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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전쟁은 불필요한 비극이다_국향전 01_200624 el veinticuatro de junio_el miércoles_среда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각각 250분이 되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운전과 자전거 타기가 쉽기는 하지만 안전이 걸린 일이라 대충 할 수도 없다. 그럴 경우에 가장 좋은 일은 아마도 음악 듣기일 것이다. 그것에 지치면 그다음에 재미있는 이야기 듣기다. 배칠수 전영미의 백반토론으로 시작해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김용옥의 철학 강의까지 듣게 되었다. 세월은 벌써 8년이나 흘렀다. 뭐 새로운 것은 없을까. 실비아의 스페인어 강좌도 듣고, 구슬쌤의 영어강좌도 들었다. 그리고 중간에 강유원 박사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서 강의한 동영상을 듣게 되었다. 재미있었다. 내용이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즐거웠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고 집중도 되지 않았다. 읽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강의만 재미있게 듣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강유원의 강의들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팟캐스트에서 책을 소개하는 것과 인문학강의를 찾아들었다. 거기에서 '향연'과 '제1차세계대전사'를 만나게 되었다. 즐겁게 강연만 들었으면 될 것을 괜히 그가 소개한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끓어올랐다. '향연'은 이미 수년 전에 한 번 읽었는데, 별 것도 아닌 것이 이해하기만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고 다 읽은 것으로 만족했다. 간간이 재미도 있었다. 극작가 지망생이었던 플라톤이 마치 대본을 쓰는 방식으로 써서, 가벼운 도입 - 대화 - 사건 - 복선 - 반전 - 결말 등등의 것들을 잘 버무려서 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다면 역시 불필요한 책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향연 전체를 설명을 해 주고 직접 읽어보라고 하니 또 설득이 되고 말았다. 그래, 속는 셈치고 읽어보자. 읽다가 재미없으면 그때 가서 걷어 치워도 된다. 이번에는 아예 세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어보자. '국가'와 '향연'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사'. 대여기간은 7월 14일에 끝난다. 세 권을 다 읽어내지 못할 것이니 되는 데까지 읽어보자.

 

1. 향연 ( 향연 - 서해클래식 020 에로스의 모든 것에 대한 고찰 / 플라톤 지음 / 김영범 옮김 / 서해문집 )

 

강유원의 이야기 중에서 제일 처음 다가왔던 것이,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당시 유행했던 비극의 구조를 따랐다는 것이다. 철학책이면서도 연극 대본처럼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배경도 있고, 클라이맥스도 있다. '변명'을 비롯한 세 개의 플라톤 저작을 읽으면서도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은 이런 방식의 잘 짜인 대화다. 공감하는 듯 반대하며 설득하는 모습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극작가 지망생이었다. 재능도 걸출했다. 그는 비극 경연대회에 참가하려고 디오니소스 극장 앞을 지나다가 마침 연설을 하고 있던 소크라테스와 마주친다. 그리고 극장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듣고는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 버린 후 철학을 택했다."  (4쪽, 플라톤의 생애와 철학 중에서)

 

고등학교 도덕 시간에 꼭 외워야 했던 베이컨의 네 가지 우상.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그런 줄만 알고 지금까지 40여 년을 살아왔는데, 동굴의 우상의 시작은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였다. 개념의 차이는 있겠지만 베이컨이 '개인의 편견'을 그렇게 표현했다면 플라톤은 더욱 크게 말했다. 의심하는 자신의 정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들을 의심한 데카르트의 성찰도 떠오른다. 

 

"감각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확립된 상식의 세계란 인식론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나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하다." (10쪽, 플라톤의 생애와 철학 중에서)

 

그만 본문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꼭 기억해 두고 싶은 이야기가 나온다. 행복이라는 것이 즐거운 순간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읽는 순간 느낀 기쁨을 간직해 두었다가 자주 꺼내 읽으며 행복하고 싶다. 돈과 노력이 별로 들지 않는 이런 것들로 인간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해가 맑은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이런 즐거운 글을 읽는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하지 만은 않다. 그래서 날 좋은 날에는 들에 나가 땀을 흘리거나 자전거를 타고 음성이나 삼성을 다녀와야 하고, 오늘처럼 장맛비가 내리는 오후에는 읽고 써야 한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생각한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은 논리적 역설을 통해 논리의 세계와 경험의 세계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중략) 감각을 통해 경험한 사실을 실재의 사실로 받아들여 화살이 왜 나는지 설명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허망한 노력이었기에, 이제 다시금 묻는다. 눈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논리를 믿을 것인가? (중략) 여기서 플라톤은 정신적 아버지 파르메니데스를 살해한다. (중략) 플라톤의 형상(이데아)들은 경험 세계의 다양성이나 복잡성과 일정한 상응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11~2쪽, 플라톤의 생애와 철학 중에서)

 

어쩌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은 도입 단계일 것이다. 가볍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꼭 에로스에 대해서 깊게 알 필요가 있을까. 몸과 영혼에 대한 사랑이며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는 감정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향연' 대화편의 화자는 아폴로도로스다. 그가 아리스토데모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입부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폴로도로스는 친구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그의 심사를 긁는다. 다행히 좋은 친구였던지(아니면 극작가 플라톤이 그렇게 설정을 한 것인지) 이런 비난을 듣고도 여전히 '향연'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다. 사실과 꾸며낸 이야기를 구분할 수가 없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 내용들, 플라톤이 전하고 싶은 내용들만이 사실이고, 나머지는 플라톤이라는 작가의 상상이라고 생각하며 읽어야겠다. 그러면 좀 덜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폴로도로스의 이야기인지, 플라톤의 이야기인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면 그들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인지. 이 이야기에서 재물 대신에 권력이나 명예 등 인간의 모든 욕망의 대상들을 대입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실패자가 된다. 소크라테스를 제외하고는.

