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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바람이 분다, 가라_한강_17년 초판 16쇄_문학과지성사 ]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_251109

2010년에 출간되었는데, 25년말에야 읽는다. 이 책은 친구 영선이가 추천했다.

 

어제도 잠깐 한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한강의 이야기가 좋다고 한다. 놀라운 능력이라고. 나는 조금밖에 고끄하지 = 고개를 끄덕이지 않지만, 그래도 또 읽는다. 친구들이 좋다고 하니까.

 

또 꿈이야기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① 꿈에 무엇이 있다고 믿거나 ② 꿈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장치일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에는 고끄하지만, 꿈에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면, 제발 깨어났으면 좋겠다.

 

"문득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7쪽)

 

이게 뭔소린가? 한강은 숨뜻 = 숨겨진 뜻 = metaphor = 은유와 상징을 뚜렷하게 만들어낸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으니, 읽는 사람이 찾아내야 한다. 흰새 - 울며 노래하다 - 흰빛이 빠져나간다. 이것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들을 찾아가는 길의 첫걸음을 뗀다.

 

"새가 우는 동안 새의 머리에서부터 흰빛이 빠져나갔다." (7쪽)

 

커미 = 커다란 미리내 = universe의 처음과 끝을 무한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실수나 자연수는 무한이다. 양의 값으로든 음의 값으로든. 수를 다룰때 무한의 끝과 처음이 어디인지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물음만 던지지 않는다면, 가장 작은 실수는 뭔가요? 가장 큰 자연수는 뭔가요? 답은 알수없다. 무한이기 때문에 어떤 수로 나타낼수가 없다. 알수가 없는데, 자꾸 묻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

 

커미의 처음이나 끝을 묻지 말아야 한다. 커미는 지금 끊임없이 부풀고 있고, 부푸는게 끝날때 다시 오므라들것이다. 커미의 한가운데로 끝없이 오므라들다보면, 또 부푸는 때까 있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빅뱅이라 한다. 빅뱅과 부풀기가 끝나면 빅크런치가 이어진다.

 

그것이 무한한 커미다. 삶의 처음은 작은 세포이고, 삶의 끝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의 처음을 '아직 썩지 않았을 그의 손'이라고 했다. 화가의 모든 일은 손으로 이루어진다. 손과 발과 입과 몸으로 모든 일이 만들어지는데, 화가나 많은 사람들이 몸의 하나인 손으로 많은 일을 한다. 그래서 죽음의 처음은 '아직 썩지않은 손'이다.

 

"내 첫세포를 생각했다. 어머니조차 모르는 사이 연붉은 자궁안에 막 한점으로 맺혔을 그것을. 바로 그무렵, 북반구의 2월 하순, 차가운 흙속에서 아직 썩지 않았을 그의 손을.

 

(중략) 지금의 커미universe가 그렇게 몇번째로 태어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47/66쪽)

 

여자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정말 궁금하기는 하다.

 

"심지어 나를 자기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52~3쪽)

 

지하철 의자에 앉아 한시간 가까이 책을 읽었는데, 40쪽 정도를 읽었다. 이 이야기가 400쪽이 안되니 열시간은 들여야 읽을수 있다. 아마 어느날 하루는 끝을 보기 위해 아무짓도 하지 않고 읽을테니 5일 정도면 읽을수 있지 않을까. 소설책 한권을 5일이나 받쳐야 읽을수 있다니. 아무래도 시간을 물쓰듯이 쓰고 있다.

 

벌써 그런 생각은 든다. 수많은 평범한 묘사들 위에 새롭거나 신선하거나 엉뚱하거나 맞지않는 수식어와 묘사들이 얹혀져서 한강의 이야기들은 다르다. 한 사람은 곧 하나의 커미이므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것들을 모르고 있다. 그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려고 힘을 쓰고 있다. 꼭 필요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으로 다름이 만들어진다.

 

일부러 그렇게 쓴것인지 알수 없으나, 산수에서 0으로 나눌수는 없다. 그런데, 몽유도원도를 보고 구토가 난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은 어떤 충격때문에 구토가 날수 있나? 김건희는 왜 구토를 했을까?

 

"어떤 숫자든 0을 곱하면 블랙홀에 빨려든듯 0이 되고, 0으로 나누면 반대로 무한이 된다." (69쪽)

 

특수상대성 이론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으로 들었다. .

 

"공간속에서 운동하는 속도와 시간속에서 운동하는 속도를 합하면 일정하게 빛의 속도가 된다." (80쪽)

 

1호는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봤더니, 프랑스에서 만든 단위로, 사람 얼굴을 그릴수 있는 가장 작은 크기로 정했다고 한다. 18cm x 14cm. 100호는 가로와 세로를 10배씩 늘리면 된다.

