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부러운 일은, 이렇게 살면서도 또 부러운 일이 있다는 것이 욕심 사나운 일이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즐거워하면서 필요한 물질을 얻을 수 있고, 게다가 책까지 내어 정신의 출산물을 내어놓는 일이다. 좋다. 스스로 평가하건데, 무일의 글은 시처럼 부드럽게 흐르고 동화처럼 편안하며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삶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삶과 글로 물질을 얻거나 책을 얻지를 못하여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아쉽기는 하다.
짧은 앙코르 여행으로 한 권의 책을 펴낼 수 있는 저자에게 무한한 질투를 느낀다. 한참 연배인 듯한 그의 글에서 깊은 공감을 느끼니 더욱 그렇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하게 풀어낼 수 있는데도 어떤 사람은 책을 내고 어떤 사람은 책을 낼 수 없을까. 흠. 멀리서 들었다는 아름다운 음악소리. 그것이 정답일까. 천재는 언제나 뒤늦게 평가받는 것이다.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닉 뽀안에서의 아쉬운 마음에 음악이 흘러 들어온다. 조금은 애처롭기도 하고 귀에 거스르기도 한 그런 음색이다. (중략) 단지 적선을 구하기 위한 연주인가? 사실 솔직히 표현하면 뮤지션이라기보단 건달패 같은 느낌이다. (중략) 그들의 음악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주 작게, 들릴 듯 말 듯 할 때 불현듯 숲에서 참 아름다운 음악이 들린다고 생각했다."
도시인이면서도 도시를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은 왜일까. 홍은택은 도시를 사랑한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게 할 수 있는 곳이라서 그럴 것이다. 사람을 지배하고 설득하고 통솔하고 등등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이 그득한데, 지배는 마음이 꺼려서 할 수가 없고, 설득은 불가능하고, 통솔은 권력을 받지 못해 또한 꿈일 뿐이다. 도시를 사랑하지만 도시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이런 모든 것이 가능하다.
"씨엠립에서 앙코르와트를 중심으로 한 유적지 군. 다시 말해서 앙코르 톰, 바이욘, 바푸온, 타프롬 등은 대개 13km 내외의 거리에 있는데 이 지역의 길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중략) 차를 세우고 내렸다. 잠시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차를 타고 휙 지나가 버리는 것은 나그네의 덕목이 아니다. (중략) 멀리서 스님 한 분이 걸어오고 있다. 나는 가고 그는 온다."
이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알고 있는 것이 덜 답답하기는 하겠지만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어떤 기여를 하게 될까. 필리핀에서는 초강력 태풍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선거의 수혜자가 자격도 없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이런 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는 것일까. 뒤틀린 심사 때문에 괜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어 본다. 누군가가 이런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면 편안하게 듣고 있기는 할 것이다. 지나고 나면 금방 잊혀질 것을 잘 알지만.
"바꽁은 피라미드 형식의 힌두 사원인데 이런 형식의 사원을 마운틴 템플이라 부른다. 산처럼 높게 기단을 쌓아 올린 형태와 힌두 신화에 나오는 메루 산을 상징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 듯하다. 메루 산, 우주의 중심, 세상의 중심에 있는 산, 정상에 하늘의 신이자 번개의 신인 인드라가 지배하고 있는 신들의 세상. 불교에서 수미산이라고 부른다. 같은 산이다. 불국정토가 있는 땅을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수메르라고 하는데 이것이 수미로 음역된 것이다."
사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관심이 더 가는 부분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끊임없이 사람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솟아나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거짓되고 폭력적이며 광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저들은 인간이 아닐까. 그래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이 많다고 하지 않는가.
"열 댓 살쯤 먹은 사내아이들이 그늘에서 책을 보고 있다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말을 걸었다. (중략)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다. 영어로 된 유적 안내 책자를 한 권씩 가지고 있다. 밑줄까지 그어가며 딸딸 왼 흔적이 보인다. (중략) 가이드는 선망의 대상이다. 가이드 시험에 합격을 하면 삶이 달라진다. 하루 일당이 30불 정도 되니 다른 어떤 직업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걱정했던 일이다. 중국이나 일본, 아시아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숙한 불교문화권을 돌아다니는 일이다. 그렇게 새롭지가 않다. 게다가 앙코르왓은 최소한 삼일 이상을 비슷한 유적을 돌아다니는 일이다. 과연 지루하지 않게 새롭고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거대한 규모와 정교한 부조들이 또는 폐허들이 적당하게 그 지루함을 달래주기는 하는 모양이다.
"앙코르에서도 며칠 사이에 여러 개의 사원들을 구경하다 보면 누구라도 돌에 질려 버리고 만다. 이렇게 질린 눈이 따프롬에선 이상하게 신선하다. (중략) 따프롬은 방문객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제외하고 발견 당시 그대로의 모습이다. 자연에 의해 무너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복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탑 위에 뿌리내린 뱅골 보리수가 백년쯤 자라다 벼락을 맞아 쓰러졌다. 탐도 함께 무너진다. 열대 무화과나무 뿌리가 담벼락을 뚫고 뻗어 내렸다. (중략) 이유가 뭐든 복원하지 않은 유적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이곳이야말로 천년 세월 기록이 문자가 아닌 사실로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여행기를 읽으면서 진한 감동을 많이 느껴서 자주 읽고는 한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유적들을 돌아보는 여행기는 유적을 소개하고 신화를 전달하는 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에피소드가 없으니 진한 감동을 받을 수는 없다. 재미있는 여행기가 되려면 황량한 곳에서 최고의 미소와 친절을 만나거나 아름다운 곳에서 극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 여행자가 정말 지루하거나 괴로워야 신나는 여행기나 탄생할 수 있다. 앙코르 여행기는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가볍게 합장을 하고 나니 이번엔 팔이 넷 달린 부처다. 아니다. 힌두 최고의 신 중 하나인 비슈누이다. 비로소 신의 나라에 온 것을 실감한다. 비슈누는 넓은 우주를 관장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화신(abatar)으로 등장한다. 부처도 그 화신 중 하나라고 힌두 사람들은 생각한다."
총 240쪽에 적당한 글과 사진이 배열된 이 책을 읽으며 여행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연배가 살짝 위이고 2002년에 여행한 기록이니 십 년의 간극이 벌어져 있있지만, 놀랍게도 앙코르 입장권 가격은 그 때와 동일하다.
앙코르에는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몸뚱아리가 확장된 것들이 신화의 영물들로 표현되어 있다. 제3의 눈을 가진 창조와 파괴의 신 시바, 네 개의 팔을 가진 힌두교 최고의 신 비슈누, 날개가 달려서 하늘을 나는 코끼리, 3개의 머리를 가진 코끼리,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말, 부채처럼 펼쳐진 7개의 머리를 가진 뱀 나가 등등. 이렇게 주욱 모아놓고 나니 주로 머리가 많다. 머리가 많으면 매우 피곤할 것 같은데 오히려 영물로 여기고 있으니 어떻게 된 걸까. 덜떨어진 머리로 세상을 잘못 휘두르지 말고 머리 모아서 일을 하면 된다라는 조상들의 지혜가 신화로 바뀐 것이라고 생각한다. 굳어진 머리를 가지고 리더라고 앉아 큰소리 치고 있는 한심한 사람들은 꼭 앙코르를 다녀와야겠다. 굳어진 머리들이 머리 많은 것을 보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겠지.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앙코르를 꼭 보고 싶다는 열망은 있지만 활활 불타오르지를 못하고 있다. 무엇인가 빠져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찾을 수가 없다. 아직까지는.
- 앙코르기행, 글 사진 심인보 / 새로운사람들(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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