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빛도서관에 가서 서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읽지 않은 책이 수없이 쌓여 있어서 무엇부터 읽어야 할 지 모르겠다. 관심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리미는 그림에 관한 책을 선택했다. 돌고 돌다가 만화 '송곳' 4, 5권과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그리고 이 책을 가져왔다. 읽다가 재미 없으면 언제나 그만 읽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이슬람교는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발생했지만 그 뿌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다. 공부하기에 충분한 기록들은 있지만, 이스라엘의 무리한 건국, 유전 개발 이익의 유출, 침략에 대한 아랍인들의 저항이 이 지역을 화약고로 만들었다. 국제 뉴스에 의해 얼룩진 이미지에다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 되자 중동의 역사는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저자가 정리해 주는 역사를 따라가 본다. 그리스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최초의 도시국가 문명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3500~2400 B.C)에서 출현한 도시국가였다. 이라크 남부지역에 도시국가가 형성된 것은 인류역사에서 하나의 혁명이었다. 도시국가는 다양한 씨족과 마을 및 소집단을 하나의 사회로 통합시켰으며 문자체계의 발명, 거창한 신화종교의 창조, 거대한 건축물의 건설, 심미적인 조각의 유행 등 새로운 문화와 예술적 성취를 이룩했다.
(중략) 최초의 도시는 몇몇 촌락이 함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신전공동체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중략) 기원전 24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신전도시는 왕권과 제국이라는 새로운 통일적인 체제에 의해 대체되었다.
(중략) 아카드의 사르곤이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다. (중략) 사르곤 왕으로부터 위대한 입법자 함무라비 왕(B.C. 1750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러 제국이 흥망을 거듭 (중략) 수많은 제국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지만 주민들의 교환 - 군인, 관리, 상인, 사제, 학자, 노동자의 이동 - 은 코즈모폴리턴 문화에 영원한 흔적을 남겼고, 공통의 법률, 언어, 문자, 사회적 정체성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중략) 히타이트나 카시트를 비롯한 여러 '야만'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 그리고 이란을 하나의 권역으로 통합했다. 아시리아 제국(911~612 B.C.)은 이라크와 서부 이란 그리고 한때는 이집트까지 포함한 단일국가를 건설했다. 아케메네스 제국(550~331 B.C.) 은 동부 이란까지 병합함으로써 옥수스 강에서부터 나일 강을 거쳐 다르다넬스 해협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중동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파괴하자 중동은 두 개의 제국으로 나누어졌다. 옥수스 강을 경계로 이란 이라크 등의 동쪽 지역은 파르티아 왕조(B.C. 226~A.D. 234)를 거쳐 사산조 페르시아(234~634)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서쪽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계승한 여러 국가의 지배를 거쳐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으로 불리는 후기 로마 제국은 남유럽,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북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일부,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지배했다." (38~42쪽)
경험하기 어려운 이들 나라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들은 인류 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앞선 민족이었지만 지금은 석유를 팔아먹는 게으른 부자가 아니면 백인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테러분자로 비쳐진다. 중동의 여인들과 아이들의 아름다운 미소는 두 개의 이미지와 모두 어울리지 않는다. 여행객을 만나면 친절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도 두 개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또는 이스마일)을 믿음의 시작으로 보는 유사한 종교 이론도 역시 그렇다. 이런 의문들을 해소해야 한다.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공통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갖고 있었다. 셋 다 초월적인 종교였다. 이들은 현세 너머에는 윤리적 행동이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더 높은 세상, 즉 신의 영역이 있다고 믿었다. (중략) 이 세 종교는 하느님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동시에 지금까지 계속 지배했다는 것을 믿는 보편종교였다. 하느님 앞에서 신자들은 각자의 신앙과 윤리에 대해 책임을 진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동일한 종교생활과 구원을 추구하는 형제이다.
(중략) 이슬람이 출현하기 직전 중동은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라고 하는 두 개의 거대한 정치 문화권으로 양분되어 있었으며, 그리스도교와 조로아스터교의 교세는 이들 두 제국의 영역과 그대로 중첩되었다. 심오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동의 이 두 권역은 제국의 조직과 종교적 신조 그리고 종교생활과 공동체생활의 구조 면에서 확실히 비슷했다.
