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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도덕과 효율의 삶 - 온 삶을 먹다, 웬델 베리

 

5만원을 들여 오래된 노트북을 살리기는 살렸는데, 살리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 아닐까? 모든 프로그램들이 무거워지는 바람에 페이스북, 블로그, 이미지 검색 등의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는다. 스마트 폰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능이다.


책을 읽으며 그때 그때 기록해 두지 않으면, 다 읽고 난 뒤에 어떤 인상은 남는데, 세세한 것들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식이 페이스북에 하나씩 기록을 해 두다가 마지막에 블로그에 정리하면서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이스북에 타이핑을 해야 하는데,글 내용이 많아지다 보니 스마트폰에 너무 시간을 빼앗긴다. 그래서 오래된 노트북을 살리는 작업을 했으나 실패다.



불과 열흘 전에 읽고, 많은 감동을 받은 책인데도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입시를 앞둔 아이들에게 열심히 책을 읽고 반드시 독후감을 써 놓으라고 요구하면서도, 정작 나는 훨씬 시간도 많고 여유가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독후감 쓰기가 귀찮다.


딱 한가지만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농업은 가족 중심의 복합소농이 생산력도 높고 자연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아 미래 세대에도 떳떳한 도덕성이 높은 방식이라는 것이다. 핵심은 기억하고 있는 것같아 다행이지만, 이것도 열흘에 더 열흘이 지나고 나면 무엇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페이스북과 책에 의존해 한 번 더 정리해 보자.


 

웬델 베리는,


" 우리가 부유한 이유는 단지 우리가,

  후세 사람들이 타고 날 권리와 살아갈 수단을 

  우리 시대에 다 팔고 써버리는 법을 배웠으며,

  기꺼이 그러고자 한다는 것 뿐이다"고 이야기 한다.


최소한의 도덕성도 갖추지 못한 현재의 우리가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농업에 대한 이야기지만 조금만 바꿔 보아도 세상에 대한 명쾌한 해설이다.


부자와 권력자들이 부자인 이유는, 가진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보다는, 그들이 그들 이외의 사람들이 누려야 할 권리와 살아갈 수단들을 그들만을 위해 다 팔고 써버리는 법을 먼저 배웠으며, 기꺼이 그러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부자와 권력자는 아름다운 영혼과 도덕의 소유자여야 한다.  그리고 깨끗한 영혼과 도덕의 소유자들은 부자가 되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이 밝아지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웬델 베리는 그런 인물로 신시나투스(Cincinanatus)를 든다. 그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귀족 정치인으로 작은 농장을 일구며 살다가 침략으로 위태로운 로마를 구하기 위해 독재관이 되었으나, 외적을 물리친 뒤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의 이름은 미국 오하이오주의 도시 신시내티로 남게 된다. 권력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적절한 때에 포기되어야 한다.


웬델 베리는 반드시 정치가만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산업농업은 농부를 과학자와 경제학자의 진단에 따라 움직이는

  '노동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낡아 빠졌지만 아직 버릴 수는 없는 기계 같은 존재 말이다.

  우리는 건실한 농부가 최고 단계의 장인이라는 사실을,

  일종의 예술가라는 사실을 간과해 왔다."


모든 사람의 일이 결코 없어지거나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어느 구석에는 반드시 농업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기에 많은 선진국들이 농업 선진국이기도 한다. 그런 나라들에서 일부 농부들은 예술가이자 장인이다. 사람들이 농부를 낡아빠진 노동자로 보는 것은 문제지만, 돈과 안락함에 있어서 어느 것도 만족시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농부는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가 지혜를 갖추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로 인식해야 한다. 일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이다.


또 한편으로는 학자이면서 농부이거나, 농부이면서 학자여야 한다. 학자이면서 농부가 아니면, 조화롭고 균형된 농업을 이해하지 못한다. 농부이면서 학자가 아니면,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고립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농촌은 노인들이 지배하고 있지만, 노인들의 지혜는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처럼 파괴된 농업과 농촌은 재편되어야 한다. 철저히 파괴된 뒤에, 좋은 생각과 자부심, 돈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농촌공동체와 농업을 일으키면 좋겠다. 새로운 농업의 주체들이 성공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 중국 농업의 인당 생산력은 (기계가 부족하니) 비효율적이다.

