에 판단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당대의 유명론 논쟁에, 에코 자신의 해박한 인류학적 지식과 현대의 기호학 이론이 무르녹아 있는 생생한 지적 보고이며, 이는 고전 문학 입문서로서 가히 만 권의 책이 집약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서문부터 소설인 모양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하나 정리해 두고 가야겠다. 에코가 만들어낸 화자인 나는, 1) 멜크 수도원의 아드소가 14세기에 쓰고 2) 마비용이 17세기에 편집하고 3) 발레가 19세기에 불역한 것을 4) 내가 1986년에 발견해서 이태리어로 번였했다. 화자인 나는 너무 감동을 받아 멜크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원본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으며, 조사를 해 보니 관련 자료들도 책의 내용에서 인용한 것과는 다르다. 나는, 발견한 책을 위서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 멀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고서점에서 내가 우연히 발견한 책에서 아드소의 기록과 일치하는 내용들이 똑같이 언급된 것을 보고, 이 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출판을 1980년 결심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마음의 양식이 될 이 책에 대한 애정 뿐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이 복잡한 연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왜 나오는 것일까. 그곳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완전히 다른 식민지 아닌가. 그곳에는 축구와 에바 페론, 체게바라 말고 어떤 지성의 흐름이 있을리 없다. 오히려 수많은 나찌주의자들과 전체주의자들의 피난처였다. 그곳에서 발견된 책은, 어쩌면 손 대지 않은 순수한 무엇이 담겨 있을까. 아르헨티나로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먼 훗날을 전체주의자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깊은 사랑과 청빈과 근면한 정신을 실천한 사람들일 수 있을까. 이 소설의 배경은 1320년대다. 그러면 남미는 아직 원주민들의 문화가 살아 숨쉬던 곳이다. 약 백 년 후까지 유지된, 주류에서 배제된 진실한 믿음의 기록이 이곳까지 흘러왔다는 이야기다. 내 추측이다.
책 un livro 읽기를 통한 공부와 글쓰기가 세상에서 el mundo 제일 재미있고 돈이 들지 않는 활동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만큼의 돈을 가져야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서 항상 고민하고 있는데, 적어도 놀이만큼은 이런 돈 안드는 놀이가 없다. 도서관과 읽지 못한 책들이 널려 있다. 이런 즐거움을 알면 자본주의 사회를 훨씬 풍요롭고 즐겁게 살 수 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15세기 quince 독일 신학자 켐피스의 말을 푸코가 서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인용.
전자책의 글자크기와 줄간격을 읽기 편하게 조정했더니 쪽수가 나타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진리란 무엇일까. 자연법칙이 진리일까. 사랑, 세계의 운동원리,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음양의 원리, 상대성 원리, 블랙홀과 빅뱅, 양자역학.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 진리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참된 사실과 원리 모두를 말한다.
그런데 그 진리가 어째서 '동거울'에 비친 것처럼 희미하다고 했을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장자의 나비 때문이라면 차라리 나은데, 거짓을 참이라 강권하며 자신과 세상을 속이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는 희미하다는 것을 이제 알겠는데, 허물을 통해서 진리의 일부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진리를 숨기고 속이려는 행위를 허물이라고 하고, 그 허물이 감추려고 했던 것이 명명백백히 드러나고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허물은 모든 진리를 감추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또한 진리의 어떤 부분을 허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악마도 신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이고, 악마의 행위로부터 진리를 발견해 내야 한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이 볼 수 있을 뿐이다(아, 이 또한 알아보기가 얼마나 어렵더냐?) - 프롤로그 중 사도 바울이 쓴 편지의 인용문 중에서
사람들은 꼭 해야 만 하는 '어떤 일' 때문에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에 굶주린다. 나는 농사일을 해야 해서 '다빈치처럼 노는 일'에 열중할 수 없다. 윌리엄 수도사는 '성직자의 의무' 때문에 '좋아하던 공부에 굶주려 있다'. 사람들은 '대를 이어 편히 먹고 살며 노예를 부리기 위해' '돈 버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 사람들도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있다. 그렇다.
14세기 말 한반도에는 왜구들이 침입하여 온 국토가 왜놈들의 무사라고 불리우는 불량배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유럽도 또한 그러했는가. 프랑스의 황제는 탐욕스러운 교황을 아비뇽에 유폐시켰다. 이때 로마를 재건하려고 노력한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황제였던가. 진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언제나 나오는 그 소리, 세상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는 소리.
"이제 젊은이들은 더 이상 공부하려 하지 않아 배움은 사양길에 들었다. 뿐인가? 세상이 거꾸로 걷는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여 시궁창에다 처넣고, 새들은 날지도 못하는 처지에 둥지를 떠나며 (중략) 마리아는 더 이상 명상의 생활을 사랑하지 않고" (프롤로그, 상권 8%)
추측해내지 못하면 뒤에서도 결코 쉽게 설명해 주지 않을 그런 문장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알듯 모를듯한 이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묘하게도 희열이 느껴진다. 말장난의 희열인지 오만의 기쁨인지 염화시중의 미소인지. 하여튼 그렇다. 혹시 코카잎이나 담배잎을 씹으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인가.
"나는 언젠가, 그게 도대체 무슨 풀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사부님은 웃으면서, 참 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맛보게 해달라고 조르는 나에게 사부님은,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이로운 풀이라고 해서 베네딕트 수련사에게 반드시 이로울 리는 없다고 대답했다." (프롤로그, 상권 9%)
박학다식과 온갖 학문의 집합체이며, 만 권의 책을 집대성한 소설이라고 하니 이렇게 읽게 된다. 책을 덮은 후에는 '재미있었네'라는 느낌말고는 단 하나의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고 잊혀지겠지만 먼 훗날 블로그를 다시 뒤지게 된다면 '아, 맞아. 이런 부분이 있었지' 하며 되새김질의 기쁨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하느님 앞에서 아무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글자 그대로 무심하게 화단을 걸을 때도 있었다. (중략) 나는 그에게,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사부님은, 우주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양한 가운데에도 통일된 하나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일된 가운데에서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프롤로그, 상권 9%)
만능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쁜 일이다. 아픈 누군가를 낳게 하고, 배고픈 아이를 배불리 먹이고, 외로운 그대에게 사랑을 선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리를 왜곡하는 자에게 최후의 일격을 맞게 하시는 것도 신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것들 말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포용의 신이 존재한다면 더욱 멋진 일이다. 나는 자유롭되 죄 짓고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하실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인간의 눈과 머리를 기쁘게 할 온갖 멋진 일들이 신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인간의 기쁨을 만끽하며 짧은 생을 길게 파우스트처럼 이제 그만이어도 좋을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포용의 신, 만능신이 그립다.
"하느님의 의중에 벌써 옛날부터 이런 기계에 대한 생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하느님 뜻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어디어디까지가 하느님 뜻이라고 우리가 울타리를 쳐서는 안되기 떄문이다." (프롤로그, 상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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