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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_240125 el jueves, veinticinco de enero_Четверг, двадцать пять январь

러시아는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이러다가 영원히 러시아 여행은 못하고 끝나는 것이 아닐까? 이럴 것이 아니라 아직도 둘러보지 못한 더많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제1부 와아론 the happiness essay -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1장 기본분류

 

"우리의 와아happiness는 우리를 이루는 것, 즉 우리의 인격에 얼마나 좌우되는지 분명해진다. 반면에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의 운명만, 우리가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만 계산에 넣는다. 하지만 운명은 달라질수 있다. 게다가 내면이 풍요로우면 운명에 많은 요구를 하지않을 것이다. 그런데 바보는 끝까지 바보로 있고, 멍청이는 끝까지 멍청이로 있는다. (중략)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평민이든 노예든 정복자든

저마다 고백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덧없는 존재인 인간의 최고 와아는

인격에 좌우될 뿐이라고" (서동시집 / 15쪽)

 

 

[ 제2장 ] 사람을 이루는 것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 정신 - 신체 - 재산

쇼펜하우어 :

① 인격(what a man is = personality 몸과 정신의 합일, 오 좋은데) 

② 재산 what a man has  

③명예 how a man stands in the estimation of others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 

 

쇼펜하우어는 한마디로 재명(재산과 명예)은 운에 맡기고, 몸body과 정신soul이 하나로 융합된 인격personality에 초점을 맞춰 와아happiness를 찾으라고 한다. 운은, 운명은 언제든 바꿀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운이,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뛰어나거나 탁월하기는 어렵다. 그렇지 못한게 더 좋다는 생각까지 든다.

 

"철학이든 정치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탁월한 인간은 모두 우울한 것같다." (25쪽 / 아리스토텔레스)

 

나이가 들다보니 쇼펜하우어의 이런 생각들이 다 공감이 가면서도 새롭지가 않다. 만사를 비관하는 경우, 조금만 좋은 일이 일어나도 기쁘고, 설사 나쁜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럴것으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기때문에 그렇게 괴롭지도 않다. 비관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만사를 비관하고 항시 최악의 경우를 두려워하며 그에 대한 예방책을 강구하는 자는 항시 사물의 밝은면을 보고 낙관하는 사람에 비해 오산을 하는 경우가 적을 것이다." (27쪽)

 

쇼펜하우어의 편견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은 이런 말을 할수가 없는 시대다. 문화의 높고낮음을 평가할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고통과 무료함이 사람을 끊임없이 힘들게한다는 말은 공감이 간다.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지만, 내면의 공허에서 오는 고통은 극복하기 쉽다. 호기심이다.

 

"문명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나타나는 유목생활은 최상층에서 일반화된 관광생활에서 다시 발견된다. 유목생활(의 고통)은 궁핍에서, 관광생활은 무료함(의 고통)에서 비롯되었다. (중략) 끝없이 활발한 사고,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다양한 현상을 접하며 늘 새로워지는 유희, 힘과 그힘을 언제나 다르게 결합하려는 충동때문에 생각하는 사람은 피로한 순간을 제외하고 전혀 무료함을 느끼지 않는다." (29쪽)

 

이건 정말 읽기 힘들다. 이런 야만스러운 생각에서 무슨 지혜로운 이야기가 나올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핑커의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계몽시대의 학자들은 각자의 한계와 단점을 지니고 있었고, 시대의 한계를 돌파한 생각들도 가지고 있었다. 일시에 모든 야만성을 극복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만인으로서의 쇼펜하우어가 무엇을 돌파하는지를 재미있게 지켜보자.

 

쇼펜하우어(1788~1860)는 인종주의자이면서 엘리트 의식을 가진 천박한 지식인이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

 

"사람중에서 흑인이 가장 뒤떨어진 지성을 갖고 있으니, 흑인이 가장 사교활동에 충실하다. (중략 / 프랑스 신문에 따르면) 흑인들은 코가 납작한 검은 얼굴을 실컷 바라보기 위해 자유민이건 노예건 아주 좁은 공간에서 우글거리며 지낸다고 한다." (31쪽)

 

번뇌가 많아질 정도로 지혜가 많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지식과 지혜가 부족해서 답답하다. 알고 싶은 것은 많은데, 온통 신의 뜻이고, 수학을 알아야 이해할수 있다고 하니, 어떻게 답답하지 않을수 있겠나?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48쪽 / 전도서)

 

운에 따라 소유하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는 것 말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 품성을 바탕으로 사유하는 즐거움을 영원히 만끽하라는 이야기다.

 

[ 제3장 ]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피히테에게 배우고, 괴테와 교류하였으며, 아인슈타인과 니체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책만큼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대혁명이 시작되기 전해에 태어났고, 노예제가 폐지되던 계몽시대를 살았다. 의학을 포기하고 칸트와 스피노자를 공부했고, 죽기 직전에야 인정받았다.

 

사람의 욕망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부유해지고 싶다는 것이다. 부에 대한 욕망은 존중하되 제어하지 못하면 천박하다.

 

"사람처럼 물질을 필요로 하고 여러 욕구로 이루어진 종족에게는 부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존경과 숭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 심지어 권력조차 오로지 부를 얻는 수단으로만 간주되어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아울러 다른 모든 것이 돈을 벌려는 목적 때문에 무시되고 망가지는 것, 예컨대 철학이 철학교수에 의해 망가지는 것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53쪽)

 

하나의 물질은 하나의 욕망만을 충족시켜준다. 그런데, 사람의 욕망은 다양하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돈에 대한 사랑이 깊은 것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리를 참 잘했다.

