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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아름다운 한반도 여행

가을 여행, 맑디 맑은 여행_131003, 목

시월이다. 

하늘이 아름답다.

마침 연휴라고 하기에 그리미와 집을 나섰다.

역사의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땅이지만,

잘못된 교육의 탓이니 어쩌겠는가.


대관령 휴게소로 간다.

아침 6시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눈이 떠지지 않아서

6시 반이 되어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고양이 세수로 눈꼽만 떼고 7시가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너무 늦어서 길이 심하게 밀릴 것을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적당하게 밀려주었다.

10시 반이 되어서 대관령 마을 휴게소에 도착했다.

많은 차들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바람의 언덕'에서 아침 겸 점심으로 황태해장국을 한 그릇씩 먹었다.

특별하지 않았지만 깔끔하게 먹을 수 있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조미료로 맛을 낸 음식은 아닌 것이 틀림없다.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들은 양떼목장으로 향하고,

등산복 잘 갖춰 입은 가족들은 바우길로 향한다.


우리는 청바지 입고 양떼목장 가는 길로 들어섰다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아서 되돌아서서 등산로로 향했다.


계획은 대관령 옛길을 따라 반정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무일이 수정제안을 했다.

대관령박물관까지 끝까지 가서 그곳에서 차 얻어 타고 되돌아 오자.

동의를 얻지 못했다.


가을 기운이 물씬 넘쳐서 공기는 서늘하고 하늘은 맑았다.

묘하게도 이곳 등산로는 흙바닥이 온통 진창이다.

어디서 그렇게 물이 솟아나는지 편하게 경치구경하며 산길을 오를 수 없었다.


작은 오솔길을 산책하듯이 걷다 보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크게 원하는 것 없이 두 다리로 이렇게 산길을 걷는다는 것으로 행복하다.

평생 좋은 벗인 그리미와 함께 하니 더욱 좋다.


이번 산책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 준 또 하나는 바로 각시투구꽃.

요즘이 한창인 모양인지 그다지 꽃이 많지 않은 산길에

보라색으로 독특하게 핀 것이 큰 즐거움을 주었다.




백두대간 선자령으로 오르는 길로 돌려 잡았다. 

반정으로 가게 되면 돌아오는 차편이 없으니 간 길을 그대로 되돌아 와야 한다.

선자령으로 가는 길은 중간에 목장을 두고 빙돌아서 돌아올 수 있는

순환등산로로 구성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이다.


가을 하늘이 너무 맑아서인지 저 멀리 강릉 앞바다는 뿌옇다.

여름 동안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가을 바다도 수평선을 시원하게 바라보기 어려운 것인가?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고작 세 시간 만에 허기가 온다.

싱싱한 포도와 맥주 한 병, 초코볼로 멀리 산과 초원을 바라보며 지친 몸을 달랜다. 

여름이었으면 온통 찐득하게 녹아있을 초코볼이

선선한 날씨에 방금 병속에서 꺼낸 것처럼 고소하게 바스락거린다.


거실을 빈둥대다가 포도 한 송이를 먹으려면 반쯤은 말려서 간신히 먹었을텐데,

산을 오르고 땀을 흘리고 나서 먹었더니

맥주 한 병과 함께 달디달게 몸으로 흡수된다.

크로아상도 두 개 가져왔는데,

혹시 내려가는 길에 배가 고플 수도 있으니 아껴두기로 한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소리도 처음에는 신기해서 귀를 기울였다.

거대한 세 개의 날개가 윙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데,

초원 위에는 마치 내려치는 듯한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날아온다.

몇 번이나 움찔움찔 그림자를 피해야 했다.


선자령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오늘도 이러니 벌써 수십 만명, 수백 만명이 이곳을 다녀갔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처음이다.

세상 어디를 가도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없다.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도 오스트리아 산속의 캠핑장이나

뉴질랜드 빙하 마을의 B&B와 같이 작은 장소 말고는

누군가 다녀간 곳을 다녀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여행이다.




내려오는 길은 작은 계곡이 끊임없이 흐른다.

이 높은 산에서부터 계곡이 흐를 정도니, 길은 여전히 습하다.

습한 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소나무와 전나무를 비롯한 온갖 상록수들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공기는

온 몸의 세포를 맑게 해 준다.


비틀비틀 두 시간 가까이 내려간다. 시간은 오후 네 시가 되어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끝없이 선자령을 향해 오르고 있다.

젊은 연인들의 빠른 걸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아이들을 앞세우고 가는 가족들의 지친 걸음은 가파른 고개 정상을 언제 오를까.

