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쾌청하여 따뜻하리라 믿고 9시 반에 일을 하러 나섰다. 바람이 차서 코끝이 시리다. 얇은 버프가 소용없다. 옷을 두 개씩 겹쳐 입었는데도 따뜻한 느낌이 없다. 그래도 나선 일이니 되돌아 설 수는 없다. 창고에 가서 톱과 전지가위를 꺼내고 사다리 두 개를 마당으로 옮겨왔다.
일단 엄청나게 자라고 있는 목련. 수세는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좋은데, 10년이 넘도록 모과 한 쪽을 얻지 못했다. 며칠 전에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커다란 모과 열매 다섯 개가 떨어져서 썩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앗, 그러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열매가 달렸었나. 희망을 갖고 가지치기를 해 나갔다. 못하겠다.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죽여야 하는가. 한참을 돌면서 왔다갔다 하다가 결심이 서면 가지 하나를 잘랐다. 나무의 모양도 예쁘게 만들고 열매 달리는 것도 관찰하려면 간섭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이럴 때는 오직 천천히 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 신중하게 하나씩. 예술을 하는데, 예술가의 손길은 따라가지 못하겠다.
작년에 본 어떤 프로그램에서 가지치기를 할 때도 나무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잘라줘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나무들도 그렇게 해 주었다. 모과나무에만 매달릴 수 없어서 꾸지뽕 나무도 손을 대었다. 중앙에 세 가지만 길게 자라도록 놔두고 주변가지들은 키높이로 전부 잘라 버렸다. 열매와 이파리 등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꽃도 예쁘지 않고 해서 사랑을 주지 않았다. 사기당한 소귀나무는 과감하게 밑둥부터 잘라내었다. 16만원이나 주고 산 20개의 묘목이 모두 죽었다. 꽃도 하나 보지 못했다. 사기를 당하고 나서 더욱 겸손해지려고 하는데, 성질만 나고 겸손은 늘어나지 않는다.
매화나무는 일단 꽃봉오리가 클 때까지 놔두었다가 가지를 통째로 잘라서 매화꽃잎차를 마련하기로 했다. 2주 정도 후면 꽃봉오리가 완전히 달릴 것이다. 자귀나무 a silk tree는 태양광 패널에 진액이 날려서 그쪽부위로 커가는 가지를 과감하게 잘라내었다. 한 여름에 매우 예쁜 꽃이 피는 가지라 아까웠지만 충분히 꽃을 구경할 수 있을 정도는 남겨 두었다.
다시 모과나무로 돌아와 두 세 가지를 치다가 팔이 아파서 가지치기한 나무를 싣고 밭으로 갔다. 밭에 간 김에 잡석을 거두는 작업을 30분 정도 했다. 한 가지 작업만 하면 지루하기도 하고 몸에 무리도 간다. 작물이 없는 밭에서 잡석을 거두고 있자니 마치 황금을 줍는 느낌이다. 언덕배기에 가져다 쌓아두는 황금이다. 찬바람이 쎄서 강한 햇볕을 쬐는데도 콧물이 흐른다. 그런데, 예년 보다 콧물이 줄어든 느낌이다. 작두콩 다린 물을 계속 마셔서 효과를 보는 것일까. 아니면 올 겨울이 그리 춥지 않아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모과나무에 대한 가지치기를 완성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서 되도록 많이 잘라냈다. 산수유는 언제나처럼 강하게 많은 꽃을 피워 주어서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꽃이 지고 난 다음에 손 한 번 봐줘야겠다.
어머니 왼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마치고 통닭을 사다가 떡과 함께 저녁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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