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하늘 красивое небо 끄라시바예 니바. 휴가를 잘 다녀왔으니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데 뜨거운 햇살에 밖을 나가기가 싫다. 고양이들과 잠깐 놀다가 주저 앉아 책을 읽는다.
온갖 종류의 광개토대왕의 탁본을 놓고 설명하는 도올의 정성이 갸륵하다. 그의 말대로 더 깊이 공부해야겠지만 중국어는 배우고 싶어도 한문을 이제 다시 배울 생각이 없어서 도올의 후학들이 열심히 공부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호태왕비는 호태왕 당대의 문헌이라는 의미에서 (중략) 고구려에 관한 어느 문헌보다도 신빙성이 높은 최고의 사료이다. (중략) 호태왕비의 기사내용과 '삼국사기' 광개토왕조의 기사내용은 거의 겹치지 않는다. 억지로 관련은 지을 수 있겠지만 둘 다 편년체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에 일어난 사건이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김부식은 광개토왕이라는 광대한 영역을 개척한 고구려의 중흥조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부족하다. (중략) 고구려의 왕들은 자신을 천자라고 생각했다. (중략) 고구려의 모든 왕들에게 연호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김부식은 그 연호를 다 지워버렸다. 광개토왕조에 영락 연호가 말살되어 있는 것처럼, 여타 왕의 연호도 말살된 것이다." (35~6쪽)
고조선에서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까지의 우리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어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이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에 도올이 고구려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알려준다. 그가 비록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원서를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공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할 것이다. 일제시대와 독재시대, 분단 시대와 동북공정으로 가려진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를 조금 더 많이 알 수 있다면 동북아를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원전 399년에 죽은 소크라테스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그렇게 많은데, 고려 이전의 삼천 년에 관한 기록은 너무 부실하고, 정리된 역사 또한 부실하다는 것은 문화 민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초등학교 때 신화처럼 읽었던 고우영의 만와 '을불'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신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봉상왕은 고구려왕 중에서 보기드물게 기량이 못미치는 인물이며, 그러기 때문에 매우 포악한 정치를 행한 폭군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았고, 주변에 자기보다 더 덕성이 뛰어나고 훌륭한 일을 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으면 시기심을 참지 못해 모함하여 죽였다. 숙부이며 일대 충신인 안국군을 죽였고, 또 자기의 친동생 돌고가 자기에게 반심을 품었다고 무고하게 사형을 내린다. 국인들은 돌고가 훌륭한 인물이며 무죄함을 알기에 돌고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애통해 하였다. 그러자 돌고의 아들인 을불 乙弗은 화가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 궁전에서 도망쳐 나와 들판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중략) 7년이 흘러 세상도 험악하게 흘러갔는데, 재상 창조리는 도저히 봉상왕의 폭정을 국민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심복 조불과 소우를 파견하여 어렵게 어렵게 을불을 찾아낸다. (중략) 창조리는 그들이 모셔온 왕손의 거처를 극비에 붙이고 국왕이 전렵을 행할 때 쿠데타를 거행하여 폐위시킨다. 봉상왕은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두 왕자와 함께 자결한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을불이 미천왕이다.
미천왕은 인생의 고락을 겪으면서 민중의 고통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하여 모든 판단에 그릇됨이 없었다. 그는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길은 우선 대외관계에서 안정을 되찾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여 국제관계에서 수세에만 몰려있던 고구려를 적극공세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게 만들었다.
사마씨가 더러운 집안싸움으로 몰락해 가는 상황에서 고조선 고토회복의 기회를 움켜쥔 것이다. 302년, 직접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공격하고, 311년에는 서안평을 습취하고, 313년에는 낙랑군을 점령, 314년에는 대방군을, 315년에는 현도성(요녕성 무순 지역)을 공파하였다. (중략)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전성시대의 시작이 미천왕대의 토대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136~8쪽)
그리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에 대해서 열변을 토한다. 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인물인 듯하다. 기원전 2,333년의 고조선 단군시대도 아닌데,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은 왜 이렇게 빈약한 것일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다른 나라들에 대한 기록을 유지 보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해도 신라의 기록도 매우 부실하다. 이야기가 별로 없다. 700년의 기록이 역사책 십 여 장에 정리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한민족은 청동기 시대부터 한나라의 돈인 명도전을 썼던 민족이다. 그런 민족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그렇게 게을리했을까. 궁금하다.
"진실로 고구려를 중원의 천자국으로 만든 인물은 제6대 태조대왕이었다. 우선 태조대왕은 그의 재위기간이 햇수로 94년이나 되고 그가 사망했을 때의 나이가 119세가 되므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함부로 추론하여 그의 실존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동명성왕이나 유리명왕의 나이도 그렇게 리얼하게 기술하는 사람들이 태조대왕의 나이를 뻥튀기했을 까닭이 없다. 그렇다고 119세라는 나이가 969년을 산 므두셀라처럼 황당한 것도 아니다.
