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어떤 소리 때문에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바로 앞쪽에 변압기가 있었다. 공원 화장실로 세수를 하러 들어갔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몸도 찌푸듯해서 쉴 곳을 찾으러 가야겠다 싶어서 차를 움직였다. 조금 가 보니 캠핑하는 곳이 나타났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무실은 문을 열지 않았고 화장실을 들어가 보니 넓은 샤워실과 세탁실까지 함께 있었다. 일단 양치하고 샤워를 한 후에 밥솥을 꽂아 어제 해 놓은 밥을 따뜻하게 덥혔다. 천재에게 샤워를 하게 한 후 공원 산책을 했다.
아침에 샤워실에서 만났던 서양인이 자기 차를 정리하고 있길래 멋있는 차라고 칭찬을 했더니, 40만불이나 주고 산 1인용 캠핑카인데, 작년에 11개월간 호주 여행을 했고, 이번에는 9개월간 여행을 한다고 한다. 자기는 독일인으로 이곳에 이민을 와서 살고 있는데, 독일에 비해 규율이 엄격하지 않아서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침나절 30분 이상을 그와 수다를 떨었다. 49살의 그는 혼자 여행하는 것이 심심했던지 계속해서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다 아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재미있었다. 가족도 없이 외롭게 여행하는 그에 비해서 무일은 참 행복하다. 비록 숙소도 없이 차에서 기거하고 있지만.
에얼리비치로 향했다. 약 25키로 떨어진 곳인데, 아름다운 곳이고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고 하니 좋은 휴양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변 마을은 축제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장식이 화려하다. 멋진 옷을 차려입은 가족이 노래와 연주를 들려 주는데 보기에 좋았다. 해변가에 모래 조각을 해 놓은 곳에 바로 식사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산호초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에얼리 비치가 맞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데, 향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거푸 두 대나 피우더니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자리를 떴다. 다른 두 테이블에는 커피를 마시면서 독서를 하는 백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보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고 열심히 책을 읽는다. 맞다. 이런 곳에서는 멋있게 책을 읽으며 쉬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계속 몸으로 휴가를 즐긴다. 운전하고 밥하고 수영하고 걷고 쇼핑하고 하루 세끼 식사를 꼬박꼬박 하자니 정말 너무 바쁘다.
식사를 끝내고 차를 주차할 곳을 찾다가 무료 인터넷을 제공한다는 여행사를 발견했다. 들어갔더니 상냥한 아가씨가 각각의 아이디를 주는데, 30분 후에 자동으로 꺼지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서 다른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메일을 확인하고 그리미에게 한글 지원이 되지 않아서 영어로 답장을 쓴 후, 케언즈에서 멜버른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출력했다. 40센트라고 한다. 그래도 고맙지 뭐. 요트 세일링의 가격을 확인해 보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둘이 합해서 180불이니 그렇게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박 2일은 얼마인지 확인해 보고 케언즈에서 해야겠다.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여행사에서 상담을 받는 동안 사무실에서 날아다니던 앵무새가 뽀로록 천재의 어깨 위로 날아가 앉는다. 먹을 것을 준비하고 유혹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귀여운 짓을 하는지.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 평화롭고 여유있는 사람들이니 불안감을 주지 않아 새들도 사람들을 친구처럼 대하는 모양이다. 평화로운 마음이 이런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라군 - largoon - 이라는 것이 일종의 바다 풀인 모양이다. 깊이도 깊고 널찍한 것은 물론 풀 사이드에 야자수가 심어져 있어서 좋은 그늘을 제공한다. 풀의 바닥과 벽은 돌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채운 물은 정수시스템이 완벽하게 가동하고 있어서 물빛이 찬란하다. 2미터가 넘는 곳도 있어서 마치 바다에서 수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근사한 장소가 모든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마을의 독지가들이 시민들을 위해 건설비를 기부해서 지었다고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이런 것이 아닐까. 오랜만에 천재와 내가 찾던 그런 수영장이다. 정말 재미있게 실컷 수영을 했다.
쉬는 시간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왔다는 한국친구들을 4명이나 만났다.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하루에 약 10시간 정도 일하고 시간당 12불 정도를 받으니 한국의 왠만한 직장보다도 낫다고 한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그 돈으로 실컷 여행도 한다고 한다. 참 좋은 일이다. 물론 타국에서 단순한 육체노동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노동에 대한 대가가 한국 보다 훨씬 좋아서 기분이 괜찮다고 한다.
