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는 다가오는데 아직까지도 여행의 흥분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 호텔에 묵을까 비행기를 탈까 말까만 계속 고민하고 있다. 돈끼호테를 반납하고 태국여행기를 찾다가 '방콕여행자'를 만났다. 음, 제법 재미있겠다. 15년 동안 매년 태국을 여행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아무리 직업이 여행 작가라고 해도 이렇게 자주 여행할 수 있으려면 무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태사랑 사이트에서 읽은 방콕 여행기의 핵심은 싸고 맛있는 태국 음식과 사기다. 우주신이라면 모를까 음식에 대해 크게 집착하지 않는 무일로서는 더욱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곳이다. 충분하게 먹는 것은 좋아한다. 박준은 수많은 갤러리와 카페와 사람들의 예를 들어가며 방콕을 이야기한다. 커피숍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대부분의 방콕 사람들이 이렇다고 한다면 정말 대단할 것이다. 그런데 우연일 수도 있다. 끊임없이 한 건 하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태국 사람들에게 정말 이런 여유와 관용이 있기는 한 것일까. 꼭 확인해 보아야겠다.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은 분명하다. 어린 아이가 매일 뛰어다녀도 천재와 우주신이 피아노를 꽝꽝 쳐대도 특별히 항의하는 사람이 없는 우리 아파트도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대부분은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다투거나 괴로워한다. 방콕에서 그도 이런 특별한 예외를 본 것은 아닐까.
"편의점 앞에는 종종 노점이나 리어카가 잔뜩 진을 치고 있다. 편의점을 드나드는 게 불편할 정도다. 편의점 앞에서 라면을 파는 것도 모자라 편의점 입구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그런데도 편의점 주인은 '왜 남의 가게 앞을 가로막고 장사를 방해하느냐?' 하고 호통치지 않는다. 집 근처에 단골 식당이 있다. 저녁을 먹는데 과자 바구니를 든 사람(한국식으로 말하면 잡상인)이 들어와 손님들에게 과자를 내민다. 그런데 식당을 한 바퀴 돌아 나가는 잡상인에게 여주인이 '안녕히 가세요'하고 허리 숙여 인사한다. 방콕 사람들, 참 우아하지 않은가?"
돈은 얼마를 벌어야 할까. 10년 전 쯤에 5억 만들기가 유행하더니 조금 지나니까 금방 10억 만들기로 바뀌었다.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기준이 그렇게 되었다. 방콕에서의 삶에서는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는 모양이다. 억대가 넘는 외제차를 여러 대 굴리면서 수영장이 있는 저택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방콕도 마찬가지다. 많은 서민들은 조금 벌고 조금 쓰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하니 다행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 작은 돈조차 제대로 벌지 못하는 극빈층들도 있기는 하지만 먹을 것이 풍요롭고 땅이 넓은 나라이니 모두가 여유로운 모양이다.
"옐로 서브머린의 커피는 단돈 35밧, 1300원 정도다. 그런데 내가 네다섯 번 여기 올 때마다 본 손님을 전부 합쳐도 열명이 채 안된다.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받아 월세 내고 유지를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따는 이 건물 전체를 다 쓰고 있다. 커피숍으로 1층, 서재로 2층, 침실로 3층을 쓴다. (중략/월세는) 한국 돈으로 30만원 정도다"
아이들 이름을 지을 때 한참 유행했던 것처럼 우리말 이름으로 지으려 했다. 그런데 박이라는 성 뒤에 좋은 의미와 어감을 갖는 이름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리고 이름은 지어주는 사람이 정성을 기울인만큼 의미와 상징이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결국은 한자로 된 이름을 짓게 되었다. 태국사람들도 이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모양이다. 방콕의 원지명은 무한히 길고 천사(텝)의 도시(끄룽)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방콕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 태국사람 이름을 기억하기란 매우 어렵다. 일단 길고 발음하기도 어렵다. 대신 태국 사람은 모두 '츠렌'이라 부르는 닉네임을 가졌다. (중략) '쪼'는 갱커루, '보우'는 볼링, '깨우'는 유리잔, '꼽'은 개구리, '따'는 뚱뚱한, '헌'은 비행하다 (중략) 그럼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실에서 출석을 부르면 이렇게 되는 걸까? '캥거루! 볼링! 유리잔! 개구리!게! 거북이! 문어! 해야 한다! 영국!"
방콕은 여전히 매춘이 성행하는 모양이다. 군사정권이 아주 쉽게 돈벌이를 하는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이 매춘이다. 태국은 1932년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무려 60년 동안 군부가 무력으로 통치하는 나라였다. 권력만을 탐하는 정치군인들은 도덕성이 결여되었기에, 저 먼 가난한 산골에서 올라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젊은 처녀들을 같은 시민으로 보호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즐기고 돈을 버는 서비스 산업으로 생각할 뿐이다. 미군에게 몸을 팔아야 했던 한국의 양공주들이나 일본 관광객들에게 쾌락을 주어야 했던 기생들의 운명처럼 말이다. 개인이 매춘이 추하다고 생각하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정부는 매춘으로 가난한 삶을 벗어나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방법을 마련해 주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정책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태국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리사욕과 패거리 의식에 사로잡힌 군사문화의 잔재가 독버섯처럼 계속해서 자라고 있다. 관광의 한 분야로서 매춘사업이 존재할 수는 없으며, 관광산업은 자연과 문화만으로 충분해야 할 것이다. 그녀들이 기도하며 덜 상처받으며 살기를 바랄 뿐이다.
