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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사는 이야기

대머리와의 치열했던 그 싸움_131128, 목

오랜 만에 고교 동창들을 만났다. 7회 한 명, 8회 세 명, 10회 한 명. 10회 막내까지 내일 모레면  모두 오십이다.  흰머리 친구가 막내의, 하늘같은 선배들을 길거리 까페에서 90분이나 기다리게 한 죄를 추궁하는 바람에 술자리가 화기애애해졌다. 벌써 십여 전의 일을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다시 끄집어 내어 훈계를 한다고 한다. 


이런 조합의 만남이 거의 20년 만이어서 나 혼자 기억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7회를 제외한 네 명과 또다른 한 명의 9회까지 다섯 명의 설악산 등산이 화제에 올랐다. 까칠한 흰머리와 후배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대머리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1989년 10월 1일과 2일의 일이었다.


후배의 추천으로 학점 잘 나온다는 강의를 들으며 어울렸던 우리 다섯 명은 의기투합해서 설악산을 가기로 했다. 오색에서 하루밤 자고 다음 날 새벽에 대청봉을 올랐다가 온천을 하고 올라오는 계획이었다. 산행을 제의한 후배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빠져버리고, 네 명이 오색으로 갔다. 버스타고 오색까지는 잘 도착했는데, 숙소가 문제였다.


가난했던 우리가 함께 모아 온 숙영장비는 판쵸우의 한 장과 비닐 한 조각, 끈 한 타래였다. 그 허접한 재료로 네 명이 잠을 잘 작은 텐트를 쳐야했다. 나무를 주워다 기둥을 세우고 돌맹이에 의지해 끈을 묶는 등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갑론을박이 많았었지만 칼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은 확보했다. 그렇지만 10월 1일의 설악산은 말도 못하게 추워서 침낭 하나도 없었던 우리들은 가지고 간 옷을 다 껴입고도 밤새 추위에 떨어야했다. 얼어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주변에 쳐진 다양하고 화려한 텐트를 보니 창피해서 거적밖을 나가기가 어려웠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아침을 해 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오색에서 대청을 오르는 길이 장난이 아니었다. 무일은 당시 왠만한 고개는 평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몸이 가벼웠었는데, 그 길은 거의 수직절벽에 가까웠다. 그러니 군대도 제대로 안갔다 온 친구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게다가.


두 시간 쯤 올랐을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옷과 판쵸우의를 꺼내서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손발이 얼어붙는다. 바람까지 불어서 얼굴이 땡땡 얼었다. 그렇게 또 한 시간여를 올랐을까. 많은 등산객들이 술렁댄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비가 눈으로 바뀌어서 엄청나게 쏟아진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우리들도 당황했다. 손발은 곱아서 빨갛고 등짝의 땀은 조금만 쉬고 있으면 얼음이 되어 버렸으며 얼굴은 얼얼했다. 갈까 말까 망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눈비가 섞여 내리면서 등산로가 빙판처럼 미끄러웠는데, 허름한 운동화로 무장한 우리들은 더욱 두려웠다. 이 때부터 치열한 싸움이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무일은 갈 수 없을 때까지 올라갈 것을 주장했고, 대머리는 뭐 죽을 일 났다고 눈 비 바람 맞아가며 올라가느냐고 하면서 되돌아 갈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사실 무일을 제외한 세 명이 산행을 중단하자고 한 것은 기억하지만 대머리가 강력하게 그랬다는 것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든 한 번 시작하면 겁이 나더라도 끝을 보고 싶어하는 성질이라 계속 올라갈 것을 주장했었다. 게다가 제대하면서 산에는 절대로 안간다고 맹세한 나를 끌고 온 사람들이 정상을 한 시간 정도 남겨 둔 코 앞에서 포기하자고 하니 열불이 나고 있었다. 물론 겁도 많이 났었다. 


두 사람이 결론 안 나는 치열한 논쟁을 하고, 다른 두 사람은 우리 둘을 말리느라 분주했다고 한다. 대머리는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로 무일은 가끔씩 흥분하고 화를 내면서. 결국 수적으로 밀린데다가 가슴 속의 두려움이 무일을 포기하게 했다.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비슷한 시간에 대청봉 정상을 밟고 내려 온 사람을 보고 나니 더욱 화가 나서 그 뒤로 우리 네 명의 모임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와 대머리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만나왔고, 그 날의 산행에 대해서는 비참한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 별다른 싸움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는데, 다른 친구들은 우리 둘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그 날 화를 많이 냈다는 내가 즐겁게 사과하고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앞으로 이 모임이 계속되고, 미국에 나가 있는 후배 한 놈까지 들어와서 만나게 되면 뼛가루가 바람에 뿌려질 때까지 계속될 이야기가 틀림없다.


아, 또 하나의 기억. 그 때 거두었던 회비를 미국 후배가 가지고 있었는데,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바람에 절반 정도의 회비가 남았고, 후배에 의해 횡령되었을 것이라는 대머리의 증언이 나왔다. 우리 모두 무릎을 치며, 20년 전이니까 이자를 감안하면 100만원도 넘는 돈이 되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흰머리가 분개하며 내일 당장 미국으로 전화해서 돌아오는 즉시 받아낼 것이라고 한다. 내놓지 않으면 평생을 따라다닐 까칠한 놈이다. 


막걸리 잔이 슬슬 돌아가고 뱃속이 시원할 정도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