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라서 일어났다. 그리미와 무일은 밤새 약간 떨면서 잤다. 여행 이후 처음으로 12시가 넘어 잤는데 푹 자지를 못해 아쉽다. 다행이 그리 피곤하지는 않다. 항의를 하고 사과는 받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돈을 내고 떨며 자기는 싫어서 떠나고 싶어졌다. 떠나자 떠나자. 아니다, 일단 냉정을 찾자. 쿠샤다스로 숙소를 옮길 경우에는 이 근처까지 왔다 갔다 하며 추가로 발생할 50리라 이상의 교통비가 문제가 될 것이다. 숙소를 구하기 위한 시간이 1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며, 실제로 생활해 보기 전까지는 확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짐을 싸서 들고 다시 이동하는 시간과 노력도 문제다. 그러면 일단 아침 식사의 상태도 확인해 보고 에페스 투어를 끝내고 나서도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면 떠나기로 하고 호텔 쪽에 통보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히팅 장비도 점검해 달라고 했다. LG 상표가 선명히 붙어있는 시원찮은 히팅기. 점검해 보더니 역시 문제가 없다고 한다. 용량에 비해 방이 약간 크고 밖이 너무 추워서 열이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흠,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도해야겠군.
아침은 지금까지 나온 식사 중에 최저였다. 그래 호텔 가격도 최저인데, 어쩔 수 없지. 물론 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이와 토마토, 계란, 음료, 빵, 잼, 버터 등으로 구색은 예쁘게 갖추었는데 양이 너무 적었다. 빵도 더 주고 음료도 더 주는데, 마음대로 먹다가 더 달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좀 그랬다. 유명한 관광지로 오니 비용 절감을 위해서인지 아침을 부페식이 아니라 차려내 주는 대신에 양을 최소로 하는 모양이다. 실제 숙박비가 4인 기준 1박에 50~70유로에 우리와 다른 여행객이 먹는 것이 똑같은 것을 보면 가격 대비 아침 식사는 떨어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까지 우리 가족이 평가하는 현재까지의 호텔 만족도.
1위 안탈리아 사바흐 펜션의 빌라. 2개층, 2개 침실, 거실, 부엌, 화장실 2개. 1박 65유로.
2위 카파도키아 귈테킨 호텔. 반지하, 더블 1개, 싱글 3개, 거실, 화장실. 1박 60유로.
3위 파묵칼레 베누스 호텔. 3층. 더블 1개, 싱글 2개. 화장실. 1박 50유로.
4위 안탈리아 칼레이치 호텔. 더블룸+트윈룸. 1박 50유로.
5위 셀축 부메랑 게스트하우스. 더블 1개, 싱글 2개. 1박 43유로.
이렇게 정리해 놓고 나니 비싼 순서대로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나, 1, 4, 5위는 실제 가격 보다 협상을 통해 가격을 많이 내렸기 때문에 사바흐 빌라를 제외하고는 인터넷으로 예약할 경우 거의 비슷한 가격이다.
에게해 연안 차낙칼레에서 지진이 발생한 모양이다. 큰 문제는 없는 듯하다. 그리스에서는 시위가 요란하다. 정보가 필요하다. 나브라틸로바와 힝기스의 친선 테니스 대결도 볼 만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으니 고양이 세수만 하고 호텔을 나서서 어제 예약해 두었던 기사 아저씨를 만나러 갔다. 9시 반에 만나자고 했는데, 아직 오지 않으셨다. 그리미가 현금이 담겨있는 복대를 호텔에 두고 왔다고 해서 무일이 허겁지겁 호텔로 달렸다. 중국에서 노트북을 분실했던 기억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되었다. 다행이 침대에 보관해 둔 복대는 얌전하게 그대로 있었다. 한국에서 온 4명의 여행객이 호텔을 찾아다닌다고 했다. 너무 추워서 부메랑으로 간다고 했다. 깨끗하기는 한데 춥고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우리도 고생했다고 했다.
