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판에서 열심히 잘 자라 준 어린 고추들을 조금 넓은 포트에 옮겨 심는다. 포트에 흙을 절반 정도 채우고 그 위에 한 줄기 한 줄기 어린 묘들을 옮겨 심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혹시나 어린 줄기나 뿌리가 상할까봐 조심조심 하다보니 하나 옮겨 심는데 5분도 더 걸린다. 불과 10개를 옮겨 심는데 한 시간 가까이 흘러버렸고, 어깨와 등짝이 뻐근하다. 뿌리에 혹시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을 고려해서 한밤중에 형광등을 켜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잠잘 시간이 되도록 20개 정도 밖에는 옮겨심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가족들이 모두 학교로 간 사이에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종이컵에 물이 빠지는 배수 구멍을 뚫는 작업을 했다. 못으로 구멍을 뚫다 보니 하나 보다는 여러 개가 나을 듯 해서 3개의 구멍을 뚫고 나서 보니 울상을 짓는 듯한 모양이었다. 기왕이면 웃는 모습이 좋을 것 같아서 시간을 더 들여 웃는 모양의 물구멍을 내었더니 보기에 좋았다. 컵들을 바라볼 때마다 바닥에 웃는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면 같이 웃게 될 것이고,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어린 고추들은 기분이 좋아져 쑥쑥 잘 자랄 것이다.
어린 줄기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의 효율도 중요했다. 손놀림을 빠르게 하고 과감하게 흙 속에 뿌리를 심어갔다. 어제 저녁보다 3배는 빠른 속도로 일이 진척된다. 전부 100여개 묘를 심는데 성공했다. 물을 듬뿍 주었지만 힘들이 없어서 그런지 축축 늘어져 흙 위에 엎드려 있다. 지금은 몸살을 하는 것이니 뿌리가 다시 새로운 흙에 적응하게 되면 몸을 똑바로 세우고 활짝 일어날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나서도 모판에는 아직도 많은 양의 줄기들이 남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새싹 비빔밤을 해 먹기로 했다. 흙을 깨끗이 털어가면서 가위로 잘라낸 어린 잎들을 정수된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에 밥 위에 올리고 고추장과 참기름, 들기름을 듬뿍 부어서 싹싹 비벼 놓았더니 제법 그럴싸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아직도 어린 줄기들이 많으니 우리 식구 한 끼 새싹 비빕밥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겠다.
모판을 훑어보니 아주 어린 것에서부터 네 잎이 달린 튼튼한 것까지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고추씨의 모습이었다. 고추씨앗은 물에 불리면 먼저 하얀 뿌리를 내고, 이어서 햇볕을 볼 수 있는 떡잎을 몸안에서 슬슬 밀어내는 모양이다. 7cm까지 제법 크게 자란 녀석들도 씨앗을 그대로 잎끝에 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씨앗이 어미가 되어 어린 고추들을 몸 안에서 뽑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씨앗은 다 자란 식물들의 자식인데,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면서 마치 어미가 된 모습이다. 씨앗은 자식인가 어미인가.
종이컵도 깨끗하게 버려야 재활용할 수 있다_140311, 화
역시 식물은 여리지만 강했다. 초보 농부의 어설픈 보살핌에 곰팡이나 피우고 썩을 줄 알았더니 흙을 슬며시 들어 올리면서 이파리를 조금씩 내밀기 시작한다. 처음 한 두 개가 연녹색의 머리를 드러내더니 금방 온 모판을 뒤덮어 버린다. 15일이 지나자 떡잎 두 장이 당당하게 모두 모습을 드러냈고, 줄기의 길이는 4cm ~ 5cm에 달할 정도로 쑥쑥 자란다. 매우 드물지만, 떡잎 두 장 사이에서 본잎 한 장이 올라오고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뿌리도 씨앗에서 나왔을텐데, 그 작은 뿌리가 씨앗은 물론 줄기와 떡잎까지 쑥쑥 밀어 올리고 있다. 거실의 유리창을 통해 남쪽에서 빛을 받고 있으니 약 5도 정도 몸을 기울여 햇빛을 받으려 애쓰고 있다. 그 각도가 거의 일정한 것도 신기하다.
