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보니 말보로는 유난히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도 마을의 박물관이 있었다. 금광과 옥석 광산이 있어서 만들어진 마을인데, 지금은 사탕수수를 운반하는 중간 기차역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은 마을에도 풀장이 딸린 공원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화장실에 들어 갔더니, 이곳의 화장지를 집어가시는 분은 자원봉사자들과 다음에 오는 사람, 그리고 자신에 대해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참 정겨운 느낌이었다. 역시 이곳에도 바비큐 판이 있었는데,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나뭇가지는 주위에 널려 있었다. 그냥 주워다가 밑불로 종이를 태워 넣었더니 금방 불이 붙는다.
오늘 아침은 라면 하나를 끓여 밥에 말아 먹기로 했다. 우리가 밥상을 차리자마자 예쁜 앵무새들이 마치 아는 사이인 것처럼 식탁으로 모여든다. 만일 똥만 싸지 않았다면 같이 식사를 했을 것이다. 예쁘게 생긴 아이들이 교양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록햄프턴 강가의 바비큐 플레이스에도 수많은 새들이 시끄러워서 불안할 정도로 놀며 싸우고 있었는데, 이곳은 좀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새들이 나무 가지마다 앉아 있다. 이방인인 우리에게 전혀 경계심이 없다. 오직 개 한 마리만이 나를 향해 짖다가 주인에게 혼이 난다. 모두들 너무 평화롭다. 한 시간 가까이 식사를 준비하고 끝내는 동안 지나는 사람도 적었고 아무도 우리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동양인인 우리가 이곳에서 왜 식사를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할만도 한데, 그냥 그렇게 힐끗 보고 지나들 간다. 아마 눈이 제대로 마주치고 시간이 좀 있었다면 인사까지 건네 왔을 것이다.
말보로를 떠나 맥케이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열시 삼분이 넘으니 사리나라는 도시가 들어오고 바로 앞이 골프장이란다. 일단 골프를 치면서 식사와 샤워를 하자고 했더닌 천재도 좋다고 한다. 이곳은 그린피도 십육불로 비싸고 그린 관리도 잘 되어 있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용객이 적다보니 적절한 투자를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일곱 번째 홀을 돌다가 놀래 자빠질 뻔 했다. 역시 제대로 맞아 주지 않는 공 때문에 마음 속에서 화가 날 대로 나 있었고, 공도 마지막 하나의 공으로 어렵게 플레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늘 속에서 왠 커다란 짐승들이 나타났다. 아니 이거는 또 뭐야. 캥거루였다. 불과 삼미터 앞에서 캥거루 부부가 앞발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덩치가 큰 암컷은 새끼를 배속에 집어넣고 있는지 발 네 개만 달랑 보이는 배를 내밀고 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난데없는 이 동물들의 출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는 새에게 공격 당하고 오늘은 또 캥거루. 참 똑똑해 보이는 눈동자를 가진 동물이었다.
천재를 데리고 사진을 찍기 위해 캉가루들에게 다가갔다. 주인아저씨에게 물으니 온통 캥거루 투성이란다. 헤치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구경하란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아까와는 달리 경계심을 보이며 물러선다. 생긴 모습도 귀엽지만 뛰는 모습도 귀엽다. 네 마리나 되는 캥거루가 서로 서로 경계를 서며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그리 멀리 가지 않는다. 이번에는 한 발씩 천천히 다가가기로 했다. 아까 보다는 훨씬 가까워졌으나 그래도 한 오미터는 되는 것 같다. 아 사진기만 좋았다면. 이제 우리의 관심이 피곤한지 저 멀리 호수가로 피신을 가는데 정말 빠르다. 순식간에 이동해 버린다. 아쉽지만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마지막 홀을 힘겹게 마치고 들어오는데, 캥거루 신사가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내 눈을 함께 응시한다. 참 아름다운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샤워를 하고, 밥을 새로 한 다음에 해변으로 가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사리나 비치로 향했다. 관광안내소에서 독이 있는 해파리들이 나타나니 사람 없는 곳에서는 해수욕을 하지 말란다. 차라리 낚시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길래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해수욕은 주의하라고 한다. 해변은 맑고 깨끗했으며, 파도도 그리 높지 않았는데, 아무도 노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인명구조원도 없는 것이 수영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식사만 하고 맥케이 해변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흑인들 몇몇이 모여서 이야기 하길래 해파리에 대해서 물으니 아직은 괜찮을 것이라고 보지만 수영은 맥케이에 가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껄렁해 보이는 외모에도 답변 만큼은 친절하게 해 준다. 이렇게 많은 흑인과는 처음 대화를 해 본다.
맥케이 관광안내소에 도착했더니 젊은 아가씨는 백인 남자에게 안내를 하고 있었고 할아버지 한 분이 내게 다가오더니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브로큰 리버에서 오리 너구리를 보고 가란다. 이곳으로부터 칠, 팔십키로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숲도 아름다우므로 꼭 다녀 오란다. 맛있는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들도 안내해 주신다. 참으로 친절한 모습이 감동적이다. 되지도 않는 내 영어를 끝까지 들어 주시고 교정까지 해 주시니 고맙다. 일단, 시내 구경을 먼저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카레를 해 먹기 위해 쇼핑센터도 가기로 했다. 이 도시 엄청나게 크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깨끗한 해변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더니 허풍이 아니었나 보다. 그 많은 모텔들이 거의 빈방이 없었고, 거대한 쇼핑 몰에는 차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깨끗하고 큰도시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쇼핑을 하고 다시 관광안내소로 돌아왔다. 이곳에 공원이 이웃해 있어 깨끗한 바비큐 판이 있었고, 전화, 화장실 등이 다 갖춰져 있어서 잠을 자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천재는 감자를 다듬고 내가 카레 준비를 했다.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음식이 완성될까 걱정했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카레가 완성되었다. 모기 때문에 야외에서 식사가 불가능할 것 같아 처음으로 차 안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다행히 카레이기 때문에 다른 반찬이 필요가 없어서 맛있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는 라면박스를 들고, 천재는 단소와 영어공책을 들고 공원벤치로 갔다. 오랜 만에 실컷 장구를 두들겼다. 거의 두 달 만에 장구채를 잡으니 손이 떨려서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데로 좀 두들겨야겠다. 천재는 배가 너무 불러서 단소를 못 불겠다고 한다. 그 대신에 영문 필기체 연습을 하겠다고 한다. 시원한 벤치에서 한 사람은 장구치고 한 사람은 공부를 하고, 참 멋있는 풍경인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새들만이 우리의 공연을 즐기고 있다. 아마도 빨리 끝내고 잠 좀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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