(중략)사산조 페르시아가 영토 내의 다양한 종교에 대해 대체로 관용을 베풀었던 반면 비잔틴 제국은 종교의 통일을 고수하고 분열적인 행동을 하는 교회를 탄압했다. 역으로 종교공동체는 황제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황제의 신민 지배를 도왔다." (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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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유대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와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유일신을 믿는 종교를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계 구도에 대한 명확한 체계를 세우지 못한 채 무함마드가 죽는 바람에 혼란이 시작된다. 정복된 제국은 반란이 일어나고, 지도부는 권력을 차지하려고 싸운다. 반란과 내전의 연속. 그 속에서도 무함마드처럼 예언자이지 못한 칼리프들은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도 끊임없이 정복 전쟁과 포교 활동에 성공한다. 비잔틴 제국과 경계를 맞댄 상태에서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이란,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지역까지 확대된다.
"내란은 무슬림 공동체 내에 영구적인 균열을 초래했다. 이때부터 무슬림은 누가 칼리프직을 차지할 정당한 권리를 가졌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분열되었다. 무아위야가 칼리프직에 오른 것과 그후 칼리프직이 계승된 역사적 과정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무슬림은 순니라고 불린다.
반면에 알리가 유일하게 적법한 칼리프이고 그의 후손만이 칼리프직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슬림은 시아라고 불린다. 시아파가 칼리프의 종교적 역할을 강조하고 (중략, 순니파는) 칼리프의 정치개입에 대해서는 좀 더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한편 하와리즈파는 칼리프가 혈통에 의해 결정될 것이 아니라 무슬림 공동체 전체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며 칼리프는 직분수행에 문제가 없어야만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 세 파벌의 입장 차이가 점차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면서, 순니파 시아파 하와리즈파는 각자 상이한 종교관을 발전시키며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독자적인 종교조직을 형성해 나갔다." (113쪽)
미국인에 의해 쓰여진 책이어서인지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체계는 없어 보인다. 이슬람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애정이 덜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좋은 책이라야 좋은 길잡이가 될텐데 아무래도 잘못 선택한 모양이다. 그래도 이런 내용들은 알아 둘 만하다.
"바그다드는 중국의 외부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중략)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가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부와 인력을 제공했고, 또한 장차 이슬람 문명으로 발전하게 될 문화의 결정을 빚어냈다. 아바스 왕조(750~1258년)의 바그다드 건설은 우마이야 왕조(661~750년)를 붕괴시킨 여러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중략) 아랍인의 신분적 우위를 폐지하고 모든 무슬림의 평등원칙을 인정했다. 또한 아랍인만을 '무장한 민족'으로 보는 구시대의 사고를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무슬림을 포용하여 왕조의 지지자로 만들고자 했다. (중략) 상업활동을 대대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중동의 경제변화와 인구이동을 촉발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기존의 생활을 버리고 바그다드와 같은 신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했고, 신정권은 제국 전역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정치적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28~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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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했다. 모든 철학과도 소통했고, 모든 수행 방식을 받아들였다. 반역하지 않는 한.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글을 읽으면 이슬람이 기독교와 다를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가 일상 생활까지 지배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모습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것으로, 그들에게는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문화다. 그 다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슬람 신학의 두 가지 입장)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을 중시한 결과, 도덕적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와 개인의 책임을 믿었다. 이에 상반되는 입장은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전지전능하고 불가해한 존재이며 코란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 (중략)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유로운 판단과 자유의지가 자율적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조물주의 권능이 표현된 것이라는 논리
(중략) 법학자와 신학자들은 (중략) 믿음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반면 (중략, 신비주의 수피즘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시도이고, (중략) 분열된 자아를 극복하고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며 존재의 완전무결함을 이루려는 노력 (중략) 선한 무슬림에게는 겸손하고 가난한 생활만이 적합하며, 단 하나의 적당한 감정표현은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178~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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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작이 기원전 3500년이라 하는 것은 기록과 유물의 분석에 따른 것이라 짐작한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기원전 2333에 시작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다음을 검색하다가 네이버에 공개된 서거정의 '동국통감(세조때 시작하여 성종 때인 1485년 완성한 편년체 역사서)'에 기록이 있다는 것을 보고 여기에 전재한다.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조선 [檀君朝鮮] (국역 동국통감, 1996. 11.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무함마드(622~632)와 그의 후계자인 칼리프 시대(632~661), 우마이야 왕조(661~750), 초기 아바스 왕조(750~850)에는 베두인 유목민 전사들이 중심이 되어 군사력이 유지되었다. 그들이 정복해서 개척한 이슬람 제국에, 850년을 전후해서 아랍의 병사들을 대신해 투르크 노예들을 이용한 노예병사제도가 도입된다. 투르크족 조차 중동 제국의 지배자가 되자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투르크인, 그리스인, 호라산인, 쿠르드인, 그루지야인 등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노예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주인이 노예를 부르고, 그 노예는 가신이었다가 주인이 되고, 그 주인도 언제가는 누군가의 가신이 되지만, 결국에는 무슬림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중동은 커다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그러면서도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전쟁이 계속된다.