"수쿰윗 나나 근처 '테메 커피숍'은 몸을 사고 파는 시장이다. 밤이 깊어지면 수십 명의 여자아이가 모여든다. 아이들은 지하 1층의 테메로 들어가기 전에 건물 앞 제단에 서서 향을 피우고, 고개를 숙이고,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중략) 아이들이 기도하고 간 제단의 물건이 눈에 띈다. 다채롭다. 빨간색 환타, 하이네켄, 타이거 맥주, 오렌지 주스 그리고 맥도날드 햄버거까지"
적당하게 벌었으면 적게 벌면서도 삶의 자유를 누리고, 한 권의 책을 읽듯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다면 인간으로서 행복한 일이다. 22년의 직장생활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어서 참 좋았으나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다. 농부로 전업을 했으니 이제 더 부유해지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심하게 곤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농부로서 필요한 기술과 일머리가 잡히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몇 년의 경험과 공부도 필요할 것이고 힘든 일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로울 것이다. 방콕의 사람들이 그것도 젊은 사람들이 일과 놀이를 통합하는 자유스러운 생활을 누린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이다. 22년을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소모하면서, 새로운 삶을 위해 10년을 준비했으며, 직업을 바꾸는 큰 용기를 내었는데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는 무일도 있는데.
"혼자 일하는 주인 남자는 매우 잘 생겼다. (중략) 정치학을 공부했고, 방콕의 세계 은행에서 일하다 10년 전 사표를 냈다. (중략)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 고민이 되더라고. 왠지 서점일이 그런 일이 아닐까 싶었어' (중략) 눔은 서점을 하면서도 1년씩 여행을 한다. 가만히 보니 친구들도 끊임없이 찾아온다. 눔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커피를 마시며 일을 한다. 일을 하는 건지 노는 건지 구분이 안된다."
책은 다 읽었는데도 싸고 맛있는 것 이외의 새로운 어떤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어쩌면 많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과연 수많은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는 방콕의 매력일까라는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는 방콕의 매력을 정리해 보자.
결코 좌절하지 않는 그들의 여유로운 마음이다. 약대를 졸업하고 어렵게 차린 약국을 단 며칠 만에 홍수로 큰 피해를 입고도 그 앞에서 V자를 그리며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약사. 그녀 뿐만 아니라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방콕 사람들이 담담하게 최악은 아니라고 위로하며 고비를 넘겨낸다. 9년 동안 고생해서 모은 돈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든, 20년 동안 리어카로 짐을 날랐는데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어도, 그들은 울고불고 하지 않고 인생을 즐겁게 무난하게 살아낸다고 한다.
쉽게 항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대한 마음이다. 음식점에서 기대 이하의 음식이 나와도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태국 사람들은 쉽게 항의하지를 못한다고 한다.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과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뢰가 없어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민주당(노란옷)과 탁신파(빨간옷)의 정치 대립이나 남북의 지역 분열이 생기고 있는 태국이지만 이런 넓은 마음과 신뢰가 뒷받침되어 있다면 오랜 암흑기에서 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많은 것을 가진 여행자가 사기를 당해서 피해를 보는 것은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다 못해 교통 범칙금까지도 사정 설명을 하면 깎아 주는 것이 방콕이라고 하니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강한 사람들인가. 그것을 매력이라 생각하고 배우고 실천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일 것이다. 여행 중에 사기나 소매치기를 당하더라도 이런 베푸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을 벗어던질 수 있으면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사기도 덜 당하게 될 것이다. 터키에서 이미 한 번 경험했으니까 말이다.
책을 읽는 하루 동안 즐거웠다. 몇 개의 갤러리와 카페는 여행 중에 찾아가 볼 계획이다. 특히 태국 왕실 팬클럽에서 후원한다는 파야타이 궁전 안의 노라싱하카페는 숙소에서 가까울 것으로 예상된다.
- 방콕여행자 / 삼성출판사(2012년) / 박준
'사는이야기 >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 평화로운 그것을 원한다_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0) | 2013.11.27 |
---|---|
열망은 있으나 불타오르지 않는다_앙코르기행 심인보 (0) | 2013.11.24 |
미치광이가 추구하는 것, 정의_돈 키호떼, 세르반테스_131020 일 (0) | 2013.10.20 |
평화로운 삶은 좋지 않다_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 노동효 (0) | 2013.10.06 |
노예들이 없다면 삶은 여유로울 수 없다_스파르타쿠스 / 하워드 패스트 (0) | 2013.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