(중략) 태조대왕이 다스린 1세기 중엽부터 2세기 중엽의 시기는 왕망의 정변을 거치고 새로 수립된 동한의 정권이 매우 불안정한 혼란을 거듭한 시기였다. 태조대왕의 시기는 광무제로부터 시작하여 (중략) 1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광무제로부터 장제에 이르는 60여 년간은 후한의 토대가 확립되는 안정된 시기였으나, 화제에서 질제에 이르는 시기는 외척세력과 환관세력이 국권을 농락하는 시기였다.
(중략, 삼국시대의 막이 오르기 전) 태조대왕이 막강한 무력을 과시하면서 지속적으로 동한을 친다. 동한은 고구려의 공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태조대왕의 목표는 서한시대에 침략당한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고구려의 강역이 광개토대왕 시기에 가장 넓어진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태조대왕이 개척한 고구려의 강역은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강역보다 실제로 더 광대한 지역이었다. 요서는 물론 하북지방, 산동 이하로 양자강 이남의 대륙 동해안 지역(지금의 상해 지역을 포함)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고구려는 지배권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201~3쪽)
압록강 너머에 있는 집안시에 대단한 고구려 고분군이 있다 한다. 학자들의 교류가 불가능한 분단 시대가 하루 빨리 청산되어 단군릉을 비롯한 다양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문화를 연구하고 그 성과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 발견된 고구려 벽화묘는 108좌인데 중국경내에 37좌가 있고, 북한경내에 71좌가 있다. (중략) 중국경내의 37좌 중 2좌가 환인에 있고 35좌가 집안시 경내에 있다. (중략) 그들은 하늘의 자손이라 생각했고, 자기 조상 주몽처럼 사후에는 승천하여 현세와 똑같은 삶을 산다고 믿었다. (중략) 초기벽화는 무덤 주인의 초상이나 연회, 수렵, 유희, 가무, 각저, 전투, 생산, 제사와 같은 현실 생활의 장경을 주로 그렸다.
(중략) 1966년 길림성 문물관리위원회는 운봉수고 측량대를 초청하여 통구교묘군에 대한 실측을 시행하고 편호를 매겼는데 당시 통구고묘군의 총수가 11,257좌로 집계되었다. 통구교묘군은 다음의 5구로 나뉜다.
하해방묘구 51좌
우산하묘구 3,883좌
산성하묘구 1,583좌
만보정묘구 1,516좌
칠성산묘구 1,708좌
마선구묘구 2,516좌
이전복이 1980년 '집안고구려묘연구'에 보고한 것은 11,300여 좌로서, 1966년의 총수보다 조금 더 많다. 하여튼 마선지구에만 2,539좌가 있다고 하니 고구려 무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가 있다." (63 / 167쪽)
염모총이라는 무덤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도 부끄럽다. 내 머리 속에는 광개토대왕이라는 인물 조차도 신화 속의 인물이다. 중원 고구려비가 있어도 믿기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고구려가 지배했던 만주 벌판의 역사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국수주의자들의 이상한 침략주의 근성이나 패배주의에 대한 위로의 차원 등등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을 극복해 주는 것은 역사에 대한 믿음이다.
"염모의 시조는 추모왕(동명성왕)이 북부여를 떠나올 때 그를 같이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온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몽의 건국의 역사가 한 집안의 구체적 사건으로서 생생하게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염모는 또 광개토대왕 치세동안 모용선비의 침공을 물리쳐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했다고 적고 있다. 국가의 운명을 건 일전 끝에 고구령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여 이 공으로 염모일족은 북부여 경영의 중책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중략) 광개토대왕의 치세에 염모는 모두루를 추천한다. 호태왕은 염모를 통해 모두루집안의 내력을 듣는다. 그리고 노객 모두루를 북부여 수사로 임명한다. (중략) 모두루는 대형 염모의 인격을 흠모하며, 그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며, 그 회념과 애도의 절절한 심정을 감정이 흘러넘치는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314~9쪽)
많은 사람들이 여행 삼아 이곳을 다녀 온다고 한다. 동북공정으로 학자들의 교류는 막혀 있고, 문헌 교류도 불가능한 상황이니 안타깝다.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가 고조되어 상호 교류가 활발해지고, 더불어 중국과의 공동 연구의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이 지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다 아는 것 같았던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절반 이상을 모르고 있었다. 분단의 유산이다.
순서없이 책을 읽어 나가니 도올의 집필 의도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다. 고조선에서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는 결코 신화가 아니며 살아있는 역사다. 이제 그 역사를 더 즐기자.
책 표지와 함께 이 사진도 스캔해서 올린다. 고구려가 신화가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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