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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네_파우스트 2_160718

천재가 노란 형광펜을 칠하면서까지 재미있게 읽었다는 파우스트가 왜 이리 지루한가. 희곡이란 연극 대본이며 문학작품이다. 이야기가 잘 연결되어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계 최고의 문학이라는 작품이 이렇게 밖에는 읽힐 수 없는 것일까. 번역이 문제일까 원전이 별 볼 일 없는 것일까. 나의 무지함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이후로 내 생애 최악의 작품이 아닐런지.


3막에서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헬레나가 스파르타로 돌아온다. 그러나, 남편인 메넬라오스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암시도 없지만 제물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헬레나가 제물이 될 것이라며 시녀장으로 변신한 메피스토펠레스는 헬레나를 파우스트에게 유인한다. 헬레나를 간절히 원하던 파우스트를 위한 사탄의 계략이다.


"포르키아스(시녀장) : 아름다움은 원래 나눌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을 완전히 소유한 사람은 저주스럽게도 누군가와 나누기 보다는 차라리 파괴해 버리지요. (중략) 자신이 한때 소유했던 것을 잃어버린 남자의 가슴속에서 질투심이 날카롭게 할퀴지요." (358쪽)


결국 헬레나는 남편의 심판으로부터 도망쳐 파우스트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카루스처럼 더 크게 빛나는 것을 쫓다가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자 헬레나는 다시 저승으로 돌아간다. 아들 오이포리온이 추구한 것은 고대의 영웅들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명예를 얻고, 약탈을 통해 부와 노예를 획득하는 고대의 영웅들. 때로는 그들이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처럼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일리아드의 영웅들처럼 그저 죽이고 죽인다. 괴테는 아마도 그런 영웅들이 결코 인간이 선망해야 할 모습은 아니라고 본 모양이다. 그래서 아들이 죽어버리는 슬픈 장면을 만들어내지만 그 과정은 간결하고, 파우스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오이포리온(아들) : 너희들은 평화로운 나날을 꿈꾸느냐? 꿈꾸고 싶은 자는 마음껏 꿈꾸어라. 우리의 구호는 전쟁이고 저 멀리 승리의 함성 울려 퍼지는구나. (중략) 이 나라는 자유롭게 무한한 용기를 지닌 자들, 아낌없이 피 흘리며 숱한 위험을 이겨 낸 자들을 낳았도다. 그 억누를 수 없는 거룩한 마음이 모든 전사들에게 이득이 되리라. (중략)


헬레나와 파우스트 :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즐거운 나날을 접하자마자, 그 아찔하게 높은 위에서 고통에 넘치는 곳을 갈망하느냐? (중략) 기쁨에 이어 곧바로 이런 혹독한 고통이 찾아오다니. (중략)


헬레나 : 행복과 아름다움은 오래 화합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안타깝게도 나한테서 사실로 증명되었어요. 생명의 끈도 사랑의 끈도 동강 나고 말았으니 비통할 뿐이에요. 이제 가슴 아프게 작별 인사를 고하며 한 번 더 당신 품에 안기겠어요. 저승의 여신이여, 아들과 저를 받아 주소서!" (386~390쪽)


파도에 대한 묘사는 기억해 둘만하다. 무수히 몰려 오는 파도는 자연의 무수한 존재들처럼 흔하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태어나는 인간이라는 생명들은 살아있는 내내 무언가를 한다. 하지 않는 인간은, 죽거나 죽어가는 인간이다. 티끌처럼 무수한 인간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몰려 다니며 자연계에서 위력을 발휘하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고 괴테는 생각한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보면 가슴이 벅차 오르는 나와는 다르다. 영원이라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그것들은 결국 한줌 재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위대한 인간은, 스스로 이룬 것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행복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떠나는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왠지 공허하다.


"파우스트 : 파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와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위력을 떨치다가 물러나지만,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네." (402쪽)


괴테는 4막에서 무의미하지만 거친 파도를 이겨내고 새로운 땅을 만들고 싶어한다. '드넓은 물의 경계를 바싹 제한하고' 아무에게도 만져지지 않은 간척지를 만들어 그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령한다. 사탄은 파우스트인 괴테의 명령을 스스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와 전쟁과 노예들을 이용한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현명함에 대하여. 사탄의 지적은 올바른 것이다. 책이나 명상이나 토론을 통해 지식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얻은 사람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배우지 못했거나 패배했거나 배우려 하지 않았거나 싸우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권력을 향한 싸움에서는 결코 패배해서는 안된다. 지극히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승리해서 권력을 또는 다른 무엇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소원을 줄여야 한다. 평범한 것을 소원한다면 특별히 큰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싸움을 피하면서 적당한 소원을 이룩할 수 있는 시대이다. 비록 짧은 시간에 머물겠지만 말이다. 


"파우스트 : 또 전쟁인가! 현명한 자라면 듣고 싶지 않은 소릴세.


메피스토펠레스 : 전쟁이든 평화든, 자신에게 득이 되도록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요. 호시탐탐 때를 노려야 하오." (403쪽)


파우스트는 결국 자신이 세운 공동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면서 더 이상의 만족은 없다고 생각한다.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새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거의 완성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 한다. 그 공동체 속에서 스스로 권력자로 머물려 하지 않고, 사탄에게 그의 영혼을 넘겨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행복은 지식인인 나의 몫이 아니라 땀흘리며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 싸움에서 패배하거나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지만 진지하게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사람들의 것으로 생각한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밖에는 해석하지 못하겠다.


"파우스트 : 일꾼들을 계속 모아들이게. 엄하게 다스리면서도 흥을 돋우어 격려하게. (중략) 자유롭게 일하며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수백만 명에게 마련해 주고 싶네. 들판이 비옥하게 푸르러지면, 사람과 가축이 곧 이 새로운 땅에서 편안히 느끼고, 대담하고 부지런한 백성들이 몰려와 활기찬 언덕에 정착할 걸세. (중략) 파도가 거세게 덮치며 삼키려 들면, 다함께 서둘러 달려가서 (제방의) 벌어진 틈을 막지 않겠는가. 그렇네, 나는 이뜻을 위해 헌신하고 이것이야말로 지혜가 내리는 최후의 결론일세. 날마다 자유와 삶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네. (중략) 나는 사람들이 그리 모여 사는 것을 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말할 수 있으리라.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중략) 파우스트 쓰러진다.


(중략) 메피스토펠레스 : 어떤 쾌감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행복에도 흡족하지 못하고서 항상 변화무쌍한 형상들을 뒤쫓아 다니더니, 가련하게도 시시하고 공허한 최후의 순간을 붙잡으려 들다니." (45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