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반에 일을 나갔다. 식빵에 바질 페이스트를 바르고, 계란 부침과 슬라이스 치즈 한 장을 올려 먹었다. 이 메뉴는 여행 다닐 때 메뉴였는데, 이제는 일상의 아침이 되어가고 있다. 믹스 커피 한 잔까지 더 했더니 열량이 충분하다. 어제 밤에 가을용으로 이불을 바꾸었더니 늦게 잠들었어도 포근하게 잘 잤다.
먼저 찰벼논을 작업한다. 논 바닥도 잘 말라가고 있고, 논가의 상태도 메벼논 보다 훨씬 나쁘고, 면적이 작아 일이 빨리 끝나기 때문이다. 쉬운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쥐똥나무 가지치기 작업은 오후로 미뤘다. 어제의 작업으로 어깨가 뻐근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일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다.
풀들은 눈으로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세력으로 논을 덮고 있다. 그러나 막상 작업을 해 나가면 한 두 포기가 사람의 눈을 질리게 할 뿐이다. 가볍게 제압할 수 있다. 어려운 것은 벼의 결실에 방해를 주지 않으면서 제거하는 일이다. 다섯 포기 너머에 있는 풀들은 포기하고, 그 안쪽의 풀들과 논가의 풀들을 작업 목표로 한다. 물달개비도 제거하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이녀석들이 아래쪽에서 벼들을 잡고 있어줘서 벼들이튼튼하게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생장에는 방해를 했기 때문에 물달개비가 번성한 곳에서는 벼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적당하게 자란 곳에서는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벼들을 밑에서 지탱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 지켜 보도록 하자.
"나는 이 연구가 (중략)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과 이른바 '천황제' 비판임을 강조해 왔다. 더 이상 아우라를 발산하지는 않을지라도 여하튼 다시 살아나게 된 천황제에 바탕을 두고 지난 20년간 대두해 온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neo-nationalism)은 나의 연구와 저술의 역사적 환경이 되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다카시 후지타니는 보기에 이상스런 일본의 천황제에 칼날을 들이댄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우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은 절대 존재 또는 신에 기대어 살고 싶어한다. 그들이 위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기대고 싶어서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다. '신체(神體:웃기는구만 정말)'라고 하는 천황이 일본 민족의 자긍심이 되기 위해서는, 제3의 국가에 속하는 시민들이 보기에, 인격이 훌륭하고, 모습이 아름다우며, 품위있게 행동하고, 애민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들어진 신의 아들이나 반신반인은 사람 구실도 못하는 사람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죽 못났으면 사람에 불과한 자신에 대해 잘 알면서도, 신으로 떠받들여지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는가 말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단어는 알고 들어가야겠다.
패전트(pageant) 1. (특히 역사적·전설적·종교적 사건을 다룬 화려한) 야외극 2. 화려한 것3. (미) 미인 콘테스트 4. 구경거리 5. 허식 [다음 사전]
요즘과 같은 시대에 천황과 같은 것을 주제로 하여 글을 쓴다는 것이 우습기 조차 하다. 아흔이 넘은 영국 여왕을 대단한 국가의 상징으로 받들고 있는 영국인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많은 세금을 들여 그들을 칭송하고 보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평화에 기여했을까. 가난한 서민을 위로하고, 그들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주었을까. 세계 평화에 기여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던 다이애나 황태자비 정도가 지뢰 제거 운동에 참여하고 격려함으로써 그나마 사람구실을 했다. 그들은 결국 광대나 배우에 불과하지 않을까. 일본 여행도 가야 하니 한 번 저자의 연구 내용을 따라가 봐야겠다. 도대체 뭐가 있는 것인지.
"당연하게 여겨온 관습 관행이나 상징 의식 제도 중의 일부가 비교적 근래에 '발명'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특이한 일이 아니다. (중략) 영국 왕실이 1870년대 말에서 1914년 사이에 만들어진 제도이며 결코 흠모할 만큼 오래된 전통이 아니라는 것이 지금은 잘 알려져 있다. (중략 / 체임벌린은) 1912년에 '새로운 종교의 발명'이라는 얇지만 탁월한 논문을 출판했다. (중략) 일본의 지배엘리트가 일본 국민과 세계를 상대로 '미카도(천황) 숭배와 일본 숭배'라는 '일본의 새로운 종교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납득시키려 하지만 실은 아주 최근에 발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1 / 발명하기, 망각하기, 기억하기 중에서)
음, 몰랐다. 사자왕 리처드나 성공회를 만든 헨리 8세의 후예 정도는 될 것으로 알았다. 교묘하게 잘 숨겨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관심받지 않으면서 이목을 집중하게 하는 것. 그것이 현혹의 기술이며, 허상을 진실처럼 느끼게 하는 일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사이에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막론하고 일본인 모두가 근대의 천황 숭배와 국가 숭배가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감쪽같이 망각하게 되었을까 (중략) 피에르 부르디외가 '기원의 기억상실(genesis amnesia)' 이라고 명명한 증세를 (중략) 도쿠가와 시대(1600~1868년)까지는 역사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하듯이 일반인은 천황의 존재를 거의 혹은 전혀 몰랐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중략)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본인의 역사와 문화가 천황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생각을 (중략) 일본 헌법도 "천황이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런 정신 나간 헌법을 보았나. 맥아더 작품인가? / 무일)" (23쪽 / '발명하기, 망각하기, 기억하기' 중에서)
다음 백과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역시 맥아더의 작품이었다.
일본의 평화(平和) 헌법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이 남에 따라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의해 일본 제국 헌법은 효력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일본국(日本國)’이라는 국가 이름이 발표되고, 이에 맞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그 이듬해부터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국민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는 조항과 국회 · 내각 · 재판소 등의 국가 조직에 관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헌법과 유사한 점이 있으나, 일왕을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색을 가진다. 하지만 일본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제2장 제9조에 나타나 있다.
요시다쇼인(吉田松陰). 메이지 시대를 연 자들은 누구일까. 제국주의 시대를 가장 먼저 이해하고 이용한 자들. 근대판 노예노동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노예 해방이 아니라 노예 창출에 앞장 선 악마같은 자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기억해야 할 만한 자. 요시다쇼인(吉田松陰). 쇄국정책으로 250년을 지탱해 온 도쿠카와 막부의 에도 시대가 개항 압력으로 흔들리자, 천황(天皇 덴노)을 중심으로 일본 국민이 단결하여 강한 일본을 만들어야 한다. 강한 일본은 강력한 힘으로 외국의 침략을 방어하는 나라가 아니다. 군비를 확장해서 조선을 침략하고(정한론), 중국과 아시아의 식민지를 바탕으로 강한 일본을 만들어,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해야 한다는(대동아공영론) 요설과 억설이다. 개항 협상에 29살에 처형된 그는 사무라이의 기개로 불타는 눈빛으로 주장한다. 황당한 주장에 꿈을 불태운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시대를 연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자들이다. 막강했던 사무라이들이 에도의 평화시대에 할 일을 잃고 낭인으로 떠돌다가 드디어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는다. 전 세계를 약탈해서 일본을 부흥시켜라. 그 약탈의 중심에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신체 천황이 상징으로 드높여진다. 2004년에 요시다가 만든 쇼카숀주쿠(松下村塾 / 요시다가 세운 사설학당)을 기념해 만든 월간지가 창간된다. 월간 쇼카숀주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