이미 커버린 형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크고 있는 작은 떡잎(1~2cm)들도 보인다. 아직까지는 수도물 말고는 아무 것도 뿌린 것이 없다. 다음 주에는 EM 용액이라도 영양제로 뿌릴 수 있도록 공부해 두어야겠다. 아파트는 밝아서 밤에는 스티로폼 박스에 담아서 신문지를 덮어서 완전히 깜깜하게 해 주었다. 편히 잘 자라.
고추씨앗이 말라버렸어_140217, 월
씨앗을 면티에 싸서 바닥에 두고 하루밤을 잤다. 아무 생각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만져보았더니 뽀송뽀송하다. 그 안에 들어있던 씨앗들은 처음에 불리지 않았던 원래 상태로 돌아가 버린 듯하다. 이런, 물관리를 해 줘야 하는구나. 그래, 처음인데 아무 일 없이 진행되는 것이 이상하지.
다리미질을 할 때 쓰는 스프레이에 물을 담아서 옷 위에 충분히 뿌려주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나니 물은 벌써 증발해 버리고 없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물을 뿌려 주었지만 20%도 안되는 공기 중의 습도 때문에 금방 말라 버리고 만다. 2, 3일이면 하얀 실뿌리가 나온다고 하는데, 나흘이 지나도록 변화가 없다. 씨앗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정도로 습기가 부족하다.
안되겠다. 스프레이로 점잖게 뿌려주는 물로는 잠들어 있는 씨앗들을 깨울 수 없는 모양이다. 공기로 한 대접의 미지근한 물을 받아다가 두 개의 옷 위에 흥건하게 뿌려주었다. 서너 시간 동안 충분히 젖어있다. 그렇게 하고 또 이틀을 보냈다.
17일(월)의 아침. 씨앗이 썩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어찌되었든 흙 속에 씨앗들을 묻어줘야겠다. 준비해 둔 모판 위에 원예용 상토를 절반 정도 펴고 스프레이로 물 반병을 뿌려 주었다. 그 위에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몇몇 고추씨앗에서 2, 3 mm의 하얀 실뿌리가 뻗어 나와 있었다. 그리미와 함께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역시 식물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살려는 의지가 강하다. 악조건 속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최대한 씨앗을 골고루 뿌려서 흙이 몸에 닿도록 한 뒤에 다시 상토를 덮고 물 반병을 더 뿌려주었다. 그리고 흙물이 거실바닥으로 빠지지 않도록 스티로폼 상자 속에 씨앗 상자를 아늑하게 자리잡아 주었다. 이제 물관리 하는 일만 남았는데, 무일농원으로 가야 한다. 무일이 없는 동안에는 그리미가 물관리를 해 줄 것이다.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은 멀기도 하다. 씨앗들의 생명력에 기대를 걸고, 최대한 열심히 돌보자.
자연의 온도는 까다롭지 않다_140211, 화
고추씨앗의 싹틔우기를 하면서 문득 걱정이 되었다. 온도 설정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미는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이 정도 온도면 틀림없이 싹이 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실패해도 육묘장에 주문해 둔 고추모종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토종씨앗이고 자연농으로 만든 씨앗이 없어져버리는 일이라 걱정이 안될 수가 없다. 그러면 온도를 맞추든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자연의 온도가 그렇게 까다로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냥 걱정 조금 하기로 했다.
인터넷에는 없는 정보가 없다. 그런데, 막상 그 정보대로 하려고 하면 잘 안될 때가 있다. 장비나 도구가 필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고추모종 키우기는 농부의 입장에서 어려운 장비나 도구가 보이지 않는다.
씨앗을 담궈 두었던 그릇을 만져보니 차디차다. 25도~30도를 유지하라고 했는데, 23도의 실내에 방치해 두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24시간을 물에 불린 후에는 미지근한 물에 적셔진 천에 고추 씨앗을 싸서 실뿌리를 내라고 한다. 전기주전자로 물을 데우고 마땅한 천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마침 자전거를 닦으려고 보관해 두었던 아이들의 반팔 면티를 이용하기로 했다. 뜨거운 물에 빨았지만 방바닥에 깔아 놓으니 금방 찬 습기가 느껴진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불려진 고추 씨앗을 뿌린다.
하루 사이에 고추 씨앗이 물에 퉁퉁 불려질 줄 알았더니 눈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포착되지 않는다. 온도가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정성을 기울인다고 약간 검은색을 띤 씨앗들은 되도록이면 걷어내고, 맑은 색으로 빛나는 씨앗들만 두 개의 옷 위에 잘 깔고 덮어주었다.
