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차의 문제가 생긴 것인지 새벽 네 시에 잠이 깼다. 한참을 뒤척였는데도 잠이 들지를 않는다. 천안문 광장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생각이 나서 유투브를 뒤지니 마침 중국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들으면서 생각도 하고 깜박 졸아서 30분 정도는 더 잠을 잘 수 있었다.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을 농민이 주도하게 하고, 사유재산을 거부해야 하는 사회주의자가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여 모든 농민들이 자기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했다. 마오의 전략은 과감하고 유연했다. 모든 것에는 심지어는 공산당에도 모순이 존재하고, 주요 모순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라고 정의하고, 대중에게 해를 입히는 당원들은 가차없이 처단하여 중국 역사에서 가장 농민에게 헌신한 지도자가 마오였다는 평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만 당시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던 다른 공산당 지도부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실천에 옮겨 중국의 공산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연한 사고와 실천'으로 마오쩌둥은 꿈을 이루었다. 마오의 성과와는 별도로 마오와 장칭에 의해 저질러졌던 과오들은 잊혀졌는지 온화한 마오의 사진이 천안문에 소박하게 걸려있다. 과연 언제쯤 마오의 사진이 천안문에서 내려질까 궁금하다.
일곱 시가 넘어서 간신히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제 문제가 되었던 지도를 이용한 길 안내는, 디스플레이의 자동회전 기능이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오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샤워를 하고 8시가 다 되어서 식사를 했다. 본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진입과정에서 힘이 빠졌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적극적으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관람이라는 본 경기를 제대로 뛸 수 있게 하기로 했다. 미술관을 보려면 걸어야 하는데, 아무리 가까워도 2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걸어가서 다시 몇 시간 동안을 서서 감상을 하게 되면 지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제와 똑같은 메뉴지만 아침을 잘 챙겨먹고 체크아웃을 했다. 짐이 무거우니 빨리 처리하고 싶기는 한데, 동선이 잘 나오지 않아 일단 4A 버스를 타고 칼츠 플라츠에 내려서 제체시온(Secesion)을 구경하고 다음 단계를 생각하기로 했다. 도대체 누구인지 마차에 커다란 몸을 싣고 분리파 반항아들의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어깨와 머리에는 눈을 잔뜩 이고서. 묻지도 않았는데, 학생은 할인이라며 우주신의 나이를 묻는다. 만 18세가 끝나려면 두 달이 더 남아있다. 확인도 안하고 과감하게 어른 세장의 티켓을 끊었던 어제의 행동은 조금 이상했다. 준비 과정에서 국제학생증이나 영문 학생증을 만들어 보라고 한 기억도 또렷한데, 막상 현장에서는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유럽의 겨울은 열 시가 넘어서 천천히 시작하는 모양이다. 바쁜 여행객이나 부지런히 움직이니 사람이 없는 고요한 미술관을 독차지 하게 된다. 거두절미하고 지하에 마련된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frize : 띠모양의 장식을 두르는 건축양식이라고 한다)를 감상하러 들어갔다. 사진 촬영은 안된다. 첫 인상은 혹시 미완성 작품은 아닐까. 일부 선 부분이 연필로 그린 그대로 색감이든 뭐든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작품 중간에는 빈 공간이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무엇으로 채울지를 결정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히 여유있게 차분하게 앉아서 멋진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역시 행복한 일이다.
바로 앞에 시장이 있다. 먼저 쌀을 사기로 했다. 우주신은 무거운 가방 위에서 카톡이나 즐기라 하고 둘이서 시장으로 나섰다. 간간이 치워지지 않은 눈이 쌓여있지만, 길 위에서 쉬어도 좋을 정도로 춥지 않았다. 겉 보기에는 작았는데, 길게 뻗은 시장이 제법 크다. 잘 진열된 물건들이 보기에도 아름답고 다양하다. 다양한 향신료 중에서 고추가루가 눈에 띈다. 사고 싶은데. 맛을 알 수 없으니 참기로 한다. 한국식품점이 있다. 김포쌀과 국적 불명의 찹쌀 한 봉지를 샀다. 고추가루는 너무 큰 포장이라 곤란해 했더니 사장님께서 현지인들이 판매하는 고추가루 중에서 매운 정도를 선택해서 사도 좋다고 설명해 주신다. 고마운 일이다.
