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잠이 깨,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러 갔다. 과일, 채소와 샐러드가 풍부하고 볶음밥과 쌀죽이 있으니 빵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샌드위치 한조각. 음식을 심하게 가리는 그리미가 아주 잘 먹는다. 어제 저녁 쌀밥 한 그릇과 오렌지로 허기를 달랬으니 배가 고플만도 하다.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출근 정체가 끝나가는 8시 반에 길을 나섰다. 서민들은 길가 작은 가게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 뜨거운 국수나 만두, 볶음밥이니 값싼 음식이지만 아침 요기로는 충분하겠다. 연합대학을 가로 질러 지하철역에 도달하니 그야말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단하다. 놀라운 사람들의 물결. 그들도 가정에서는 모두 귀한 자식이자 존경받는 부모일 것이다. 전철역 에스컬레이터에 떼를 지어 모여 있으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만히 살펴 보면 여유 있는 공간도 있어서 신도림역의 환승지역보다 낫다. 발디딜 틈조차 없고 스크린 도어가 없으면 떠밀려서 철길로 떨어질 것같은 출퇴근길의 신도림역은 더욱 안타깝다.
우리는 외곽으로 나가는 열차라 심하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갈아 탄 공항열차가 오히려 복잡하다. 서서 가겠다는 그리미를 설득해 이리저리 자리를 잡고 앉아 20분만에 도착했다. 어째 일이 잘 풀리네. 공항검색은 매우 엄격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여자 공안이 온몸을 샅샅이 더듬는다. 단 한 곳도 예외를 두지 않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온 몸을 더듬어 댄다. 대단하다. 교대로 근무는 하겠지만, 근무하는 내내 계속해서 이 짓을 할 수 있을까. 그녀들의 열성적인 근무 덕분에 우리의 여행은 안전할 것이다.
비행기가 무려 두 시간이나 지연된다고 한다. 호텔에서 출발하기 전에 점검을 했어야 했나 보다. 그러면 좀 더 여유있게 아침시간을 즐기다가 나올 수 있었는데 말이다. 혹시 양꼬치를 굽는 젊은이가 출근해서 숯불을 피웠을 수도 있었고. 기다리는 것은 괜찮은데 비엔나에 밤늦게 도착하면 날이 너무 추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나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미가 겁을 먹으면 안되니까. 기차역에서 내려 1.2km를 길을 찾으며 가방까지 끌고 걸어야 하는 일도.
낮 비행기이니 열 시간 정도는 잘 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힘이 든다. 비행기를 네 번이나 산책하고, 스트레칭을 열심히 했는데도 몸은 묵직하다. 다행히 오스트리아 항공의 기내식은 먹을만했다. 밥을 선택할 수 있어서. 포도주 안주를 하라고 치킨 요리도 덤으로 준다. 아, 배불러. 잘 먹고 나서 30분 정도 정신없이 잤다.
자식이란 가슴 한 쪽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돌덩이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군대 보내놓고 우리끼리 잘 놀고 있으려니 미안하기는 하다. 아들아, 사랑해. 우리나라 잘 지켜줘 ~
열시간의 비행도 끝내고 16분 만에 시내로 진입할 수 있다는 공항철도(CAT : City Airport Train / single 12유로 return 19유로( 60일 정도 유효 / 시내 방향으로는 매시 9분, 39분에 출발하고, 공항행은 매시 6분, 36분에 출발한다)를 탔다. 사람이 없어서 잘못 탔나 했지만 출발 시간이 되자 몇 사람이 더 타고 출발했다. 기차선로가 부족한지 5분여를 서행하다가 드디어 출발. 고속열차는 아니다. 검표하는 곳이 없어서 신기해 했는데, 기차가 출발하자 작은 가방을 멘 검표원이 다가와 일일이 표를 확인한다. Wien Mitte역(Landstraße /16분 소요)에서 내렸다. 듣던 데로 역에는 항공사 카운터가 운영되고 있었고, 우주신을 시켜서 확인해 보았더니 24시간 전에는 언제든지 짐을 부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모레는 아침에 이곳에서 탑승 수속을 하면서 캐리어 두 개는 부치고 가벼운 배낭만 메고 남은 시간동안 편하게 여행을 마무리하면 될 것이다.