택시기사가 끝내 오지 않아서 에페스까지는 다른 택시로 가기로 했다. 인당 3리라의 돌무쉬를 타나 15리라로 에페스를 가나 큰 차이가 없어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친절한 기사 아저씨가 성모 마리아의 집과 에페스를 묶어서 60리라에 가자고 한다. 잠깐 의논해서 필요 없다고 했다. 택시에 타려는데, 이 기사분이 오늘의 첫 손님이니 특별 가격인 50리라에 모시겠다고 한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래도 명색이 견진까지 받은 가톨릭 신자인데 마리아의 집까지는 다녀오자는 생각에 승낙을 했다. 기분이 괜찮았다.
마리아의 집은 에페스를 지나서 꽤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은 불과 20분 밖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걸어서 움직이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50리라라고 해 봐야 3만원이니 술 많이 먹은 날 저녁의 택시비 밖에는 되지 않는 돈이었다. 멀리 에게해도 바라보이는데 날이 추워서 안개가 껴서 그런지 경치는 아름답지 못하다. 입장료는 15리라(합계 60리라)인데, 셀축시에서 징수한다고 한다. 아주 소박한 집이다. 성수가 있어서 아픈 사람의 병을 낫게 한다고 해서 무일은 머리(정신병), 그리미는 목(갑상선), 우주신은 코(비염)에 성수를 바르며 기도했다. 출구 쪽에는 터키 사람들이 자신이 오래 입었던 옷의 일부를 잘라서 소원을 빌고 묶어 둔다는 전통에 따라 수많은 천조각이 묶여 있었다. 무일도 부모님과 그리미의 건강을 위해서 애용하는 버프의 일부를 입으로 뜯어내어 소원을 빌면서 묶어 두었다.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에페스로 내려와서 25리라(합계 100리라)의 입장료를 내고 히타이트 시대와 헬레니즘, 로마시대에 번성을 누렸던 고대 도시를 돌아본다. 고대 도시의 기둥들에는 네모난 구멍들이 뚤려 있었다. 이 구멍들로 조립식으로 커다란 기둥을 만들어 낸 모양이다. 아름다운 고대 도시다. 볼 것도 많았다.
에페스 관람을 마치고 셀축으로 돌아가려다가 한국인 청년 3명을 만났다. 영어도 전혀 통하지 않고 외국인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안탈리야의 어느 슈퍼마켓에서 그리미가 한국어를 듣고 엉겁결에 ‘여기 사세요?’라고 물었던 친구다. 미안하고 반가웠다. 그 친구들도 재미있어 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여행에서 이렇게 재미있는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택시기사가 다가온다. 셀축까지 15리라라고 한다. 타고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쉬린제 마을로 간다고 했더니 그러면 50리라에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돌무쉬로는 얼마냐고 물었더니 1인당 10리라이고 자기가 데려다 주면 10리라만 더 내면 된다고 한다. 호텔에 가서 더운물 나오는지 체크도 하고 점심도 먹어야 해서 안된다고 했더니 쉬린제 마을이 점심값도 더 싸다고 한다. 돌무쉬가 저렇게 비싸다면 10리라 더 주고 이 차를 타고 가는게 낫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험한 산을 굽이굽이 돌아 쉬린제에 도착했다. 택시기사가 다시 말했다. 자기가 두 시간 정도 기다려 줄테니 다시 50리라를 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되었다고 했다.
배가 고파 점심식사를 했다. 괴즐레메라는 팬케익이 가격도 저렴(4~5리라)하고 맛도 괜찮았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나무를 땐 솥뚜껑 위에 기름을 바르며 굽는 것이 전부인 이 음식은 고소했다. 마을의 풍경과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야외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니 금방 추웠다. 우주신이 주문한 초코릿 팬케익이 나오지 않아서 자리를 천막 안으로 옮겨서 2차 식사를 하면서 난로불로 몸을 덮혔다.
