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집에서 잔 것처럼 편안하게 깊이 잠을 잤다. 8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의식이 돌아왔고, 9시가 넘어서야 샤워까지 마칠 수가 있었다. 이 호텔 너무 좋은데 뜨거운 물이 왔다 갔다 한다. 뜨거울 때는 너무 뜨겁다. 그래도 매일같이 뜨거운 물을 주고, 깨끗이 청소해 주시니 고맙다.
원래 호텔이 그런 거 아닌가?
그렇군.
오늘도 아름다운 아야 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한 번 돌아보고 여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멧 자미)로 간다. 겉모습은 참 웅장하다. 내부는 소박하다. 아무리 요란하게 칼리그라프를 꼬부려 놓았어도 그저 조용히 기도하는 카페트 깔린 공간에 불과하다. 의자도 제단도 없다. 성화도 성인들의 초상도 없다.
워낙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 오는지 처음으로 관광객들을 위한 별도의 루트로 들어가서 구경을 해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 게다가 마지막 입구가 너무 작아 우주신이 고개를 드니 머리가 천장에 닿아 버린다. 아이들은 뛰어 다니고 노인들은 벽에 기대어 졸고 있다. 후레쉬까지 터뜨리며 마구 사진을 찍는다. 볼까지 찔러가며 사진을 찍는다. 좋구만. 이러다가 이슬람교도 믿게 될 모양이다.
이런 평화로운 종교에서 어떻게 여자들을 그렇게 차별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하여튼 종교는 안식이면서 동시에 골칫거리다. 나중에 두바이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여자들의 힘이 외부에 발산되지 않을 뿐이지 가정 내에서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많은 가정에서 남자들은 여자들 손에 쥐어 산다고 하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인 모양이다.
*
넓직한 공원은 온통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고, 근사한 오벨리스크도 시원하게 푸른 하늘을 가르고 있다. 여유롭다. 트램길을 너머 돈두르마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 트램은 시내 한 복판을 지나고 있고, 속도가 아주 느린 편도 아닌데, 트램 주변에는 안전 철책조차 없다. 그 넓은 철길이 온통 사람들이 건너 다니는 횡단보도다. 타고 내리는 곳만 자동개찰구로 구획이 나눠져 있어서 트램의 전용공간이지 나머지 구간은 모두 사람들이 활용하고 있으니 매우 친인간적인 트램길이다.
쵸코케익 한 조각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아주 조금 사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즐기지 않아서 그런지 특별히 맛이 좋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공항에서 먹을 때 쫀득한 맛이 더 좋았다. 날이 따뜻해서 그런지 쵸코케익이 더 맛있다고 한다. 가격은 21리라.
얼마 안되는 아이스크림과 케익을 맛깔나게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잘 되지 않는다. 가족들 모두 너무 사진을 찍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 사진 찍기 힘들다. 힘들어도 재미는 있다. 그리고 집중력도 높아져 기억에도 더 남는다. 더 멋있는 것이 없을까 찾게도 되니 의외로 좋은 장면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아야 소피아 사진이 또 있네, 질리도록 찍었구만.
그랜드 바자르는 어떤 통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의 호객 행위가 없다. 어쩌다 한 번씩 살짝 다가와 익스큐즈미를 외칠 뿐이다. 삐끼에 익숙지 않은 우리 가족에게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여행을 올 때마다 가족들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은데, 이곳 터키는 크게 고민할 것이 없다. 터키쉬 디라이트와 차이잔이 선물로 눈에 확 들어오고, 이즈닉에서 본 목걸이용 펜던트나 귀걸이도 괜찮았다. 가격도 저렴하고 문양도 독특해서 이국적인 맛을 느낄 수 있고 실용적이다.
그랜드 바자르의 차이 잔들도 참 예쁘다. 선물로 그만한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 가족들이야 그렇지만 올해에는 꼭 인사를 해야 할 분들이 계신다. 푸짐한 할아버지가 150리라를 부른다. 70리라로 받았다. 바로 포장에 들어가신다. 그리미가 더 알아보자고 해서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거절을 했다. 매우 실망하시기에 등을 어루만져 드렸다. 터키에 와서 이렇게 실망스런 표정을 짓는 사람을 거의 처음 본 것같다.
