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에 관한 책을 읽으면 나오는 것이 G. 마르께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이다.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들고 와서 읽기 시작했다. 재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 소설의 배경이 콜롬비아의 내전이라면 1950년대다. 총과 세균으로 학살당한 인디오들의 가슴 아픈 역사가 역사가 되어 버리고, 1810년 볼리바르에 의해 시작된 독립전쟁으로 나라를 세웠지만 정치 권력의 분열과 미국의 개입으로 내전으로 치닫는다. 그런 역사를 환상 또는 마술과 같은 기법으로 그려낸다고 한다.
물 흐르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르께스의 글은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것처럼 흐른다. 안정효의 번역은 매끄럽다. 지루할듯한 부분들도 긴장감이 흐른다. 시작하는 문장이 매우 독특하다. 섬뜩하면서도 평화로운 궁금증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몇 년이 지나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전 어느 오후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 나섰던 일이 생각났다." (5쪽)
아버지 호세를 따라 어린 대령은 겨울이 아닌 더운 여름에 얼음 구경을 간 것이다. 스페인에게 정복당한 이후에 유럽에서 밀려드는 온갖 과학기술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 기술들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일생을 바친 호세는, 거둔 것은 많지 않았지만 개척 정신과 공동체 정신, 탐구 정신으로 마을의 어른으로 살다 죽었다.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더 화려한 것은 부엔디아(좋은 날) 대령의 이야기다. 자유파 혁명군의 총사령관인데도 그에게는 인도주의 말고는 없었고, 20년이 넘는 세월을 싸우다가 그것마저 사라졌을 때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권력 의지, 돈, 우정, 사랑 등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인도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던 아우렐리아노는 사생아들의 권리까지도 인정하려는 자유파의 입장에 공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무튼 그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이념들을 가지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그것만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106쪽)
참 어려운 소설이다. 사랑이 충족되지 않은 여인 레베카는 밑도 끝도 없이 흙을 집어 먹으며 사는데, 이게 도대체 뭘까.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일까. 위기의 순간마다 반복되는 이 행동은 무엇일까. 아마란타는 친척을 포함한 여러 사내들의 구혼을 받고,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으며 부엔디아 대령의 아이들을 맡아 키우는 행동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200쪽 내내 근친혼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읽기에 불편하다. 아마도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460쪽을 다 읽었는데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다. 긴장은 되지만 감동은 없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가는 마르께스의 능력도 대단하다. 혁명군을 이끌던 부엔디아 대령은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한 자신을 한탄하며 은둔한다. 전쟁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 세계는 인간다운 세계의 밖에 있음을 허무하게 그리고 있다. 살육과 폭력과 독재로 만들어지는 최악의 국면에서만 탈출시켜 놓으면 정치인들이 알아서 굴려간다. 정치 세계에 대해 도덕과 이타심과 명예와 헌신이 살아 숨쉴 것을 기대하고 참여할 필요는 없다. 그런 동네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위인 곽상언 변호사가 충북 옥천 괴산에서 21대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한다. 집안 전체가 이미 정치 세계에 끌려 들어와 있어서 출마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안타깝다. 평화롭게 살 수 있어야 하는데 바람 잦은 나무처럼 흔들린다. 이왕에 흔들리는 상황이라면 흔들리는 속에서 할 일을 해야 하니 정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맞다. 더 이상의 탄압과 비극이 없도록 잘 견뎌내기를 바란다.
부엔디아 가문은 운하를 파는데는 실패하지만 철도를 연결하는 데는 성공함으로써 마술처럼 여겨지던 과학기술문명을 정착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성공의 결과 가문은 번영하지만 미국 자본이 침투하여 대규모 바나나 농장을 경영하며 다시 그들을 착취한다. 부엔디아 가문은 일주일에 하루를 쉬게 해 달라는 노동자 파업에 동참했다가 3천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고 좌절한다. 국제노동기구에서 8시간 노동제를 선언한 것이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9년이니 이 시기 콜롬비아에서의 주 6일 노동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산업혁명의 시대에 인간은 기계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까지도 농업이라고 하는 "밤낮 없는 노동의 시대"가 당연한 문화였기에 노동자라고 해서 별다른 대우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할 수 있는 시간에는 언제나 일하는 농부들이 노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웬이 1817년에 처음으로 8시간 노동 - 8시간 휴식 - 8시간 수면을 제안한 이래로 꼭 백 년만에 8시간 노동이 상식이 되었지만 이것이 현실로 되기 위해서는 다시 50년 이상이 흘러야 했다. 일하지 않는 특권층들은 일하는 사람들의 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일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일만을 하고도 살 수 있는 꿈.
호세 이후 5대에서 끝나버리는 가문이 절멸하는 원인은 근친혼이다. 일부 부족에서 인정하는 근친혼의 윤리문제를 차치하고, 근친혼에 따르는 유전 위험을 강조하는 결말일 수도 있다. 파업 노동자들을 살륙한 역사를 교과서에서 지워 버리면서 부엔디아의 마을은 이미 삶의 활력을 잃어 버렸다. 꿈을 잃어버린 마을에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온 그는 끔찍한 사랑의 결과에 좌절한다. 망상일지라도 꿈을 꾸는 사람과 꿈을 실현하려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있어야 집과 마을이 살아가는 법인데, 모든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사랑도 절제되지 못하고 파멸하고 만다. 사랑이 넘친다고 해서 반드시 삶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이 지루한 소설을 한 번 읽고 나서 무슨 감상을 쓸 수 있겠나 싶다. 두 시간만 집중하면 되는 영화 '기생충'도 한 번으로는 감상을 확정하기에 어려웠다. 언제 다시 한 번 집중해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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