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발표된 피의자 박근혜의 담화문은 그야말로 담 너머에서 나몰라라 던진 담화문이었다. 검찰 공소장에 공동 정범으로 명시된 피의자의 고백과 하야를 바랐던 시민들과 정치권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사람이 쉽게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끌려 내려오기 전에 권좌에서 내려오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정치가 시민들에 의해 위임된 권한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그리스 민주정 이래의 2,500년 민주주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왕이나 황제, 독재권력에 의한 우민지배가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상의 자유가 있으니 알아서 할 일이며, 명예롭게 퇴진하느니 비참하게 끌려 내려올 때까지 끝까지 버텨내겠다는 생각도 그들의 자유다.
현 정국을 슬기롭고 평화롭게 풀어내어, 박근혜와 김정은이 손을 잡고 이루어낸 한반도의 긴장과 단절 상황을 해소하고 평화통일로 가는 길이 희미하게나마 열리기를 바랄 뿐이다. 새로운 정권에 의해서. 하나의 사진으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았던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은 당시 분위기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한반도처럼 내전을 치른 것도 아닌데도,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매우 컸었던 모양이다. 동독과 서독의 기본조약(Basic Treaty) 체결과 통일의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흥미진진했다. 69년부터 90년까지 21년 동안 시민들 모두가 참여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인내하며 경청하고 꾸준히 협의하여 만들어 낸 민주주의 실천의 결과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다섯으로 갈라졌다. 일단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 승전국의 분할 군정 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서부의 9개 주는 서독인 '독일연방공화국'으로 1949년 5월에 독립한다. 이에 대항해 소련 점령지였던 동부의 5개 주도 같은 해 10월에 동독인 '독일민주공화국'으로독립했다. 분할 통치는 수도 베를린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소련 점령 지구가 동독에 편입된 반면 서방 3개국의 점령지는 그대로 '서베를린' 이라는 특별 구역으로 남았다.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 회담에서 결정된 대로 옛 독일의 동단부 영토는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을 경계로 하는 선에 따라 독일에서 분리해 소련과 폴란드 영토로 편입되었다.
(중략) 동독이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자 국가 안보의 최대 위협이라고 여긴 콘라트 아데나워의 기민당 정권은 1955년에 '할슈타인 원칙'을 내세우며 동독 배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서독만이 유일한 독일 국가이므로, 동독을 승인한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한다(소련은 유일한 예외였다)는 원칙이었다. 아데나워는 나토 회원국들과의 안보 협력을 더욱 굳건히 하고, 외교.안보.경제에서 전방위적으로 동독을 압박하여 끝내 무너뜨리고 동독 지역을 흡수 통일한다는 방침을 견지했다.
(중략) 빌리 브란트는 수상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동독을 승인(recognize)할 수 없다"는 종전의 원칙을 되풀이하면서도, 그 '실체'를 용인(acknowledge)하고 상호 무력행사 포기와 화해 협력을 추진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천명했다. (중략) 1969년 11월에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다. (중략) 소련의 중재로 1969년 12월 동독의 실권자 울브라이트가 브란트에게 정상회담을 제의한다. (중략) 이렇다 할 결실이 없었다. 소련 및 폴란드와의 관계 정상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중략, 폴란드와의 회담은)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사실상 1민족 2국가를 받아들이며, 소련 및 폴란드령으로 되어 있는 '1937년 당시 독일 영토'회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대폭적인 양보를 전제로 양국은 물론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받아들인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런 신동방정책은 (중략) 그런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로써 분단은 영구불변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 공산 진영의 영향력이 서독으로 넘어 오고 서방세계 전체로 독극물처럼 퍼져나가지 않겠는가?
(중략, 브란트는) "우리는 겸허해져야 한다"는 참회의 정치(politics of regret)를 내세웠다. (중략)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가 나치 시절 학살된 유대인을 추모하는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치는 모습 (중략) 그를 지지하던 상당수의 국민들조차 '국가수반으로서 너무 지나친 굴욕적 행동'이었다고 불쾌해했지만, 이는 다른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실로 그것은 기인으로서는 가벼운 무릎 꿇음이지만, 한 국가로서는 위대한 도약을 예비하는 행동이었다.
(중략, 서독에서는 1972년 4월) 폴란드와의 조약에서 국익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브란트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추진했다. 그 결과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단 2표 차이로 부결된 것이다. (중략, 보수 기민당의) 불신임안이 무산되자 기민당-기사당은 후폭풍에 시달렸고, 11월 총선에서 여당이 약진하여 안정 과반수가 확보되었다. 마침내 1972년 12월, 동독과 서독은 다음과 같은 10개 조의 '기본조약'에 합의했다.
(중략) 전문에서 "민족문제를 비롯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의 여러 다른 견해 중 한쪽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중략) 제8조의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상주 대표부를 교환한다"로 (중략, 뒤이어 다시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브란트는 사임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처럼 여겨졌던 제7조의 내용도 갈수록 진가를 발휘했다. (중략) 서독방송을 동독에서 시청하거나 동독 잡지를 서독에서 구독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중략) 1980년대에는 거의 보통의 이웃나라를 드나들 듯 오가게 되었다. 편지 왕래도 최소한의 검열조차 없이 시행되었다. (중략) 1974년 5월에 본과 동베를린에 양국의 상주 대표부가 설치되어 업무에 들어갔다.