이제 곧 해가 질 것만 같아 괜히 걱정을 한다.




휴게소에 가득했던 차들은 오히려 더욱 많아졌다.

화장실에 길게 늘어선 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떼 목장과

바우길을 다녀갔는지 알 수 있게 했다.

뒷정리는 강릉휴게소에서 하기로 하고 얼른 차를 타고 횡계로 돌아갔다.


강릉 휴게소는 깨끗하고 사람도 적어서 잠깐 쉬기에 그만이었다.

관광안내소에서 안내책자를 뒤적여 오늘 저녁 묵을 숙소를 찾아보았다.

선교장에서 자고 싶다고 하기에 전화를 걸어 예약 상황을 물어보았다.

잠을 잘 수 없다고 한다.

다른 숙소는 딱히 가 보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냥 현장에 가서 알아 보기로 했다.


북강릉 톨게이트로 나가면서 바라 본 바다는 맑고 깨끗했다.

선자령 전망대에서 바라 본 바다는 뿌옇게 안개에 쌓여 실망스러웠는데,

막상 내려와서 바라보니 먼 바다가 시퍼렇게 눈과 가슴을 쓸어준다.

머리 속까지 새파랗게 비워주는 느낌이었다.

이렇다면 바다를 바라보며 잠을 자야겠다.



사천해수욕장에서 경포대를 향해서 달리는데 작은 호텔이 들어온다.

하루 밤에 5만원. 음, 좋은 가격이구나.

경포대 바로 앞의 대덕호수텔도 5만원에 잘 수 있다고 한다.

5층 객실에서는 동해 바다가 시원하게 창밖을 지켜주고 있다.

전망의 오른쪽 부분을 살짝 가리고 있는 건물 옥상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좋았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저녁식사를 위해 움직였다.

교동택지 지구에 가면 여러 음식점이 있어서 골라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차를 가지고 6km나 떨어져 있는 시내까지 갔는데,

음식점들은 제법 깨끗하고 맛이 있어 보였지만 독특한 느낌은 없었다.

고민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숙소 앞에서 그냥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차를 두고 다시 경포호 주변의 식당들을 둘러 보는데,

회집, 조개구이집이 대부분이다. 입맛이 당기지가 않는다.

두 번 세 번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 돌아다니다가 포기하고

그냥 돼지갈비나 먹자하고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막상 돼지갈비를 먹으려니 굽는 것이 귀찮아졌다.

그래서 양푼 비빕밥과 뚝배기불고기를 먹기로 했다.


오, 맛이 좋았다. 그래서 사진을 찍었다.


비빕밥은 특별한 무엇이 들어있지 않았는데도

깔끔한 나물과 버섯, 고추장으로 잘 비벼진데다가

시커먼 된장국이 구수하게 입맛을 돋궈 주었다.

뚝배기 불고기는 호주산 살코기로 요리를 해서 부드러우면서도

달지 않고 적절하게 양념을 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김치와 물김치도 얼마나 싱싱한 맛이 났던지

소주를 한 병 시켜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돼지갈비도 굽고 고추장 삼겹살도 먹는다.



후라이드 치킨을 배달시켜서 바다를 바라보며 누워서 먹기로 했다.

뿌듯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매점에서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사들고 들어왔다.

한참이나 걸려서 도착한 멕시칸 후라이드 치킨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안주 삼아 실컷 야식을 즐겼다.

치킨 조차도 고소하게 맛이 났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6시가 되어 간신히 눈을 떴다.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고개를 바다로 돌리고 바다를 바라 보았다.

멀리 수평선이 옅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배가 아파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도

해는 부지런히 깔끔하게 떠올랐다.

아주 사소한 오른쪽의 옥상이 떠오르는 그 해를 가리기는 했다.



해를 보고 잠시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가 커피를 타서

어제 먹다 남긴 치킨 네 조각과 산에서 아껴둔 크로아상으로 아침을 떼웠다.

상쾌하게 다시 샤워를 하고 해안길 산책을 시작하기로 했다.


두 대의 자전거를 차량 뒷좌석에 싣고 오면서도 

과연 저 자전거들을 제대로 탈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

게다가 타이어에 바람을 넣으려고 펌프를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다.


호수텔 사장님께 펌프를 빌려 무일의 자전거에는 무사히 바람을 넣었는데,

그리미의 오래된 자전거는 바람을 넣을 수가 없었다.

삼십분 이상을 씨름하면서도 포기가 되지 않아서

자전거를 끌고 경포호 주변에 있는 자전거 대여 가게로 가 보았다.

