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에서도 상쾌한 기운을 느껴 보고 싶어서 7시에 우주신과 그리미를 깨웠다. 제대로 잠을 못잤다며 몸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혈압을 재 보았더니 148이나 나온다. 흠. 소래산 산책은 포기했다. 덕분에 우주신은 매트리스에 누워서 늦잠을 잔다. 20년이 넘은 신일 선풍기의 바람이 신선한 새벽 공기를 대신해 준다.
한울빛도서관은 시원했고,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로 그득하다. 어제 오후 6시다.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만화서가에서 송곳을 보았다. 볼까 말까. 드라마를 워낙 재미있고 감명깊게 봐서 그런지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주제인데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사람을 끈다. 이래야 한다. 산책을 못하게 되었으니 만화나 보자.
총선 전 정신교육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려는 육사 교육관들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주인공 이수인의 연설은 참 좋았다. 그의 연설에 대해 소심한 박수로 호응하는 생도들의 마음도 잘 표현되어 있고 공감이 간다. 주춤주춤 약하게 박수를 치는 대열에 내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8사단에서 상병 계급장을 달고, 87년 대선투표가 부대내에서 이루어졌을 때, 우리 병사들은 중대장과 선임하사 앞에서 투표를 해야 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고, 병사들의 반발에 부대 전체가 술렁거리며 긴장에 휩싸였었다. 시위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압박속에서도 당당하게 야당 후보자를 찍었던, 동료 병사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나도 그 대열에 있었으니 자랑스럽다. 군기교육대든 감옥이든 보안사의 취조실이든, 모든 것이 두려웠지만, 공포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평생 양지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무엇인지를 조금도 이해할수 없을 것이다. 한심하고 바보스럽고, 심지어 나쁜 일이라고까지 말할 것이다. 어제의 이낙연처럼 범죄자 취급을 할것이다.
불행하게도 용기를 낸 병사들은, 우리 부대말고 그리 많지 않았던지,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다행스러운 것은 소련, 중국과 수교하는 등 노태우의 행보가 대한민국을 평화로운 방향으로 이끌었고, 김영삼의 집권을 통해 문민개혁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관학교에서 위법한 명령은 거부하라고 교육한다고 하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 사관학교에서는 그런 교육을 안 시키는 줄로 오해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대대장은 육사출신 대령이었고, 3소대장도 육사 출신 소위였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다만, 교육받은 대로 따른 결과, 이수인은 사랑하는 군에서 소령 진급을 못하고 옷을 벗어야했다. 뭐 어떠냐, 사람답게 살려는 것이지, 군대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까. 이 그림책을 다시 읽기를 잘했다.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민주주의를 수호한다. 지난 3년간 뼈에 새겨질 만큼 들었던 말입니다. 그리고 1년 후 우리가 장교로서 병사들 앞에 섰을 때 당연히 가르쳐야 할 원칙이기도 합니다. 만에 하나 최정예 장교를 육성하는 사관학교에서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선거에 개입하는 일이 발생했고, 우리가 그것에 눈감는다면 병사들에게 우리는 도대체 어떤 말로 군의 존재 이유를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위법한 명령을 거부하라고 교육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침묵한다면 다음에 위법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 수천, 수만번 외쳤던 우리의 신조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할 때입니다. 동기 생도 여러분! 배운대로 행합시다." (1권 68~9쪽)
직원들을 정리하기 위한 관리자들의 폭정을 묘사하는 장면도 좋았다. 사실 그동안 다녔던 회사들이 이렇게 막 가는 회사들은 아니어서 실제로 저런 일이 벌어질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만, 농촌 현장 곳곳에서 용역회사를 통해 일하러 나오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자행되는 막말들을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상처받는 노동자들은 허구로 꾸민 것이기를 바란다.
"며칠간의 폭정이 계속되자 여유로우면서 능숙한 병장 같던 직원들은 갓 전입한 이등병같은 얼굴이 되었다. 신병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사람 특유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참들의 폭력에는 기강을 잡기 위해서라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과도함이 있었다. 아마도 그 표정. 그러니까 약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혐오감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혐오하는 대상에게는 진심으로 잔인해질 수 있다." (1권 139~140쪽)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매우 공감이 가는 부분. 너무도 유명한 대사도 나온다. 쓰레기차를 모는 기사와 쓰레기를 줍는 사람으로 구성된 2인 1조의 공간에 계급과 차별을 심어놓은 것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시시하고 무기력한, 그래서 억울한 홍씨 아저씨의 추락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대사다.
"비겁하고 무력해 보이는 껍데기를 잡고, 흔들고 압박하면 분명히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같은 인간이" (1권 190~4쪽)
징계위에 회부된 황준철을 걱정하는 이수인에게 구고신 소장이 하는 말. 사실 회사를 그만 다녀야겠다고 생각하고 결행한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좋은 회사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동료들에게서 어떤 가능성도 보지를 못했다. 여전히 약자가 더 약한 자를 괴롭히고, 공돈에 욕심을 부리고, 대수롭지 않은 권력을 가지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보지 않고 있으면 그들은 그들대로 잘 살아간다. 그 정도로 막 나가는 회사가 아니었으니까. 싸워야 할 시시한 강자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회사였으니까. 그래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떠나온 것이다. 회사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 여전히 그냥 인간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앞으로는.
"당신이 지키는 건 황준철이 아니라 인간이오. 착하고 순수한 인간 말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2권 62~3쪽)
노조가 되었든 민주주의가 되었든 정의가 되었든 ,미움과 폭력을 주장하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증오와 폭력으로는 문제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의로워서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상태가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정도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다. 증오와 폭력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니까. 쉽지 않겠지.
"인간이 인간한테 어떻게 이리 독하게 구나 싶죠? 우리 인간 아니오. (중략) 뺏어도 화내지 않고 때려도 반격하지 않으니까. 두렵지 않으니까.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거요!" (2권 180~1쪽)
조합원들을 막아서는 부장을 밀쳤다가 고발된 한영실을 경찰서에 배웅해 주고 온 이수인과 구소장이 대화를 나눈다. 나는 다만 내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도 왜 그렇게 불안하고 미안한지. 삶이 힘겨워서 자살을 한 친구나 후배를 보면 그런 마음이 그냥 든다. 제대로 친구가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
"이수인 : 미안함도요? 내가 누군가의 삶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도요?
구소장 : 그건 지병 같은 거요. 그냥 앓고 사는 거요." (3권 111쪽)
4권 이후부터의 스토리도 궁금한데 누가 빌려갔는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반복한다. 삶의 위로가 되는 주제를. 시시한 인간의 실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날은 다를 것이라 믿었다. 몇시간 전까지 우리는 하나였으니까. 합일의 감격은 무력했고, 짐의 무게와 몸의 고통만이 유의미했다. (중략) 저는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185~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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