 

글이 쎄다. 이야기하려는 것을 잘 전달하기 위해 지나친 표현을 쓴것인데, 누군가를 다치게 할것같지는 않다. 이야기의 긴장을 높이고 싶어서 그럴수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그릴때도 이렇게 쎈 글을 쓰지는 않을것이다. 그다지 쎈 말글이 없어도 된다고 느끼는 것은 나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너무 쎄다. 이 쎈글을 만드는 것은, 천재의 재능일까 아니면 끝을 모르는 = 그래서 지나치게 쎈사람이 어쩔수없이 드러내는 폭력 같은것일까? 폭력처럼 느껴진다.

 

"사다리 위에 서서 비스듬히 균형을 잡고 그림 모서리에 압정을 꽂던 인주의 담담한 옆열굴이 손톱처럼 내눈을 후벼판다.

 

(중략) 더러운 책. 피한방울 묻지않은 책. (중략) 한단어 한단어가 짧고 얕은 무수한 칼자국들처럼, 수만개의 촘촘한 바늘처럼 이마를 가르고 들어와박힌 책을 읽었다.

 

(중략) 그 여자는 그렇게 계속 썩어갔어요. 고인물처럼. 충치처럼. 감염된 환부처럼. 그러다 죽었지요.

 

(중략) 더 견딜수없을만큼 뜨거워지면 성냥개비를 흔들어 불꽃을 껐다.

 

(중략) 금속으로 된 핏줄같은 맞은편 선로가 번득이며 드러난다." (88 / 213 / 239 / 322 / 324쪽)

 

전기불이 넘쳐나지 않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밤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오늘날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는,

 

1) 우리가 햇님을 등지고 서있기 때문이다. 세땅earth의 거대한 그림자 속에 들어간 우리는 햇빛을 전혀 볼수가 없다. 유일하게 볼수 있는 햇빛은, 달에 부딪히고 날아오는 햇빛 = 달빛뿐이다.

2) 날아오는 별빛을 대기권의 먼지와 땅위에서 날아간 빛들이 지워버려 어둡게 보인다.

 

위의 내생각을 제미나이는 틀렸다고 한다. 달빛과 별빛이 환하게 느껴진 것은, 암순응 했기때문이다 = 어둠속에서 눈동자가 커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지적은 빛은 빛을 산란시키지않고 서로서로 통과해 버린다는 것이다. 빛을 산란시키는 것은 물질이지 빛이 아니다.

 

광공해로 별을 볼수 없다는 것은, 땅위의 빛이 하늘로 올라가 먼지나 물기와 부딪혀 산란되어 하늘을 밝게 만들기 때문에 그보다 약한 별빛은 볼수 없다는 것이다. 달빛은 햇빛의 40만분의 1이고, 쏟아지는 별빛은 보름달빛의 천분의 1에 불과하다. 이게 사실이다. 

 

"첫째는 커미universe의 나이가 유한하다는 것이다. (중략) 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두번째이자 더욱 알맞는 대답은 허블에 의해 관측되었다. 바로 은하들이 커미의 팽창때문에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72쪽)

 

많은 행성의 위성들은 자전주기와 공전주기가 '같아져서' 한면만을 보여준다. 달이 특별해서 그런것이 아니다. 세땅earth도 햇님에 의해 조석력으로 자전주기와 공전주기가 같아지는 조석고정tidal locking이 일아날수는 있는데, 워낙 빨리 돌고, 워낙 무거워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조석력은 거리의 세제곱에 반비례한다.

 

"내가 아픈곳은 달의 뒷면 같은데예요. 피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중략) 나 스스로에게도 보이지않아요." (219쪽)

 

생각해보니, 이글은 추리이야기일수도 있다. 한강이 썼다고해서 추리소설이 아니라고 잘못 믿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풀어가는 흐름에 따라 추리소설일수 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길에서는 궁금한 것과 알수없는 것들이 끊임없이 섞여있고, 끝을 모른다. 게다가 서인주라는 그림쟁이가 죽은 이야기니 글감도 추리이야기다.

 

다시 쓰거나 다르게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버려진 것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쓰러져 가는 집들을 사서 고쳐가지고, g하루밤에 수십만원을 받고 촌캉스용 숙소로 내놓아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 놀랍다. 버려진 것들보다 버릴것들이 많은데, 제대로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마음을 다잡고 해내야 한다.

 

"버려진 것들을 좋아해요." (230쪽)

 

답답하다. 바로 앞의 글들은 긴장되면서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뭔지 모르는 이야기들이 답답하게 이어지니, 짜증이 난다. 이렇게 글을 써야 하나. 숨기면서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무엇인지를 알수 있게 쓸수는 없을까. 글쓴이 마음인데, 내가 어찌할수 없는 것이어서, 읽을지 말지를 생각하게 한다. 읽기로 약속했으니 읽을것이다. 답답함을 참고.