"노예병사의 체계적인 충원, 훈련, 고용은 중동 역사상 획기적인 시도로서 후대의 여러 무슬림 정권도 이 제도를 체택했다. 사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충성스러운 군대가 절실히 필요했던 칼리프들이 주변 지역이나 변경의 주민을 병사로 고용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중략) 새로운 체계의 노예연대는 이제 아바스 왕조 군사조직의 근간이 되었다. (중략) 노예군 제도의 도입은 칼리프조와 백성들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의 아바스 왕조는 백성들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했으나, 후기의 제국은 외국인 부대를 동원하여 자기 백성을 지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중략) 오구즈족은 셀주크 가의 지휘 아래 1025년에 옥수스 강을 건넜다. 1037년에 니샤푸르를 차지했고, 1040년에는 가즈나 왕조를 물리치고 호라산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이것이 셀주크 제국의 시작이었다. (중략) 셀주크 제국의 초대 통치자 투그릴 베그는 술탄이라는 호칭을 체택하여 자신이 유일한 최고 권력자임을 과시했다. 결국 술탄이라는 호칭은 중동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중략, 술탄은) 칼리프의 승인이 정통성 확보에 필수적인 요소 (중략) 이슬람의 제도를 책임지고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 권위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기준이 되었다.
(중략) 노예병사는 일신의 안전과 생계를 주인에게 의지하는 일종의 노예 같은 가신이었다. (중략) 950년부터 1200년까지 아바스 왕조의 통일시대는 막을 내리고 후속 국가들은 하나의 지방 정도의 규모였고 모두 단명했다. (중략) 당시의 정치개념과 정치제도에는 상당한 균일성이 있었다.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유목민 정복자 또는 노예 출신의 군벌에게 넘어갔지만, 대체로 칼리프와 이슬람 원리의 절대적인 우위는 인정되었다." (205~235쪽)
노예군 제도가 정착되면서 갑자기 등장하는 투르크족은 6~8세기 북아시아에 살고 있던 돌궐족과 역사적 언어학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족이다. 한반도의 고려 시대, 만주벌판에 거주하던 거란족과 여진족 보다 더 먼 몽골초원의 북쪽과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이 그들의 영역이었다. 7세기 중반에 당나라에 쫓겨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밀려나고, 재기의 기회를 노리며 세력을 키우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옥수스강을 넘어 이슬람 제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투르크계 종족은 크게 서부 및 동부 집단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서부 집단은 유럽의 투르크계 종족과 터키의 아시아 지역 및 이란 북서부에 거주하는 서아시아의 투르크계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 집단은 옛 소련 땅에 살고 있는 투르크계 종족과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지역에 거주하는 투르크계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략) 돌궐족은 6~8세기경 몽골 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투르크계 민족이다. (중략) 동돌궐은 630년에, 서돌궐은 657년에 각각 당에 멸망" (다음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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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교들의 공통점은 피안의 세계와 최후의 심판이다. 여러 종교들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이 평범한 사실을 알게 되면 절대 진리에 대해 겸손해 질 수 있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열린 마음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미 이런 정리를 한다. 불교는 개인의 수양을 위한 가르침이고, 유교는 나라를 올바로 세우기 위한 지침이다. 모든 종교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이며, 이슬람 제국을 지배하던 술탄이나 그 이전의 칼리프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회질서와 참된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략) 군주의 모든 미덕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는 존재이고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은 장차 도래할 세상에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선정을 펼치기 위해서는 현자와 학자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 (278쪽)
이슬람 세계는 어떻게 해서 종교가 중심이 되었을까가 항상 의문이다. 기독교와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에서는 모든 사람이 종교인인듯 하면서도 개인의 자유의지 즉 세속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해답의 일부를 찾았다. 바로 샤리아(Sharia)다. "통치자란 샤리아를 실행하고 무슬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272쪽)"는 수니파 법리론에 따라 이슬람 사회의 율법인 샤리아 sharia가 이슬람 제국의 핵심 정책 과제였다. 사회의 규범인 법이 이슬람이라고 하는 종교에서 나왔기 때문에, 법을 지키는 것이 종교 행위이고, 종교 행위가 곧 광범위한 사회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교와 생활을 분리할 수 없었다. 이것을 모든 무슬림 지식인들이 이해하고 있었고, 그 관계가 과도하여 일부나마 단절한 것이 터키의 아타튀르크였다. 그래서 자유로운 터키 이슬람 국가가 가능했던 것인데, 터키 조차도 이제 세속주의를 포기하려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이 생활의 자유를 얻지 못하면 결국 종교 원리주의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샤리아 sharia는) 민간의 이슬람학자들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이슬람의 종교 율법으로 (중략) 아랍어에서 흔히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교 같은 중근동의 유일신 계시 종교에 대해 해당 종교와 율법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니, ‘모세의 샤리아’, ‘메시아[즉, 기독교]의 샤리아’ 등의 용례가 그것이다.
