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기심천국/뉴질랜드호주자동차여행

파도를 보며 바나나를 먹다_051103, 목

아침은 약간 서늘했다. 맥쿼리 포트에 도착하지 못하고, 작은 항구 도시에 도착해서 볼링장(아마도 게이트볼)과 게임장(일종의 작은 규모의 카지노)의 주차장에서 잠을 잤는데, 조용하고 깨끗한 반면에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새벽에는 약간의 추위를 느꼈다. 자다가 일어나서 긴바지와 긴팔을 주워 입고 발에는 벗어놓은 속옷을 두르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천재는 춥지도 않은지 쌕쌕 잘 자고 있다. 우리 둘만의 여행은 웬만한 고통은 다 견뎌낼 수 있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서 어제 밤에 전화박스 뒤에 빠뜨린 국제전화카드를 찾으러 게임장으로 들어갔다. 문들이 다 잠겨있는데, 오직 한 곳이 열려 있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일단 급한 볼 일 보고, 다시 한 번 전화카드를 빼 내려고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매니저 사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인상 고약하게 생긴 대머리의 매니저가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상황을 설명하니까, 공중전화 상태를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사무실로 열쇠를 가지러 들어간다. 그러면서 이곳은 8시 전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라고 큰 소리로 이야기 한다. 어떻게 들어왔냐는 것이다. 물론 열려진 문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아마 이곳이 돈을 많이 쌓아두는 게임장이기 때문에 유난히 출입자에 대해 신경을 쓰고 특히, 그의 사무실은 어제 밤에도 들어가면 안 된다는 종업원의 설명이 있었다. 어쨌든 그가 전화박스를 열어 전화기를 꺼내자 그 안에서 카드를 찾을 수 있었다. 고맙다고 박수를 쳐 주었더니 그도 기분이 좀 풀어진 모양이다. 문을 잠그고 나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조치하겠다고 한다.


다시 길을 잡아 포트 맥쿼리로 향했다. 이곳에서 볼 것은 코알라 호스피틀이다.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코알라 치료기관이다. 천재가 지도를 보며 길잡이를 했고, 잠시 해변에 들려서 밥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오늘 아침 밥을 먹은 것이 어제 한 밥의 마지막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불편하신 할머니 한 분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개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저렇게 불편한 걸음걸이를 해야 한다면 자식들로부터 소외받고, 본인도 힘들어서 방안에서만 움직일 것이다. 편안한 표정으로 그것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아침 일찍 산책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선진국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해변에서는 벌써 한 부류의 사람들이 나와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이른 휴가를 받은 사람인지 여유롭게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휴게실로 들어가서 전원이 있는지를 확인했는데, 샤워 시설까지는 되어 있어도 전원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해변으로 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바비큐 시설에 사용하는 전기는 작동이 되는데, 우리 밥통을 꽂을 콘센트는 보이지 않았다.


코알라 병원에 가면 그곳을 구경하는 동안에 밥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빨리 코알라 병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코알라 병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거대한 열대 우림 속에 너무나 초라하게 자리 잡은 코알라 병원은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해서인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다들 표정이 밝고 깨끗했다. 우리가 본 코알라는 전부 8마리 정도 된다. 그 중 코알라 모자의 실제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열대우림 숲을 불도저로 파헤쳐 길을 만들고 있었는데, 앞 못 보는 어미 코알라와 새끼 코알라 부르스가 그 숲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미 코알라는 요란한 굉음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만 죽어 버리고, 부르스만이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이곳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아주 순박해 보이는 작은 동물인 이 코알라는 마치 잠을 자는 듯한 모습으로 나뭇가지의 갈라진 틈에 앉아 있었다.


코알라의 모습에 감동하기까지는 좋았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기를 건네다가 어제 새로 산 카메라를 또 시멘트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둘 다 너무도 놀랬고, 나는 천재에게 화를 냈다. 화풀이다. 사실 주고받는 과정에서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잘못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천재에게 화를 내고 앞으로 카메라에 손을 대지 말라고 했다. 그 바람에 천재가 화가 나서 차로 돌아갔다. 사과를 했지만 이미 망쳐버린 기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혼자서 병원을 설립한 사람이 살던 집을 구경하고 돌아 나오는데, 나무 위에 코알라가 있다는 표시가 보였다. 고개를 쳐들자 5미터가 넘는 나무 위에 코알라가 앉아 있었다. 나는 혹시 인형이 아닌가 싶어 잠시 살펴보았다. 역시 움직임이 없었다. 실망하면서 나무를 한 바퀴 도는데, 코알라가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본다. 아 살아 있는 코알라구나. 반가운 마음에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다음 목적지는 비지터센터에서 콥스 하버를 찾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 모든 것이 잘 준비되어 있어서 친절하게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답게 항상 친절한 자세로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콥스하버는 고래 관광이 주요 이벤트인 모양이다. 항구 전체가 Whale Watch의 깃발을 단 배들로 가득하다. 스노컬링, 스쿠버다이빙, 고기잡이를 엮어서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판매하는 모양이다. 어제 노스 라이더(시드니 북부 지역)에서 산 커다란 바나나를 먹으며 바다 경치를 구경하는데, 바람이 몹시 불어서 파도가 세다. 마치 겨울의 동해 바다를 구경 온 기분이다. 망망대해라서 동해안의 바위들이 보여주는 운치는 없었지만 넓고 긴 백사장은 참으로 훌륭하다.


