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농한기 동안 여행이다 교육이다 해서 잘 놀고 다니다가, 오늘 오후 다섯 시간 연속 노동을 하고 났더니 온 몸이 쑤시고 몸살기가 나서 저녁밥을 먹고 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 시간을 자고 났더니 비로소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 저것 이야기가 쓰고 싶어져서 오래 전의 글들을 다듬어 보았다. '글수다'의 발동이 걸린 것이다. 이 증상은 보통 이레에서 열흘이 간다.
그러나 막상 오늘 한 일은 정리하지 못했다. 매일매일 농사 일기를 써야 하는데도 꾸준하게 쓰지를 못한다. 온도를 비롯한 기후도 기록하고 한 일도 자세하게 정리하는 것은 농부로서 중요한 일이다. 비용이나 수익이 발생한 것들도 기록을 해야 하는데, 엑셀 파일에 탁탁 숫자를 쳐 넣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 숫자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글수다도 떨어야 하지만 좋아하는 것은 가꿔줘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 날씨는 제법 쌀쌀하여 잠깐 산책하고 돌아 와서는 인터넷이나 뒤적이며 놀았다. 음성군청에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금왕읍에는 좋은 교육이 없는지 대충 훑었다. 삼성면의 이장회의 자료가 올라와 있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갑자기 귀찮아져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다른 자료들을 검색해 보았다. 군청의 구인구직 난에서 집앞의 대지금속에서 구매 담당자를 모집한다고 하기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혹시 4시간 정도만 근무하면 안되는지를 물었다. 바로 거절당했다.
나처럼 농사가 주업이지만 농사로 생계비를 벌 수 없는 사람에게는 하루 종일 근무하는 일자리 보다는 하루 서 너 시간을 일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지난 2년 동안 농사를 지어 보니 매년 500만원 정도의 순손실이 발생하였다. 예상한 결과인데, 실제 손실이 발생하다 보니 농사짓는 재미도 떨어지고 마음의 부담이 크다. 이 손실을 보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금년도의 과제이며, 해결될 때까지 영원한 숙제가 될 것이다.
농사로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투자를 해야 하고, 비료와 농약과 제초제를 활용하는 관행농법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귀농을 결심한 초심과는 멀어지는 일이다. 현재의 방식대로 짓고, 별도로 시간을 내어 시간제 근로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귀농의 취지와 일하는 즐거움을 모두 얻을 수 있으리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까 생각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사교육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마지막까지 참기로 했다. 대신에 자원봉사활동으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함께 할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고 싶다.
그 사이에 정농께서는 감자를 심으셨다. 날이 쌀쌀해서 털모자까지 쓰고 나가셔서 혼자서 밭 위에서 얼마나 쓸쓸하셨을까. 수천과 무일은 날 좀 풀리면 움직이기로 하고 점심을 일찍 먹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농께서는 식사를 하시고 잠시 쉬셨다가 쌍봉초등학교 도서관 도우미 근무를 위해 마음이를 끌고 나가셨다. 씨감자의 눈을 따는 작업은 실내에서 해도 되니 찬 봄바람이 부는 바깥 대신에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서 작업을 하셨다.
무일은 지난 번 농기계 교육을 받으며 주워들은 나무 전지하는 방법대로 자유롭게 자란 나무들의 가지를 정리해 주기로 했다. 전지 가위도 찾지를 못해서 작은 톱을 들고 제일 먼저 대추나무로 달려 들었다. 굵고 간섭이 없는 세 개의 가지를 제외한 잔가지들을 전부 쳐 주는 게 좋다고 했으니 그 원칙에 따라 이리저리 가지를 잘라갔다. 원칙은 원칙일 뿐인지 어떤 가지는 네 개고 다섯 개고 전부 잘라내기가 아까워 보였고, 어떤 나무는 마구 자르다보니 두 개의 가지 밖에는 남지를 않았다. 2년 전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어미 대추나무를 대신해 제법 자란 작은 대추나무까지 전지 작업을 하는데 거의 30분이 넘게 걸렸다. 작업을 끝내고 멀찍이 서서 나무를 감상해 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팔이 아프게 가지를 잘라냈지만 일한 흔적이 느껴지지를 않는다. 쩝. 이번에는 산수유 나무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미 모든 가지가 노란 꽃들을 피워내고 있었다. 불사춘 춘래(不似春 春來 ; 봄이 아닌 것 같으나 봄이 왔다). 그 여리고 귀여운 생명들에게 손을 댈 수가 없어서 한참 꽃망울을 바라보다가 개복숭아 나무로 갔다. 요즘 최고의 인기 품목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개복숭아 효소에 없어서는 안될 나무다. 우리 마을에는 오랜 옛날부터 개복숭아 효소를 담가 먹었다고 하니, 요즘 유행하는 건강식품이라고 하는 것은 옛 음식들을 복원하는 것인 모양이다. 좋은 일이다.