이슬람 안에서 샤리아는 주로 코란과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담은 전승]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무슬림의 삶 전체를 규제하는 규범들을 말한다. (중략) 샤리아의 내용은 주로 종교적 실천, 가족관계, 개인의 신분, 계약과 상업 등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질서유지와 형벌 등의 측면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보완이 필요하였다. (중략) 샤리아는 전근대 법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인권과 명예를 존중하고 신분적 차별이 적은 법이었다." (다음백과 중에서)
철학과 신학은 '절대자의 절대 권위'에 대한 생각의 차이 뿐이니, 이슬람 세계에도 당연히 철학이 존재했을 것이다. 코란과 하디스가 절대 우위에 있었지만 철학은 존재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이슬람의 정치철학에도 반영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리스 철학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이미 위대한 철학이 존재했고, 알렉산더의 정복에 의해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전해지기 이전부터, 그리스는 이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우등생이었다. 그들에 의해 종합되고 발전된 인류의 철학은 다시 중동세계로 수용되었다. 끊임없는 교류와 진보다.
"철인정치론은 하느님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지성을 완성하고 행복을 이루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한편 이런 이상이 실현되는 축복받은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구성원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중략,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인 알 파라비는) 독창적인 철인-예언자가 제시한 법에 따라 지배되는 국가이다. 이상국가의 통치자는 예언자가 제시한 법을 이해하고 이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판단력은 물론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창의력과,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현실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279~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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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중동과 아프리카, 인도와 몽골 동남아시아, 발칸 반도, 스페인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이슬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교만이다. 차분하게 여러 가지 책과 강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불교와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과 종교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속에서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 열린 마음으로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풍부해서 좋다. 매우 지루하게 반복되고 비슷하게 나열되는 용어와 설명들이 괴롭기는 하지만 400쪽 가까이 읽어 나가자 머리 속에 조금은 스며드는 기분이다. 스며들기 시작해야 공부가 된다.
"이슬람 사회에서 울라마와 수피는 무슬림 공동체의 교사이고 모범이며 지도자였다. 울라마는 하디스, 법, 신학에 정통한 학자를 지칭했다. 울라마의 기본적인 기능은 교육과 사법행정이었다. (중략) 울라마는 공통적으로 법학파에 조직되어 있었는데, 각 법학파는 학자, 교사, 학생이 함께 모여 만든 일종의 단체였다. (중략) 계급이 높은 울라마는 일반적으로 국가관료였고, 계급이 낮은 등급의 교사는 서민을 상대하는 영적인 카운슬러였다.
(중략) 13세기 이후 이슬람 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사회적 종교적 발전은 수많은 형태의 수피즘이 등장하여 이슬람의 신조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중략)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라고 하는데, 다시 말하면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실재성을 직접 체험하기 위한 영적인 탐구이다. (중략) 수피의 권위는 코란에 대한 지식과 신비로운 성취, 초기의 성자나 예언자 무함마드로부터 영적인 그리고/또는 계보상의 출계를 통해 전승된 선천적 권능에 기초하며, 이런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신성한 혈통 (중략) '실실라' (종교적 축복의 연쇄)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교우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수피의 가계도 일반적으로 칼리프나 무함마드에게까지 연결되었다.