이스탄불의 자미 투어에 앞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그리미의 스카프를 사러 들어갔다. 25리라를 부른다. 그냥 나왔다. 바로 앞에 꽤 큰 상점. 아까 보았던 스카프 보다 더 품질이 좋아보이는 스카프를 골랐다. 20리라라고 한다. 샀다.
그랜드 바자르를 막 빠져 나와 슐레이마니예 자미로 가는 길에 상점들이 꽤 많았다. 마침 예쁜 차이잔 셋트를 파는 곳이 있었다. 물어 보았다. 55리라다. 헛 저런. 쟁반 없는 것 두 개(개당 30리라)와 쟁반까지 갖춰진 풀셋트 한 개를 95리라에 샀다. 100리라 이하는 안된다고 하시는데, 90리라는 고집하는 그리미의 중간 선에서 결정을 한 것이다. 양쪽 다 3천원씩 양보한 것이다. 좋은 협상에 기분이 좋았다. 사장님도 아신다. 그랜드 바자르에서는 최소한 70리라는 받을 것이란다. 허허허.
포장해 놓으면 자미를 둘러보고 와서 가지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신다. 뭘 믿고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관광객들 등치는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이 갔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모두 만족할만한 가격에 정말 기념이 될 만한 차이잔 세트를 샀다. 오래도록 터키를 추억하며 사용해야겠다. 고량주잔으로도 훌륭해 보인다. 그나저나 부피가 꽤 되네. 유리라서 여행 중에 깨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랜드바자르는 경찰이나 군인들의 물품까지 없는 것 없이 다 파는 것을 보니까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이나 다름없다. 경찰 마네킹의 모습이 재미가 있어서 사진 한 장 찍으려고 했더니 지나가던 아저씨 무조건 같이 찍자고 하신다. 우리야 기쁘지요. 연락처를 받아 뒀어야 하는데, 사진 잘 나온 것 확인하더니 그냥 제 갈 길 바삐 가신다.
아무래도 외국인 관광객 만나면 우리도 적극 사진을 찍어줘야겠다.
꼰대 아저씨가 왜 이러시나 하면서 싫어할라나.
그릇가게를 나와 이제 골목만 돌면 슐레이마니예 자미다. 구두닦이 아자씨와 우주신이 마주치는 듯하더니 커다란 구두솔이 구두통에서 떨어진다. 어라, 무슨 일이지! 우주신이 당황해 하며 아저씨와 구두솔을 번갈아 보다가 할 수 없이 구두솔을 주워들려고 한다.
안 돼 ~
무일이 손을 잡아끌었다. 구두닦이 사기꾼이다.
터키 배낭여행 동호회의 사이트에서 읽은 내용이 기억났다. 구두닦이 아저씨가 관광객 앞으로 지나가다가 기다란 구둣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가는데, 이것을 주워 주면 고맙다는 성의 표시로 구두를 손질해 주겠다고 정중하게 접근한다. 유창한 영어로. 무료라고 생각하겠지만 구두에 솔을 대는 순간, 30에서 50리라를 요구한다고 한다. 재미있다. 역시 당하지 않고 이런 사기를 지켜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아무래도 새로운 등치기 방법을 개발해야 할 모양이다. 누가 좀 집어줘요, 내 구두솔.
그나저나 도대체 구두 닦는 데는 얼마나 할까? 터키를 떠나기 전에 꼭 닦아 보아야겠다.
슐레이마니예 자미로 들어가기 전에 무일도 그들처럼 깨끗한 물에 손발과 얼굴을 씻고 물도 마시면서 몸의 안팎을 정갈하게 했다. 사실 걷기가 하도 피곤해서 발바닥을 깨끗이 씻으면 피로도 풀릴 것같아서이기도 했다. 날도 좋고 정말 상쾌했다. 무일의 머리 위에 있는 구부러진 쇠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겉옷이나 가방을 걸어두는 걸이였다. 참, 잘 만들어 놓았다. 자미는 여행자의 휴식처다.
자미에서 자미로 이어지는 여행, 무일은 이미 지쳐서 무슨 자미인지도 모르고 천재와 그리미가 지도를 보고 안내하는 것에 따라 몸을 옮기며 사진기를 찍어댄다. 자미 안에서 유창한 영어로 아름다운 자미를 자랑하시는 분이 계셨다. 집요하게 따라 붙으며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선이 섞일 때마다 한 번씩 정말 아름다운 자미를 보러 온 것을 환영한다, 이 자미는 건축학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자미다, 원한다면 또 하나의 중요한 자미를 알려 주겠다 등등.
