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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음악이야기

대금연주 공부를 시작하며 - 봄처녀

부끄러운 일이지만 4년 전에 대금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4년 전 처음 배우던 상황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 1년 열심히 연습을 하다가 

대나무로 된 괜찮은 대금도 거금을 주고 구입을 했는데,

회사일이 많아지면서 대금을 잡을 시간도 줄었고,

동호회 활동도 하지 않게 되면서 대금 연주를 하지 못한 채

2년이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회사를 정리하고 지난 가을부터 시간 여유가 생겨서

다시 대금을 잡고 연주공부를 시작하려고 했더니

왕년의 그 실력이 나오지 않고 귀만 고급이 되어 버려서

힘만 들고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올린 글이 있었다.

비범해 지고 싶다면 꾸준하게 평범하라는 글이었다.

평범한 마음으로 꾸준하게 일상을 유지해 가다 보면

마치 생활의 달인이 되는 것처럼 비범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평범하자.


예전 어느 유명한 대금 연주자는,

대금 하나와 사발 하나를 들고 매일 아침 산으로 올라가

대금 연주 한 곡을 마칠 때마다 모래 한 알을 사발에 담아

그 사발에 모래알이 가득 담기면 연습을 마치고 산을 내려 왔다고 한다.

평범한 실력에 불과했던 그가 매일 같이 꾸준한 연습을 통해

마침내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한 곡 백번 불기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평범하고 쉬운 곡부터 시작해서 백번을 불다 보면

언젠가는 귀도 트이고 몸도 만들어지겠지.

그 날이 오든 오지 않든 음악을 즐기고 배우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보고자 한다.


그 첫번째 곡은, 가곡 봄처녀.

요즘 계절에 아무도 부르지 않지만 딱 좋은 곡이다.



봄처녀.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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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헌종년간에 대금악사로 활동했던 정약대(鄭若大) 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기록 속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생몰년조차 알려져 있지 않으며 헌종 14년(1848) 

어영청(御營廳)의 세악수(細樂手)로 활동했다는 것, 

가곡 반주에 능했다는 사실과 그의 악기연습과 관련되어 구전되는 일화 정도가 고작이다.

한때 조선 대금계의 최고 명인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음에 분명하련만, 

기록에 남아 있는 정약대의 이야기는 이 정도이니 기록의 한계를 탓해야 할까 아니면 

기록자의 눈설미 없음을 탓해야 할까. 

어영청의 세악수 출신 인물의 음악성 또는 비범성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기록에 남겨둘 수 있는 넉넉한 시대가 아니었음을 탓할 수밖엔 없을까. 


꾸준한 연습이 대가(大家)를 만든다는 원리는 음악하는 이들에겐 지극히 평범한 진리이다. 

정약대가 꾸려온 삶의 모습은 대가가 되기 위해 걷는 길이 녹녹치 않았음을 드러낸다. 

명인이라는 훈장은 앞 뒤 두리번거리지 않고 

묵묵히 한 길로 걸어간 이들만의 몫이라는 인과율을 제시한다. 


정약대는 이른 아침이면 대금 하나 달랑 매고 인왕산 꼭대기에 올랐다. 

꼭대기라야 338.2 미터에 불과하니 악기 들고 산책하기에 적당한 코스일 터이다.

산은 비록 낮지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많아 넉넉하고, 

능선 곳곳에 전바위ㆍ범바위ㆍ치마바위ㆍ모자바위ㆍ매바위 등 볼거리가 많은 산이니 

서울 사는 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 가운데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 타락산이라면 

우백호는 바로 이 인왕산이니 서울을 감싸안고 있는 오른팔이라 할 수 있다. 


정약대는 날씨가 좋던 궂던 상관치 않고 매일같이 어김없이 인왕산을 찾았다. 

새벽 이슬을 밟으며 올라가 산 한 자락 차지하고 망부석처럼 앉아 대금을 불고 또 불었다.

 그가 매일 반복하여 연습한 곡은 ‘밑도드리’라는 음악이다. 

나막신을 옆에 벗어 놓고 밑도드리를 한 번 연주한 뒤 나막신 속에 모래알 한 알을 넣고, 

또 한 번 연주한 후에 다시 또 한 알을 넣어 모래알이 신발에 가득 차면 

비로소 하산하는 생활을 10년 넘도록 계속하였다. 

어느날 나막신의 모래 속에서 풀이 솟았다는 일화도 전해지니, 

그렇게 미련할 정도로 한결같은 시간을 보내온 정약대의 대금 세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가 반복하여 연습한 ‘밑도드리’라는 곡은 ‘미환입’ 또는 ‘수연장지곡(壽延長之曲)’이라는 

아명(雅名)으로도 불리는 음악으로 보허자(步虛子)의 파생곡이다. 

연주시간 7분 정도의 길이로서 정악(正樂)을 배울 때 반드시 익혀야 하는 음악이다.

장식음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본질음을 위주로 하여 꿋꿋한 맛을 내기 때문에 

정악의 참다운 맛을 익히려면 반드시 이 음악을 통해야 하는 것이다.

정악이 추구하는 정신까지 맛볼 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정약대의 이러한 일화는 따지고 보면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끊임없는 반복연습을 통한 참다운 맛보기‘라는 화두는 

비단 음악세계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책읽기와도 비교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또 읽어 글이 마음속에서 펄펄 살아 뛰쳐 노니는 경지에 도달하여도

그치지 않고 다시 읽노라면 글은 더 이상 글이 아니라 삶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정약대가 대금으로 반복해서 연주했던 밑도드리는 음악이지만 음악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 송지원의 음악기행 중에서 부분 발췌

봄처녀.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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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녀.am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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