  그런데, (토지의) 면적당 생산량은 미국 보다 9배나 높다.

  중국의 농민은 비교적 작은 터에서 직접 손을 써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사이짓기나 돌려짓기 같은 생산력 높은 농법을 구사한다."


복합소농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생태 균형을 실현하는 농민에게 시골은 기회의 땅이 된다. 특히, 기계는 이용하되 지배당하지 않으면, 높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얻을 수 있다. 이미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에서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 경험들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현하자면,

  농부의 생활과 생계를 지속가능하게 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보존해 줄

  복잡한 '지역 문화'가 있어야 한다."


얼마 전 최재천 교수의 강의에서 생물의 복잡성이 생존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생계를 위해 작물을 여러가지로 섞어 짓는 소농들에서 오랜 생존의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공동체라는 생활 여건은 부족하다. 노인들로 채워진 공동체에는 일의 복잡성이 존재할 뿐이지 문화의 복잡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농촌공동체를 복잡하게 만들어 갈 새로운 구성원들이 취농이든 귀농이든 어떤 형태로든지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 정말 대단한 것은,

  관행농업을 따르는 농민들이 수백만 명씩 망해 가는 동안

  아미시 사회는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는 동시에 

  '농촌으로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이들 아미시 농장은 평균 50에이커(6만평)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 농지를 사기 위해 은행에 빚지고 있으나, 그들의 생산물로 그 이자를 감당해 내고 있다. 한국의 농민 가구는 10에이커(만이천평)도 안되는 농토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농사기술이 뛰어나지만, 매우 알뜰하거나 다소 비참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완전히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한국의 농촌공동체는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앞서 많은 사람들이 옛사람의 지혜를 갈무리해 두기 위해 지금 시골에 어렵게 정착해 가고 있다.


 

엑손 모빌사의 직원이, 


" 미국의 농업은 다른 어느 산업보다도 많은 석유를 필요로 합니다.

  예컨대 휘발유 1갤런(11년 2월 약 3.2불)은

  옥수수 1부셸(11년 2월 약 6.2불)을 생산해 내는데 ......

  미국의 농부 한 사람이 67명을 먹이는 경이로운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기계 농업은 화석연료에 의존한 농업이 되었다. 기계와 석유가 일으킨 기적이다. 미국처럼 기름값이 싼 곳에서 조차 연료비의 비중이 이렇게 높다면 우리의 기계 농업에 대해서는 반드시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태평농법은 재미있는 농법이다. 태평농법은 안되는 농법이다. 제초작업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논과 밭에서 나온 생산 부속물들을 재활용한다는 농사의 기본의미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뒷짐을 지고 새벽이슬 맞으며 아무리 논둑길 밭둑길을 걸어도 잡초만 크지 작물들은 크지 못한다. 태평농법은 농업에 첫 발을 내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으로 그 역할이 충분하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뺄 수가 없다. 그 때 새로운 농업인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서 농부도 살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면 된다. 제초제 안치고 농약 안치고 농사짓는 방법은 많다. 돈에만 얽매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농사를 지어 꼭 돈을 벌어야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태평농법은 위험하다. 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즐기려는 사람, 깨끗하게 살려는 사람은 해 볼 만하다.


" 대초원은,
  침식으로 토양이 유실되는 경우가 극히 적다는 것,
  물을 흡수하여 가두고 이용하는 능력이 효율적이라는 것,
  한 해 동안 쏟아지는 태양광을 최대한으로 잘 이용한다는 것,
  스스로 지력을 길러 내어 보존한다는 것,
  병충해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줄 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힘이 있다. 야생의 풀들과 같이 뿌리가 건실한 작물도 병충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작물의 직근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소중한 진리다. 휴가를 떠난 어느 날 아침에 들판을 바라보며 평화와 행복을 느꼈다면, 우리들은 모두 농촌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이 될 수 있다. 학자이면서 농부였던 웬델 베리의 통찰력이 아주 쉽고도 분명하게 농부의 삶을 의미있게 한다. 그렇게 살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