그곳에도 역시 바람을 넣을 기구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가 안되어서 또 다른 집을 갔다.

인상도 좋지 않고 태도도 좋지 않은 젊은 주인은

피고 있던 담배를 집어 던지며 펌프도 안 가지고 다니냐고 책망이다.

마치 귀찮은 파리 쫓듯이 딱히 거절하기도 어려웠던지

온갖 괴롭고 예의없는 몸짓과 손짓과 말로 경멸한다.


간신히 그 모멸을 참아내고 그리미의 자전거에 바람을 넣는데 성공했다.

바로 옆의 가게로 가서 담배 한 갑을 사서 그에게 주었다.

받지 않겠다고 한다.

뭐,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니 받아 달라고 했다.

매우 당황해 하는 그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담배를 내려놓고 가게를 떠났다.


그리미는 자전거가 두렵다고 한다.

뒤에서 안장을 잡아 주었더니 쉽게 올라타고 전진한다.

속도와 높이가 겁난다고 하면서 조금만 길이 구부러져도

차가 오고나 사람이 와도 야단이다.




경포대에서 주문진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다.

바람이 선선해서 걷기도 좋았지만,

자전거를 타며 오른쪽으로는 시원한 바다와 파도를 끊임없이 즐기고

왼쪽으로는 상점과 커피숍과 산들을 바라볼 수 있다.

중간 중간 소나무숲도 눈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다.


약간의 고개길이나 회전길에서도 두려움에 떨며 자전거를 세우는 그리미를

인내로 참아내며 천천히 주문진을 향해 간다.

그래도 워낙 길이 편안해서 금방 사천, 연곡을 지나친다.

영진항의 등대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무엇을 먹을까 한참을 돌아다녀도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다.

회집, 조개구이집, 고기집.

물회로 유명하다는 집들은 제쳐두고,

뒷골목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제법 들락거리는 순대국집이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아이들과 순대술국에 저녁을 먹었었는데.



맛있었다.

무일은 7천원하는 큰 순대국, 그리미는 6천원하는 작은 순대국.

양이 그리 작지 않았는데도 깔끔한 맛 때문에 그리미도 한 그릇을 거의 비웠다.

친절한 딸아이가 이리저리 다니며 음식을 나르는 것이 보기에도 좋았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자전거 타다 힘들면 먹으라고 누룽지까지 싸주신다.

고소한 맛처럼 고마운 일이다.




힘을 내어 주문진을 향해 간다.

벌써 두 시간 정도를 타고 났더니 어느새 자전거에 적응이 되었는지

달리는 속도도 빨라지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심지어 주문진 시장의 복잡한 길에서도 침착하게 앞만 보고 잘 헤쳐 나간다.


주문진 오징어 축제는 사람들로 붐빈다.

오징어도 5마리에 만원이라고 하니 최근 들어 가장 좋은 가격이다.

그런데, 이미 점심도 먹었고 포장해서 가려니 자전거에 싣고 가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돌아가자.

기념사진이나 한 장 남기고.




다시 되돌아 오는 길은 훨씬 수월했으나 마파람이 불어 속도는 떨어졌다.

워낙 안정되게 자전거를 타니 뒤따라가며 사진을 찍기도 좋았다.

사천 해수욕장의 송림 숲을 자전거를 끌고 걷기도 했다.

걷다가 타다가 자유자재로 즐길 수 있는 것이 자전거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외롭지도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길 수가 있었다.


농부들은 참 다양한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잘 익은 벼들을 낫으로 베어다가 길 가 울타리에도 널어 놓고,

송림숲에다가 줄을 매어 걸어놓기도 했다.

바닷 바람과 따가운 햇살, 소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가 더 맛있게 익혀줄 것 같기도 하다.


바다를 바라보는 카페에서 커피와 카페모카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경포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 긴 여정은 아니었지만, 왕복 50km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바람넣는 일 때문에 아침 시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사히 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어 자전거를 분해해 다시 차에 싣고 부천으로 출발했다.

오는 길 내내 지는 해가 얼굴을 따갑게 내리 쬐었다.

한 여름이라면 포기하고 어느 휴게소에서든 쉬었다 갔겠지만

가을 햇살은 그래도 견딜만 했다.


앞으로 이런 여행이 가능해졌다.

하루는 높은 산을 산책하듯 걷고,

또 하루는 드넓은 평야나 해안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것이다.


그리미는 남편의 소원을 들어 주느라

자기가 참 고생을 많이 하고 늙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뿌듯하고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한다.


여행은 즐거운 일이다.

가을 여행은 맑고 깨끗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