(중략) 유명한 성자의 후손들은 성자의 영적 자질과 혈연관계를 물려받아 이른바 신성한 공동체를 구성했다. (중략) 신성한 공동체보다 더 일반적인 것이 타리카, 즉 수피형제단(교단)이라는 조직이었다. 타리카는 일단의 수피들이 그들보다 앞서 살았던, 같은 스승을 섬기는 제자임을 자처하고 공통된 정신적 규율을 이어나감으로써 형성되었다." ( 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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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가 인간의 생활을 전체주의처럼 지배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유목민 특유의 씨족주의와 부족주의 전통 때문이라는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농경민족인 한민족도 씨족주의 전통은 매우 강하다.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진 성과 본관제도가 우리 세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다종교 국가이고, 종교가 가정생활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슬람 신앙에 대한 강한 믿음이 이슬람 세계를 종교 사회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 여성들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 전통과 죄에 대한 야만스러운 처벌의 전통이 모든 이슬람 세계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공포정치가 그들을 지배한 것일까. 모든 민족과 종교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한 이슬람 세계가 같은 종교를 공유하는 내부에서 더 혹독한 탄압을 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외부인들이나 내가 그들의 종교 생활을 잘못 이해하는 것일까. 2018년 7월 1일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드디어' 여성들이 홀로 스스로 운전을 할 수 있게 허가 되었다고 한다. 사우디 국왕에 의해.
유럽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가톨릭이 온 사회를 지배했던 중세 암흑시대를 거친 유럽인들의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이슬람 사회는 종교 원리주의자들에 의한 반제국주의 독립전쟁이 중동의 현재를 있게 함으로써 개인주의가 확산될 여지가 없었다. 아직도 중동의 비극과 전근대는 끝나지 않았다. 석유와 천연자원이 사라지지 않는 한 대체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 한 이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이슬라엘을 무력으로 지배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신의 나라는 평화롭다.
"새로이 발전한 휴머니즘 문화는 개인의 권리를 사회의 권리보다 훨씬 더 중요시했다. (중략) 르네상스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은 유럽 사회의 다원적 가치와 개인의 지위를 강조하는 유럽의 기본 경향을 강화해왔던 것 같다. (중략) 프로테스탄트 공동체 내에서는 개인이 구원 여부를 알 수도 없고 그것에 관여할 수도 없다는 예정론이 대두하여 시대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과연 누가 죄인이며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중략) 따라서 하느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증거인 부를 올바르게 획득함으로써 불안은 완화될 수 있었다." (38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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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영토를 통일된 체계로 통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랍과 페르시아의 후예들이 끊임없이 중동과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를 지배했지만 끊임없이 분열했다. 게다가 몽골의 침략은 너무 강력해서 그들이 막아낼 수 없었다. 다행이도 몽골족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등 앞선 문명에 동화되어 약 100년간 지배했다. 몽골족이 세운 일한국, 차가타이한국, 킵챠크 한국에 반발한 세력들은 중동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더 강력한 몽골에 밀려났지만 그들은 강력했고, 쇠퇴한 로마제국의 유럽은 이들을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1230년대에 수많은 새로운 이주민이 아나톨리아로 몰려들어 비잔틴 제국의 국경 산악지대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몽골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중략) 오스만이 이끄는 국가가 가장 강력하게 부상했다.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름은 바로 지도자 오스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중략) 1326년에 요충지인 부르사를 점령하고 (중략)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인 공국들을 합병하는 한편 세르비아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오스만의 정복활동은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유럽 각국은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십자군을 일으켰다. (중략, 십자군은 패배했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로마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무슬림의 오랜 야망이 실현되었다.
투르크인 지배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주교와 대주교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다. 교회의 수입과 재산은 몰수되었고, 병원 학교 고아원 수도원 등의 그리스도교 시설도 파괴되거나 방치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 교도들은 지도자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도 박탈당했다. (중략) 고사 직전의 비잔틴 제국과 교회를 대신하여 질서정연한 이슬람 사회가 자리를 잡았다. 셀주크 국가와 투르크인 토후들은 희사를 하고, 궁전 모스크 대학 카라반숙소 병원을 건설하는 한편 페르시아와 아랍의 학자들을 초빙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그리스도 교도들은 그리스도교의 패배를 하느님의 벌 또는 역사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슬람 성자들은 이슬람을 무슬림과 그리스도 교도의 종교적 신조를 결합한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 교도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성지는 물론 예수 숭배도 받아들였다. 비잔틴 왕실과 영주, 행정관들이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오스만의 귀족층에 합류했다. 15세기 말에는 아나톨리아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상태였다." (428~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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