멀리 보이는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부부에게 고래를 볼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오늘은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날씨라서 보지 못했고, 날씨가 좋다면 저 위에서 볼 수 있지 않겠냐고 재치 있게 답변하고 내려간다. 유쾌하게 웃어주고 천재와 나는 언덕을 오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보는 바다나 그 위에서 보는 바다나 똑같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빅바나나농장으로 갔다. 뭐라도 보아야 할 것같아 여행안내책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곳은 퍼시픽 하이웨이를 올라서자마자 나타났는데, 소개된 것과 같은 일들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휴가철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거대한 바나나 농장을 우리 단둘이서 거닐었다. 하나도 운치 있지 않았지만, 나무에 매달린 진짜 바나나를 한 번 보자는 일념으로 거대한 비닐 포장지가 덮여 있지 않은 바나나 나무를 찾아 다녔다. 정상에 올라서니 진홍빛 바나나 꽃과 새파란 바나나를 볼 수 있었다. 구경시키기 위해서인지, 바람에 날려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두 그루의 바나나 나무가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예쁘지는 않지만 커다란 꽃과 풍성한 열매가 열려 있었다.


바나나농장의 꼭대기에서 콥스하버의 아름다운 경치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기념품점에 들어갔더니 바나나를 이용한 다양한 물품들이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은 중국산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상품 디자인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내 관심 분야가 아니라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했다. 천재는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풀어지지는 않았다. 옆에 퍼즐월드를 가보고 싶다 길래 함께 갔더니, 뉴질랜드에서 본 것과 같은 다양한 퍼즐들이 있었다. 이런 장난감들이 아직도 잘 팔리고 있다면 아직 이곳의 아이들은 컴퓨터에 중독되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좋은 일이다.





오늘의 관광 일정은 이로써 끝이다. 콥스하버의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고 싶었는데, 오늘 밤까지는 브리즈번에 도착해야 해서 수영은 못하고, 그저 샤워만 하려고 했는데, 이곳의 샤워장은 완전 야외에 노출되어 있어 포기했다. 가면서 좋은 비치가 나타나면 다시 한 번 가 보기로 작정하고 일단은 브리즈번으로 길을 잡았다. 앞으로도 약 400키로를 더 올라가야 한다.


브리즈번으로 가는 길에 드디어 가장 큰 사고가 났다. 도심을 통과하면서 내 앞에 있던 선도차가 빠졌는데, 나와 천재는 보라색 꽃을 가진 아름다운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 그만 속도위반에 걸리고 말았다. 보통 시내 구간은 50킬로인데, 속도계에 찍힌 내 차의 속도는 72킬로라고 한다. 벌금이 무려 225달러. 몇 번을 내가 이곳의 여행객으로 운전에 익숙지 않음을 설명했지만, 고압적인 경찰관은 속도제한을 모르느냐며 봐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면, 옆에 선 경관은 마음씨 착해 보였는데, 내가 흥분하는 것을 방지하려는지 좋은 이야기로 나의 관심을 돌린다.


호주는 완전히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나라다. 내가 코리아에서 왔다니까, 대뜸 하는 이야기가 김정일이 미친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핵폭탄을 개발하려고 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핵폭탄을 이미 가졌고, 실전에 사용했으며, 이미 많은 핵실험을 한 미국이나 선진국들은 도가 지나치게 미친 것이 아니냐고 응답해 주고 싶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논리학의 기본 상식도 없는 미국인이나 호주인과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성은 아시아의 지성들로부터 훨씬 밝게 빛난다. 규칙에 얽매여서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어떻게 밝은 이성이 나올 수 있겠는가? 덕분에 천재와 나는 앞으로 호주를 위해서는 단 한 푼의 달러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오늘의 잠자리는 사우스 브리즈번의 모자병원에 마련하기로 했다. 브리즈번 도심이 시드니 못지않게 번잡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잘한 판단이었다. 마침 응급실 앞에 약간은 정신없지만 안전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찬혁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자는 동안 비가 오고, 앰뷸런스가 들어오고, 헬기가 착륙하는 등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쨌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