쌀을 사서 가방에 옮겨 넣고 전철을 타고 공항철도 터미널(란드스트라세 빈 미테역의 CAT 터미널)로 가서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마친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일이 쉽고 빠르다. 큰 가방 두 개를 처리하고 났더니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다시 전철을 타고 칼츠 플라츠로 가서 시장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으로 슈니첼을 먹기로 했다. 손님은 없지만 깔끔해 보이는 레스토랑의 창가에 앉아서 주문을 한다. 자세히 보니 돼지고기는 9.9유로이고 쇠고기는 16유로다. 각각한 개씩을 주문했다. 음료는 우리가 가지고 간 숭늉을 먹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한다. 특별히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먹을 만했다. 돼지고기도 좋았지만 쇠고기는 전혀 질기거나 기름기가 씹히지 않는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메뉴판을 보다가 비엔나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3년 대학에 입학해서 종로 2가 타임 다방에서 맛 보았던 비엔나 커피. 향긋한 계피가루와 커피, 크림이 어울어진 멋진 음료. 그 본고장의 맛을 보아야 한다. 아인스패너가 가장 비슷한 맛이라고 한다. 한 잔을 주문했다. 좋았다.
날이 좋으니 중앙묘지도 가서 베토벤과 슈베르트와 모짜르트의 묘지를 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시간이 맞지 않는다. 그냥 벨베데레로 가기로 했다. 그곳도 다 볼 수 있는 여유는 없다. 회화 미술관만 보기로 했다. 만 18세까지는 무료. 우주신은 딱 한 달 남은 18세다. 여권을 확인하고 무료 티켓을 끊어준다. 어른은 12유로. 기분좋게 미술관으로 향한다.
참 좋았다. 클림트의 걸작, 유디트와 키스, 여자친구. 세 작품 모두 훌륭했다. 소파에 기대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 행복했다. 너무 적나라하고 노골적이어서 그리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천하지 않게 표현되어 아름답고,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려냈는데도 포르적이지 않은 것은 놀라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다. 특히 여자들의 뽀얀 살결과 분홍빛 얼굴, 붉은 입술, 영리하게 반짝이면서도 즐거움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눈. 모든 것이 독특하다. 과감하게 사용된 금빛 색상들도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인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에곤 쉴레의 걸작들. 너무 멋져서 세 번을 돌고, 앉아서 보고, 서서 보고, 옆에서 보고 가까이 보고. 방 하나에 걸려 있는 네 개의 작품이 저마다 다른 색채와 구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표현 방식은 비슷하고, 어떻게 보면 완전히 다른 시도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단 하나의 작품도 어색하지 않다. 인상주의 예술은 이런 걸작들을 탄생하게 하는 위대한 영감인 모양이다. 서른살도 되지 않아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도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남겨 놓은 것을 보면 대단한 천재였던 모양이다. 반 고흐는 그의 그림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데, 쉴레는 너무도 쉽게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낸 모양이다. 코코쉬차의 그림 두 장도 매우 인상적이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초상도 멋지다. 영웅을 그려서 멋있는지 그림이 살아있는 것처럼 좋아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보나파르트의 거대한 초상의 배경에는 프랑스 군인들이 대포를 끌고 걸어서 알프스를 힘겹게 넘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영웅은 그였지만, 그를 만든 것은 저 수많은 병사들이었다. 자유, 인권, 평등의 프랑스 혁명이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반혁명 귀족 왕정 세력에 의해 붕괴되어서는 안된다는 시민들의 굳건한 결의가 나폴레옹의 승리를 가능케 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수호자로 그려진 나폴레옹의 맑은 눈과 힘찬 손짓은 성화처럼 경건하기까지 하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영웅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평화를 가져오는 영웅의 모습으로 보고 싶다. 이토오를 처단하여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오려 했던 도마 안중근의 모습처럼 순박하면서도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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