쉬린제 마을은 서민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면서 온통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장사로 명맥을 유지하는 모양이다. 팔아달라는 요구가 너무 많다. 물론 거절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가난한 모습의 노인들의 말을 뿌리치기가 쉽지는 않다. 결국 손뜨게질로 만든 아기 양말(5리라)을 하나 사고 포도주도 1병(20리라) 샀다. 마을은 어제 몹시 추웠는지 그늘진 골목길에는 아직도 얼음이 얼어 있었다.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갑자기 부르사의 주말르크즉을 꼭 가야 하는지 사프란 볼루를 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잘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무쉬를 탔다. 세상에 3리라였다. 택시기사에게 속은 것이다. 그는 분명히 돌무쉬가 10리라라고 했다. 단 26리라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그자의 거짓말에 넘어 간 것이다. 시간을 많이 벌었으니 큰 손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성공에 힘입은 그자는 또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러다가 더 큰 사기도 치게 될까 걱정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거짓말까지 하는 것이 정당할까? 사실은 안 된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과정의 부당함을 다 용서받을 수는 없다. 어쨌든 먹고 살기 위해 사람도 죽이는데 그까짓 26리라가 무슨 큰 일 이겠는가. 더 큰 욕심 내지 말고 더 큰 죄 짓지 말고 살아가기를 빈다. 우리는 괜찮다.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겠다. 점점 더 큰 도시가 다가오고 있다.
오토가르에서 내려 카밀코치의 아저씨에게 생선가게를 물었더니 터미널의 바로 뒤편에 붙은 생선가게를 안내해 준다. 안타깝게도 홍합이나 조개는 팔지 않고 생선만 판매한다. 다시 슈퍼를 물었더니 대각선 길 건너편을 가르쳐 준다. 참 편리한 오토갈이다. 뭐든지 다 있다. 슈퍼에 가서 버섯, 치즈, 살라미, 과자, 고추를 샀다. 아가씨가 동전을 잔뜩 놓고 거스름돈을 바꿔주고 있다. 누군가 동전을 모아서 물건을 사간 모양이다. 재미있어 하기에 사진을 찍었더니 자기 얼굴도 넣어 찍어달라고 한다. 이메일도 적어서 주는 것을 보니 사진을 보내 주어야겠다. 참 당찬 아가씨다. 재미있게 사니 고마운 일이다. 힘들어도 웃으면서 살면 본인도 좋고 보기에도 좋다. 그래야 힘겨운 현실을 이겨낼 힘이 생기는 것이다.
다행이 호텔에서 더운 물이 나왔다.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더워져서 추위는 사라졌다. 오늘은 냄새나는 요리가 아니니 그냥 침실에서 하기로 했다. 버섯 누룽지탕이다. 맛있다. 사먹는 음식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훨씬 만족도 높은 식사를 할 수 있다. 전기밥솥과 전기레인지의 힘이다. 좀 더 좋은 식탁과 식기를 가볍게 휴대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한 번 알아봐야겠다. 경제적인 여행이 우리 체질에는 맞는다. 한 번 여행하는 비용으로 두 번 가고 싶다.
오카리나로 ‘mother of mine’을 불어 본다. 제법 잘 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미는 참느라고 혼났단다. 바로 옆에서 한 30분 불어 댔더니 힘들었나 보다. 천재가 컴퓨터를 쓰고 있어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사실 책을 읽어야 하는데.
날이 좀 따뜻해지기는 한 모양이다. 히팅기가 조금 활약을 한다. 어제보다 한결 따뜻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지 내일 아침에 ‘굿모닝’ 인사를 하면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8기가의 마이크로 SD가 꽉 차서 컴퓨터와 이동용 USB로 옮겼다. 꼭 11일 만에 2천장의 사진을 찍었다. 출력할 사진을 고르는 일이 힘들고도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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