이제 부킹닷컴의 숙소 안내 지도에 따라 1.1km를 걸으면 된다. 눈이 내려 질척거리는 거리를 가방 두 개를 끌고 걷자니 불편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람이 불지 않아서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도나우 운하를 건너며 강 양쪽에 펼쳐진 고풍스런 건물들의 행렬을 보니 여행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오후 8시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길거리에 돌아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쓸쓸한 곳이다. 그래도 우리 땅에서 보기 어려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인적이 없는 눈길을 자전거로 돌아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뭘까 저 자신감은. 자전거 바퀴에 체인이라도 달린 것일까. 번뜩 생각이 든다. 자동차 타이어에 뿌리는 스프레이 체인을 가지고 다니다가 위험해 보이는 자전거 도로가 나타나면 자전거 바퀴에 뿌리고 가는 것은 어떨까. 불시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끄럼 사고를 조금이라도 예방해 줄 수 있지 않을까.
6시 9분 열차를 타고, 40분 경에 내려 7시 20분이 되어서 숙소에 도착했으니 예상한 대로다. 베이징과는 달리 예약은 잘 되어 있었고, 어마어마하게 큰 방을 배정받았다. 수건과 다목적 세제(샴푸, 비누, 린스 등의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드라이기를 제외하고는 푹신한 침대와 작은 식탁과 의자가 전부다. 낡은 건물에 오래된 시설처럼 보이지만, 얼마나 관리를 잘 했는지 놀랍도록 깨끗하다. 햇반과 컵라면, 무말랭이와 김가루로 저녁을 먹었다. 샤워하고 양말을 빨아 널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와이파이는 보이스톡이 간신히 가능한 상태로 왔다갔다 한다. 여행은 떠나온 곳과의 단절이어야 하는데, 디지털 통신 세상이 열린 이후로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 수 있게 되었다. 두 배로 즐거울 수도 있고, 두 배로 버거울 때도 있을 것이다. 인생이 언제나 즐거울 수만도 없고, 괴로움도 이겨내 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니 그런 변화도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하는 일이 되었다.
비엔나의 숙소는 매우 이상한 이름이다. Suite Hotel 200m zum Prater(Bocklinstraße 72 02. Leopoldstadt 1020). 간이주방에서 취사가 가능하면서 조식 포함한 가격이 1박에 60유로. 5일부터 이틀간을 120유로에 예약했다. 평점은 가혹하다. 6.9점. 스프, 토스트, 커피만 있는 아침이겠지만 조식을 준다는 것에 감사하고, 저렴한 가격이 최대 장점이다. 숙소 앞에서 멀리 대관람차가 보이는 것도 떠나는 날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애초에 비엔나는 추울 것이라 생각하고 어떤 외부의 경치를 즐길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공원이 많은 도시지만 거닐며 즐길 수 없으니 아예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여행을 끝내고 생각하니 꽃 피는 오뉴월에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 되었다. 한 일주일 정도 곳곳의 공원과 미술관들을 순례하며 푸욱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살인적인 물가는 아마도 아파트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주방이 없는 곳에 묵으면 요리를 해야 하는 그리미가 매우 불편해 한다. 주방이 있으면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3인실 중 10만원 이내의 숙소는 부킹닷컴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침낭을 챙길 생각이었으나 짐이 늘어난다고 반대해서 그냥 왔는데, 걱정과 달리 매우 따뜻했다.
이름의 비밀을 알았다. 비엔나 놀이공원(Vienna Prater)에서 200미터 거리에 있다는 뜻이 아닐까. 겨울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놀이공원 옆이라면 얼마나 황량할까라는 걱정도 했었다. 그러나 대관람차에 타고 찍은 사진을 보니 넓은 공원과 주택가가 잘 어우러진 곳이고, 역시 고풍스런 주택들이 늘어선 조용한 동네여서 좋다. 이 놀이공원은 합스부르크가문의 오락장으로 1560년에 개장(1403년에 사냥터로 이용되었다는데, 뭐가 맞는지 알 수 없음)하여 1766년에 조제프 2세가 카페와 커피하우스를 열어 일반에 공개된 가장 오래된 놀이공원이라고 한다. 영화 before sunrise가 촬영된 곳.
새벽 두 시. 카톡 소리에 잠이 깨었는데, 한 달 전 심장수술을 받으신 장인 어른이 다시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처제들의 전언.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다시 병원에 가셔야 한다니 걱정이 크다. 하나의 세계는 여유롭고, 또 하나의 세계는 환자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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