(중략) 1990년에 성취된 통일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이었지만, 냉전 논리대로 동독을 압박하고 위협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신뢰 구축과 상호 의존성 증대의 결과였다. 실로 국가수반이 무릎을 꿇고, 오랜 영토를 포기하고, 국시를 단념하고, 퍼주기 의혹에 시달리면서 꽃피워낸 동방 정책의 나무에 열린 과실이었다." (315~326쪽)
우리라고 못할 것은 없다. 과정을 중시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억압이 없는 자유로운 토론과 협상에 의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히 추진한다면, 한 세대 이후에 한반도에 우리들의 꿈인 평화로운 통일국가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의 뜻에 부응하지 않고, '의회'의 뜻을 따르겠다는 피의자 박근혜의 오판만 없다면 말이다. 현 상황에서는 대통령은 탄핵하고, 그에 의해 임명된 내각은 당연하게 총사퇴해야 하며, 야당이 중심이 되고 비박계 여당 의원들과 시민사회 대표까지 참여해서 결정된 거국내각이 국정운영의 기반을 잡고, 개헌을 통해 새로운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문제의 초점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보면서, 피의자에게 임명장을 받은 어리석은 국무위원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 김현웅 법무장관이 그랬듯이,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 모두는 총사퇴해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그동안 직무유기를 한 죄를 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사죄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남북전쟁으로 인한 깊은 상처와 불신은 과연 극복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시오.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한 고통과 미래의 더 큰 불행을 생각해서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신뢰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과연 이런 답이 현실성이 있을까. 유럽연합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전쟁이든 평화든 모두 지난한 과정이다.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전쟁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펼치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도록 어렵고 험난한 과정일지라도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1991년 12월에 합의되어 이듬해 2월에 체결을 마친 유럽연합조약, 속칭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중략) 유럽연합이 저소득 국가 주민의 이민을 촉진시켜 원래 주민의 문화적 정체성과 노동권이 위협받는 등 이른바 '다문화주의의 피로'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 또한 국민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법률의 상당수가(프랑스의 경우 무려 4분의 3)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아닌 유럽의회에서 결정되면서 유럽연합의 비민주적 성격이 지적되고, '유럽통합이란 정치인과 자본가 등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만을 위한 놀음'이라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중략) '하나로 통일되고 평화와 번영을 골고루 누리는 유럽'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격렬히 싸움을 벌였던 나라들이 이 정도의 통합이라도 이루어낸 것은 놀라운 일이다." (404~410쪽)
거슬러 올라가 30년 전쟁에 대한 서술을 보면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을 수 있다. 누군가 침략 전쟁을 주장한다면,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역사를 모르는 문외한이거나 미치광이다.
"삼십년전쟁은 주로 독일 땅에서 펼쳐졌지만,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참여했고 그 참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토록 무시무시하고 지긋지긋한 전쟁을 겪은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전통을 의심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자 손을 잡았다. 삼십년전쟁의 발단은 1618년, 신성로마 황제의 신교 탄압 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이 라트신 궁전에서 가톨릭 참사위원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린 사건이었다. 하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은 그보다 반세기 전인 1566년에 네덜란드 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들을 습격해 방화와 파괴를 자행한 사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사건으로 '팔십년전쟁'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촉발되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독립을 승인하는 조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 유럽 땅에 피를 뿌렸던 갈등의 일차적 원인은 종교에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불어 닥친 종교개혁의 바람은 유럽인드이 서로를 악마의 종들로 여기고 거리낌 없이 살육을 저지르는 종교전쟁의 시대를 열었다. (중략) 더구나 16세기 초부터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귀금속이 줄어들기 시작한 데다 기후변화(소빙하기의 도래)마저 겹치자, 유럽 전체가 불황과 빈곤의 늪에 빠져 전쟁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배를 채우자는 사고방식이 만연했다. (중략,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동맹, 포르투갈의 독립으로 궁지에 몰린 황제는) 평화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진작부터 황제가 그런 결심을 하길 두 손 모아 빌던 사람들은 독일의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30년 동안 계속되는 전쟁에 끌려나가고, 학살당하고, 약탈당하고, 강간당했다. (중략)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밤낮으로 꿈꾸었던 것은 신의 영광도, 황제의 영광도 아닌 평화! 오직 평화였다." (96~99쪽)
총 64개의 조약을 살펴보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기원전 13세기에 체결된 카데쉬 조약에서 시작해서 오늘날의 이슬람 세계를 만든 후다이비야 조약(628년), 정복자들이 제멋대로 세계를 분할한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년), 세계를 재는 단일 척도를 합의해 낸 미터조약(1875년), 인간생명의 고귀함을 인식시킨 제네바 협약(1864년) 등 많은 조약들이 머리 속을 자극한다. 지금의 세계와 한반도, 그리고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꾸만 생각하게 하는데, 결론은 이것이다. 춤을 추든 사욕을 드러내든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대화에 나서고 지혜를 모아라.
- 조약의 세계사 / 한규진 지음 / 미래의 창
'사는이야기 >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자는 진동하는 끈이다_평행우주 4_161214, 수 (0) | 2016.12.14 |
---|---|
시간이 뭐라고?_우주의 구조 The fabric of the cosmos_161208 (0) | 2016.12.08 |
시워드의 바보짓과 박근혜게이트_조약의 세계사 1 (0) | 2016.11.05 |
이해하거나 믿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_평행우주 3_161027 (0) | 2016.10.26 |
자전은 왜 일어나는가_평행우주 2_161014, 금 (0) | 2016.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