 

낡은 시내버스의 흔들리는 더러운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깨끗해 보이지만 틀림없이 더러운 물을, 아무 생각없이 아무 희망없이 바라보았다. 삶이, 꿈같던 대학시절이 그렇게 슬프고 어두웠다. 그뒤로도 웃고 살았지만, 밝은 빛을 가슴에 안고 살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슬픈 마음은 타고난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후우, 겨우 또 이야기의 가닥이 잡혀서 재미있게 읽고 있다.

음울하고 - 지루하고 - 답답하고 - 재미있고 - 답답하고 - 재미있고를 277쪽에 이르도록 되풀이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힘든 일은 없었다.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힘든곳에서 달아나 시간으로 힘든 구덩이가 메워지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맞서지않고 달아나면 되는데, 꼭 맞서야 하는 시간들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가 혼자 술을 마신것은 유일한 일탈,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의 자멸이었을 것입니다.

 

(중략) 불안때문이야. (중략) 이 모든걸, 빌어먹을, 누구와도 나눠서 짐질수 없다는거." (277 / 291쪽)

 

삶속에서 배운것이 없는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럴까? 나이 든다는것, 처음에는 마음이 넓어진다는 말에 고끄하지 않았다. 이제는 삶은 살아낸것이 훌륭하므로 많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고끄하지 않게 되었다. 힘써 배우지 않는데, 살아낸다는 것만으로 어떻게 앎에 이르겠는가?

 

"이제 나는 늙었지만, 어떤 위엄도 깨달음도 마침내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만나온 사람들과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파괴해왔고, 자신 역시 무사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했습니다." (314쪽)

 

혈우병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심할수록 일찍 나타나고, 큰 수술이나 상처가 있을때 나타나는 가벼운 혈우병도 있다.

 

아팠지만 한번도 다치지않은 사람과 아프지않았지만 너무나 아프게 살아온 사람. 두사람을 모두 그려낸다. 그러기 위해서 너무 아파서 한번도 다치지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아팠는지도 그려내야 하고, 아프지않은 사람이 얼마나 아픈 상처를 갖게 되었는지도 써야한다. 그래서 두사람을 모두 아주아주 심하게 아프게 그려낸다.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아볼수 있다. 거의 있을수없는 이야기다.

 

348쪽인데, 어쨌든 재미있게 읽어가고 있다. 10장만 남았다. 아직도 그녀가 왜 죽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글쓴이는 알고있고, 아직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많이 알았고, 읽는 재미도 있었으니, 글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생각들도 많이 했으니, 여기까지 지겹게 읽은것은 보상을 받았다고 믿는다.

 

고래가 작살에 찔려 큰 상처가 나면,

1) 지혈을 하지 못해서
2) 바닷물에 혈액응고제가 씼겨져 나가서


쉽게 지혈이 되지 않아서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현재까지 살아있다면,

고래는 쉽게 상처를 입지 않고, 혈우병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봐야할 것이다.

 

17일에 읽기를 끝냈다.

4번의 겨울만에 끝낸 이야기이고, 중반까지 연재를 하다가 처음부터 고쳐서 다시 쓴것이라고 한다.

 

생각을 마무리하기는 해야겠는데, 그럴려면 한번 더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천천히 읽는데도, 놓친 곳이 없이 모든 흐름을 알려면, 다시 읽어야 한다.

 

그렇지만 추리소설이다. 시간 떼우기로 끝내는 것이 맞다.

한강이 다루려고 했던것은,
남자들의 사랑이라는 이름에 희생되는 흰새와 같은 여자들의 아픔이다.

여자들은 사랑이라는 범죄의 희생양이다. 

 

받은 고통이 너무 크고, 너무 많이 울어서 흰색이 빠져버리고 속이 들여다 보이는 새.

깊은 슬픔으로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을 다르게 쓴것이다. 암것도 남지 않았다.

든 여자가 사랑이라는 두려운 폭력에 희생되었다. 조심해서 사랑을 하라, 정말로 사랑한다면.

 

글이 너무 쎄다고 다시 말할수밖에 없다.

남자들의 사랑은, 알든 모르든 폭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끝없이 돌아봐라.

 

꼭 읽어야하는가? 글쎄,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지 않다.

읽으면 어느 정도 재미있다.

한강식의 음울한 글투와 알수없는 혼잣말들이 가득하다.

 

한강이 어두운것은 그녀의 책임은 아니다.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오스트라랄로 피테쿠스인 루시 이래로 300만년 동안,

수많은 약한 사람들 = 여자 = 어린이 = 과부 = 장애인 = 외국인 = 소수자 등이 고통을 받아왔고,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강의 이야기에는, 이나=이야기나누기=communication이 없다.

이나를 믿지 못하는 것인지.

중얼중얼하는 것으로 뚜렷한 무엇에 이르기는 어렵다.

떠오르는데로 마구 써서 굳이 뜻이 통하지 않아도 된다.

한번 더 읽으면, 뭔가 다른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 아직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