우리 네사람에게 함부로 무엇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경계심이 일어난다. 자미의 정원 한 쪽에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갈 길을 가신다. 그냥 안내를 받을 걸 그랬나. 아니다. 그분에게 폐를 끼칠 이유는 없다. 우리 가족을 맘 편하게 자미 내부를 볼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사람들이다.
1리라 하는 생오렌지 쥬스를 두 잔 사서 마셨다. 자몽이 살짝 섞여서 신맛은 있었지만 피로가 풀리는 개운한 맛이다. 악사라이역에서 다시 트램을 타고 에미뇨뉴로 갔다. 갈라타 다리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배가 살짝 고파서 어제 그 집으로 다시 고등어 케밥을 먹으러 갔다. 제2 무스타파가 너무 반가워해 준다. 이번에는 우주신과 팔씨름을 하자고 한다. 힘 좋다. 오늘도 맛있게 먹었다. 역시 고등어 케밥은 겨울이 제격인 모양이다. 실컷 환대를 받으며, 웃으며 먹었더니 소화도 잘 된다. 따뜻하다.
갈라타 다리의 사람들은 아이에서 할아버지까지 다양하게 낚시를 하고 있다. 그저 재미로 하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제법 많은 양을 잡아서 팔기도 하는 모양이다. 굵직한 송어를 잡으신 분들도 있다. 모두들 카메라를 들이대면 신나게 즐거워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이곳에서도 인기다. 갈라타 다리를 다 지나서 트램을 타고 집으로 가려 했는데, 데이트 중인 이 청년 갑자기 아이들과 사진을 찍겠다고 한다. 여자 친구와 무일이 사진사가 되어서 유쾌하게 사진을 찍었다. 여자 친구와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찍지 않겠다고 한다. 실망이 크다.
세월을 낚되,
이런 표정으로 -
세 정거장에 불과하지만 너무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다. 갈라타 역에서 다시 술탄 아흐멧까지 트램을 탔다. 전기구이 통닭을 샀다. 빵도 넣어 주시고 감자튀김도 챙겨 주신다. 18리라. 생각 보다 비쌌지만 저녁 반찬으로 최고다. 미소 된장국에 포도주(13.5도, 25리라)까지 또 뻑적지근하게 만찬을 즐겼다.
이번 여행에서는 한 번도 김치를 먹고 싶다거나 한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콤한 고추가 있어서 국을 끓이거나 반찬으로 먹을 수 있었고, 냄새나지 않는 된장 소스가 있어서인 모양이다. 게다가 터키의 고춧가루는 모든 식당에 비치되어 있어서 살짝 뿌려 먹어도 좋고, 많이 뿌려도 살짝 매운 정도여서 음식에 대한 어려움이 없었다. 야경을 보러가야 할 텐데. 어쩌나.
그리미는 어떻게 하면 짐을 꾸릴까 고민을 하더니 뚝딱뚝딱 큰 가방으로 짐을 하나 꾸려서 그리스로 날아가는 우리의 짐을 확 줄여 놓았다. 선물로 산 차이잔과 큰 가방 하나는 호텔에 남겨 두기로 했다. 짐을 다 싸고 일기를 쓰는 듯하더니 금방 세액~색 모로 누워 잠이 든다.
한 잠 자고 깨어나서 온 몸이 쑤신다고 한다. 천재와 무일이 달라붙어 온 몸을 마사지해 주고 아주 약한 종합 감기약 한 알을 먹였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이다. 이제 겨우 9시 반이다. 호텔 테라스로 올라가 밤의 아야 소피아를 찍고 불 켜진 보스포러스 해협도 눈에 담고 내려왔다.
제법 바람이 차고, 하늘은 여전히 은하수를 감추고 있다. 속옷과 양말을 빨아서 수건에 말아 짜라고 했다. 빨래를 짜면서 힘자랑을 한다. 상대편이 힘을 줘 돌릴때 잡고 있는 사람의 손이 돌아가거나 수건을 놓치면 지는 게임. 다 큰 놈들이 그거 하나 하면서 웃고 난리다.
재미있나,
내일은 나도 해볼까?
지난 3일 동안 쓰지 못한 일기를 쓰는데, 벌써 가물가물 기억이 잘 나지를 않는다. 아마도 사진을 좀 봐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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