천재가 벌써 세계여행을 한다면서 부러워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들이 부럽다. 꽤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닌 모양이다. 한국에서 일자리도 얻기 어렵고, 일에 대한 대가가 너무 싸다 보니 이곳이 너무 좋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얻는 친구들이 많은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인 모양이다. 한국이 참 좋은 나라인데,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자체는 많이 왜곡되어 있다. 하루 빨리 살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야 할 텐데 말이다. 어쨌든 호주는 무엇이든지 풍족하고 깨끗해서 참 살기 좋은 나라다. 이민을 와서 단순하게 식품점이나 하고 청소나 하면서 살지 말고 좀 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드니를 벗어나니 백인들이 친절하고 다정하여 인종차별을 느낄 수 없었다.
정말 오랫동안 수영을 즐겼다. 주변에서는 기다란 백인 아가씨들이 정말로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태양 아래서 잠을 자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신기했다. 어떻게 저런 땡볕에 누워 있을 수 있는지 말이다. 한국 여학생들이 멋있는 서양 젊은이가 지나간다고 한다. 말을 걸어 보라고 했더니 쑥스러워서 못한다고 한다. 내가 그 친구를 불러 세워서 인사 소개를 시켰다. 영어가 시원찮아서 제대로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지 못했다. 영어가 조금만 더 자유롭다면 훨씬 편하게 말을 걸 수 있을 텐데, 영어도 잘하는 친구들이 왜 그렇게 쑥스러워 하는지 모르겠다.
생선튀김을 사서 - 다른 곳에서 90센트 하는 것이 이곳에서는 1.2불이나 된다 - 정박해 있는 요트들을 바라보며 근사한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아까 생각했던 것과 같이 책을 읽기로 했다. 사실 영어로 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집중이 안돼서 그냥 한글 번역본을 읽어 버렸다. 천재는 옆에서 열심히 필기체 연습을 한다. 무엇이라도 재미있게 하면 그것이 다 좋은 일이겠지.
책을 읽을 만큼 읽고, 오늘은 보웬에 가서 생선을 샀다. 생선 가게를 찾기가 어려웠지만 생선 필레 fillet(생선살만 잘라서 냉장 보관)를 사서 나무로 불을 때는 바비큐 플레이트에서 찌게를 끓였다. 하필이면 물을 충분히 가지고 오지 않아서 간신히 끓일 수 있었다. 새우도 함께 사서 같이 넣고 끓였는데, 그것이 아주 큰 성공이었다. 찬혁이는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최고의 맛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불도 시원치 않고, 모기들도 달려들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하며 어렵게 식사를 했는데, 워낙 맛있는 음식이어서 그랬는지 정말 잘 먹었다. 특히, 나무를 해다 준 백인에게 고맙다. 처음에 그에게 가스불을 빌리려고 했는데, 없다고 하면서 나무를 때서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내가 제대로 나무를 구하지 못하니까 두 번이나 나무를 해 주었다. 떠나면서 그에게 특별한 감사를 했다.
밥을 먹자마자 타운즈빌로 향했다. 퀸즈랜드에서 꽤 큰 도시라고 한다. 200키로가 남았으니까 10시 반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꽤 힘든 여정이다. 오늘은 천재와 하루 종일 노느라고 피곤이 몰려 온다. 천재는 벌써 곯아 떨어져 있다. 타운즈빌은 생각 보다 큰 도시라서 도착하고 나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할 수 없이 다시 맥카페를 찾아가서 잠을 자기로 하고 서울로 전화를 했다. 반가운 목소리가 실려 오는데, 이런 저런 메시지가 많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높아져 웃통까지 벗어 던지고 간간이 에어컨을 켜고 자는데도, 아스팔트 위의 잠은 너무 덥다. 여행이 끝나고 가장 아쉬웠던 일이 천국같은 에얼리 비치에서 며칠 더 머물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주 전국을 뒤져도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해변이 있을까 싶었다. 최소한 2주 동안 돌아다닌 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다웠다. 다음 여행은 이곳에서 최소한 사흘은 머물러야겠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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