 

"자네와 같은 부유한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지루해지지. 더군다나 자네는 자네의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하찮기 때문에 나는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불쌍하게 여긴다네. 어쩌면 자네는 나를 실패자로 여기겠지. 자네가 옳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나는 자네들을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네. 사실로서 알고 있는 것이지." (22쪽)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깨어남을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사형을 당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몸이 어디서부터 죽어가는지를 중계하면서 의연했다. 죽는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던 예수와는 다른 결의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겸손한 사람이었을까. 재판정에서 벌금을 낼 수 없고 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소크라테스. 그런 자부심의 바탕에는 델피의 신탁이 있었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리석은 자신을 증명하려는 진지하고 겸손한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플라톤은 스무 살 때부터 10년 동안 소크라테스와 함께 했으니 그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강유원은 이 부분이 아름다운 사람 아가톤과 지혜로운 사람 소크라테스의 신경전이라고 하는데, 나는 액면 그대로 읽으려고 한다.

 

"자네 옆에 있는 걸 무척 소중하게 여길 것이네. 자네가 가진 놀라운 지혜로 나를 채울 수 있을 테니까. 나의 지혜는 보잘것없고 마치 꿈처럼 불확실하지만 자네의 지혜는 밝고 빛이 나서 발전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 (27쪽)

 

2. 제1차세계대전사 : 존 키건 지음 / 조행복 옮김 / 청어람미디어 

 

정리가 너무 길면 나중에 찾아 읽을 때 지루해서 끊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읽다 보니 진도가 여기까지 나갔다. 다행히 '국가'는 시작부터 복잡해서 한 번 더 봐야겠다. John Keegan의 시작이 강렬하다.

 

"1차 세계대전은 비극적이고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신중함이나 공동의 선의가 제 목소리를 냈더라면 최초의 무력충돌에 앞선 5주간의 위기 동안 어느 때에라도 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던 사건들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했고, 첫 번째 충돌의 결과로 1,000만 명의 목숨이 사라졌고 (중략) 너무나 강렬한 정치적 원한과 종족 간의 증오를 남겨 (중략 / 1차 대전을 제외하면) 2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대한 어떤 설명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극적이었다." (14쪽 / 1. 유럽의 비극 중에서)

 

키건이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특별히 피식민세계 사람들의 아픔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는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어떤 사이코패스가 가정에서는 온화한 아버지로 행동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쇄 살인사건들을 저지르고 제 자신의 가정도 파괴했다고 하는 말이 성립할까. 아니다. 애초부터 그는 온화한 아버지일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스스로 사악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악해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나마 유럽이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것은 정의롭게 살아보려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이 터졌을 때, 드디어 지긋지긋한 농사일에서 해방되었다고 환호하던 유럽의 순진한(?) 농부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정말로 밝은 미래를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20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죽었다고 해서 끔찍하다면, 식민지 조선과 식민지 인도와 식민지 필리핀과 식민지 중국과 식민지 아프리카 대륙 전체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상태의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얼마나 끔찍하게 착취되고 살해되었는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냥 '제국주의적'인 관계였다고 뭉갤 수 없다. 유럽과 미국과 일본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서 야만 그 자체였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 아직도 야만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 글쎄요, 과연 그들이 세계평화를 생각하고 있을까? 제국주의가 지은 죄를 전체주의에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데, 그들에게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유대인에게는 수십 년 동안 사죄하고 보상하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 그들을 믿을 수 있을까? 절대 믿을 수 없다. 사건이 벌어지면 숨겨진 발톱이 드러날 것이다. 믿되 아무도 믿지말고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 강력한 국방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체계적인 주민 추방이나 의도적인 굶기기, 재산 몰수, 학살, 잔학 행위가 없었다) 기묘하게도 문명화된 전쟁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문명을, 유럽의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계몽된 문명을 훼손하여 영구히 악화시켰고, 이를 통해 세계문명에도 해를 입혔다. 전쟁 이전의 유럽은 대륙 너머 대부분의 세계와 맺은 관계에서는 제국주의적이었지만, 입헌정치와 법치, 대의정부의 원리를 존중했다. 전후 유럽은 그러한 원리에 대한 신념을 빠르게 포기했다. (중략) 전쟁이 끝나고 15년이 지나지 않아, 전체주의가 거의 도처에서 발흥했다." (21쪽)

 

오늘의 마지막 즐거움으로 자본주의에서의 도덕이 무엇인가를, 노먼 에인절 Norman Angell이 1912년 런던은행가협회에서 행한 강연으로 마무리해야겠다. 시작은 이렇게 창대하지만 곧 읽기에 지칠 것이다. 장마가 중요 변수다.

 

"한 나라의 이익과 지불능력은 다른 많은 나라의 이익과 지불능력에 묶여 있다는 사실, 상호간에 마땅히 의무를 이행하리라는 신뢰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은 도덕이란 결국 자기희생이 아니라 사리에 밝은 자기이익 위에 서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