대추나무와 개복숭아까지 한 시간이 넘도록 전지를 했더니 갑자기 일이 하기가 싫어졌다. 씨감자를 잘라 밭으로 들고 나가신 수천께로 갔다. 긴 나무로 감자를 놓을(씨감자를 심는다는 것을 놓는다고 표현한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구멍을 뚫고 계셨다. 아래 밭의 비닐을 벗기라고 하신다. 원래 계획은 작년 가을에 씌운 비닐이니 다른 작물을 한 번 더 심고 벗기려고 했으나 흉하게 찢겨진 것들이 많아서 제초 효과가 없으니 그냥 벗겨 내자고 하신다.
비닐을 벗기러 들어갈 때는 마음 가짐을 이렇게 먹는다. 총 15개 고랑이니까 고랑하나 끝날 때마다 일은 7%가 끝나는거야. 숫자에는 묘한 마력이 있어서 조금씩 숫자를 쌓아 나가는 것이 마치 보상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 마련되어 있으니 일이 덜 힘들어지고 신나게 마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천천히 천천히(만만디 慢慢地)를 속으로 외치는 것이다. 일이 좀 풀리는가 싶으면 속도를 높이고 싶은 것이 나의 본성이다. 그러나, 속도를 높여도 넓은 땅을 인간이 단숨에 정복하기는 힘들다. 금방 지쳐 버리게 되어있다. 그래서 천천히 조심해서 간다(만저우 慢走). 쉽게 지치지 않고 안전하게 작업하기 위해서다.
비닐은 두 시간 만에 다 벗겨낼 수 있었다. 씨감자를 다 놓고 수천께서 무려 한 고랑을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비닐 포대에 꾹꾹 눌러 담았더니 무려 여섯 포대가 되는 것을 비닐 집하장까지 옮기기 좋게 마당 한쪽에 쌓아 두었다. 부천으로 가져 갈 대파를 다듬으시는 동안 다시 톱을 들고 전지작업을 하러 마당으로 갔다. 작년에 제초제 마신 어미에게서 태어난 새끼처럼 기형으로 생긴 단 한 개의 열매를 맺은 모과나무 앞에 섰다. 키라도 쑥쑥 자라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추운 겨울에 얼어죽지 않고 잘 커 주는 모든 나무들이 고맙다. 정말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해 주었다. 역시 흔적도 나지 않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쥐똥나무다. 무일농원 마당의 울타리 구실을 훌륭히 해 내고 있는 쥐똥나무는 해가 갈수록 가지가 굵어져 전지 작업이 매우 힘이 든다. 만만디든 %든 어떤 주문도 먹혀들지 않는다. 정농께서 작년 초겨울에 예초기로 가지치기를 하시다가 말벌들에게 공격을 당하신 것도 쥐똥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안식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했다. 창고 앞의 저 쥐똥나무들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까. 과감하게 허리 아래로 잘라 버리기로 했다. 눈 위로 무성하게 자라는 것보다 눈 아래로 자라게 하는 것이 관리할 때 부담이 적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작업을 했는데도 일은 진척되지 않는다. 무성한 가지에 강력한 덩굴들과 잡초들이 뒤엉켜 있어서 작업이 쉽지 않았다. 버프를 쓰지 않은 얼굴은 나무 가지에 몇 번이나 긁혔고, 두 팔은 경련이 날 정도로 아팠으며, 톱을 쥐고 있는 손가락들은 잘 펴지지도 접히지도 않는다. 날도 저물어 가는데 그만 할까. 열 번도 넘게 그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야, 지금 안하면 정농께서 힘들게 작업하실 게 틀림없어.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또 다시 한 시간을 일했다. 몸도 으슬으슬 떨려온다. 점심 먹고 참도 없이 다섯 시간을 넘게 계속해서 일하고 있었다. 이 때 마침 도서관에서 정농께서 돌아오셨다. 안 그래도 이 일을 하고 싶었는데 잘 했다고 하신다. 과감하게 허리 아래로 쳐 내린 것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긍정의 힘으로 30분을 더 일하니 마침내 끝났다. 저녁을 간신히 먹고 매트리스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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