그러면 다시 어디에 둘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처음하는 일이어서 그렇지 매년 하다 보면 몸에 익어서 이런 고민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해가 없을 때는 보일러의 온수가 제일 먼저 돌기 시작하는 부엌 바닥에 두었다가 해가 뜨면 문주란 화분 앞에 두는 것이 좋겠다. 고추씨를 담은 두 개의 옷을 가지런히 놓았다. 오늘 농사일은 끝이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삼일 이라고 했으니 이틀만 기다려야겠다.
고추모종 키우기의 첫 발을 내딛다_140210, 월
농한기(12월~3월)에는 부천과 음성을 왔다갔다 하다 보니 그동안은 모종 키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일농원을 지키고 계신 부모님께서 하우스에서 이것 저것 해 보시는데, 모종들이 잘 크지 않는다고 한탄하셔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두 분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우리 하우스가 부실하다 보니 2월에서 3월사이에 제대로 온도가 나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비닐을 이중으로 덮어주어도 잘 자라지 못하고 금방 죽어버렸단다. 물 관리는 매일 같이 꾸준히 해 주신 것 같으므로 결국은 온도가 문제인 모양이다.
부천 아파트에서 한 번 키워보기로 했다. 일단 우리 아파트는 항상 22도 이상으로 온도가 유지되고 있다. 남향이니 해가 드는 거실 유리창 쪽에는 한낮이면 25도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그리미가 열심히 키우고 있는 화분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고추 모종 한 상자가 끼어 든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파트의 따뜻한 겨울을 이용한다면 모종 키우기가 의외로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고추 모종을 가져다 두면 자연스럽게 그리미와 아이들도 농사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지금도 모든 가족들이 관심을 가지고 농사를 지켜 보고 있지만, 고추 모가 자라는 70여일의 기간을 물도 주고 옮겨 심기도 하는 등 함께 키워 간다면 더욱 큰 재미와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농사를 가르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고추 모종 기르기에 성공을 하게 되면 호박과 토마토, 오이 모종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 거실이 좀 작아서 과연 그 많은 모종들을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꿈은 그렇게 가져본다. 도시와 시골을 왔다갔다 하는 것이 무일의 어려움이었다. 그런데, 모종기르기가 가능해지면 그 단점이 장점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독립해서 나갈 때까지는 도시의 집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수억원을 주고 마련한 아파트에 무일농원의 육묘장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더해지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있겠는가.
인터넷을 뒤져서 고추모종 키우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오룡도사'라는 분의 답변이 가장 자세하다. 그중에서 모종 기르기와 관련된 부분을 먼저 찾아보았다.
"고추는 고온 작물이므로 겨울철 밤온도는 12도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고, 하우스 파종시기는 정해진 시기가 없으며, 언제든지 씨앗을 뿌리고 모종 가식 전까지 25도 정도와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 주어야 한다."
싹 틔우기 : 발아를 고르고 빠르게 하기 위해서는 싹을 틔워 파종하는 것이 좋은데, 30℃ 정도의 미지근한 물에 하루 동안 담근 다음, 물에 적신 천에 싸서 25-30℃ 정도 되는 온상이나 온돌방 등에서 2-3일 정도 보온하여 흰 뿌리가 조금 나오려고 할 때에 파종한다. 이때 천을 벗기면서 어린 싹이 부러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오늘은 먼저 고추씨앗을 물에 불리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수온을 30도로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서 미지근한 물을 만들어 커다란 용기에 담고 고추씨앗을 담궈놓았다. 이론은 30도라고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을 맞춘다는 것은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보일러 조절기에서 표시하는 현재 온도 24도. 이 정도의 온도 속에서도 불려질 것이라고 믿고 좀 더 따뜻한 곳이 어디일지를 찾아 보았다. 문주란 화분이 눈에 띄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화분 속이 포근했다. 그 위에다 그릇을 얹어두면 한 낮에는 25도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고추 씨앗은 작년에 시언님과 고구마 아줌마로부터 받은 것을 하우스에 직파하여 키운 것을 쓰기로 했다. 수천께서 키우셔서 어떤 씨앗인지 알 수가 없다. 두 분은 정성스럽게 이름까지 일일이 써서 보내주셨는데, 직접 키우는 사람이 이렇게 분방하게 키워버려서 죄송한 마음이다. 이름을 몰라도 잘 키워서 다른 사람에게 분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두 분의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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