 

욕망을 채운다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을 물을 붓는 행위와 같으니, 먼저 욕망의 바닥을 틀어막고, 채워야 할 욕망의 한계선에 튼실한 천장을 만들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욕망을 채우려는 헛된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다.

 

"사람의 소망이 주로 돈에 향해있고, 사람이 무엇보다 돈을 사랑한다고 종종 비난받기도 한다. 하지만 지칠줄 모르고 변신에 능한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한 우리의 소망과 당양한 욕구의 대상을 언제라도 충족시켜 주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53쪽)

 

생각을 거스르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비열하다고 비난한다. 비열함은 유연함과 통한다. 내 생각과 달라도 그의 생각이 옳게 보여 따를수 있다면, 비열하다는 표현보다는 유연함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비열하다는 표현을 듣기 싫으니,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생각이 바뀐것이 아닌데도, 유연하게 생각하는 것인데도, 비열하다고 비난받으니, 차라리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 자신을 보호할수 있게 된다.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주장하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지금 세상은, 생각을 넘나드는 유연한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비열함을 불평해 보아야 아무 소용없다. 누가 뭐라든 그런자가 세상을 지배하니." (58쪽 / 괴테)

 

돈은 사람의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이고, 돈을 통해서 여가를 얻어, 정신의 와아를 축적하고 실현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

 

[ 제4장 ] 사람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하여

 

명예의 문제에 대한 생각은 옳다. 문제는 세상에 노출된 사람들이 다른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방법이다. 흔들리는데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로 돌아가자.

 

2)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3) 세상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4)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려라.

5) 세상을 이용해라, 그러기위해서 내가 세상을 만들었다.

6) 내가 만든 세계를 위해 20%만(적절한 확률로만) 행동하라.

7) 나의 몸과 정신속에서, 나는 신이다.

8) 나를 지켜라, 나는 소중하다.

1) 인격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들의 평가인 명예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명예심은) 도덕성의 대체물로서 많은 사람의 훌륭한 처신에 유익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중략) 와아happiness의 중요한 요소인 마음의 안정과 독립에 유익한 작용을 하기보다 방해되고 불리한 작용을 할것이다. (중략) 다른 사람의 알랑거리는 말이나 상처를 주는 견해에 되도록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것이 현명하다. (중략) 그러다가는 언제까지나 다른사람의 견해와 생각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60~1쪽)

 

쇼펜하우어는 보이는데로 깐다.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럴수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쇼펜하우어가 존재하고, 쇼펜하우어가 존재할수 있는 지성세계가 존재해야 한다.

 

"세상에 무엇하나 자랑할만한게 없는 가련한 멍청이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자랑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붙드는 것이다. (중략) 영국인의 우둔하고 격이 떨어지는 거짓신앙심에 관해 당연히 경멸하는 말을 하면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50명의 영국인중 고작 1명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즉, 2% / 무일). 하지만 그 한 사람은 대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다. 독일인은 민족의 자긍심이란게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실이 독일인이 칭찬받는 정직성을 증거한다. 하지만 독일인중에도 그런 민족자긍심을 내세우며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그것이 있는 척하는 자들이 있다. (나찌다 / 무일)" (70쪽)

 

사람은 말을 신중하게 많이 해야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을 이해할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사람은 일단 의심해야한다. 그 스스로 무슨 행동을 해도 다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예측할수 없기 때문이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다 믿어서도 안된다. 말과 행동이 적정한 확률로 일치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니 어느 정도의 뻥은 이해해주는 것이 미덕이다.

말하지않는 소인배들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사람에게는 잘해줘야 한다. 절대로 기분나쁘게 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말은 많이 해야한다. 말은 외부로 드러내는 양심이기 때문이다. 

 

"명예는 외부로 드러난 양심이고, 양심은 내부에 숨겨진 명예다. (중략) 우리는 명예 때문이 아니라 단지 명예가 가져다주는 이점 때문에 명예를 사랑한다. (중략) 명예는 목숨보다 중하다는 멋들어진 격언은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 (72쪽)

 

이책은 쇼펜하우어의 말년에 쓴 책이니 1850년경이다. 그런데 시대의 철학자라는 사람의 수준이 이런 정도라면, 지금의 우리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교양이 철철 넘친다.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모든 것, 즉 여성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요구하고 기대한다. 그런데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한가지만 요구한다. 그때문에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그 한가지를 얻는대신 모든 것을, 게다가 결혼관계에서 생기는 자녀들을 보살필 책임을 떠맡는 제도가 정착되었음이 분명하다." (78쪽)

 

계몽의 시대에 갈루아를 절명케 한 결투, 이 결투들이 어떻게 유럽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았는지에 대해 쇼펜하우어가 길게 서술한다. 뭘 하고 있는거지? 답답하지만 시대가 그러하니 철학자는 분석해내야 한다. 참고 따라가보자.

 

"다른 사람과의 평화로운 교제를 중시하는 시민의 명예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매우 존중하기 때문에 완전한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상대에게 인식시키는데 있는 반면, 기사의 명예는 기사 자신의 권리를 100% 옹호할 생각이기 때문에 기사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인식을 상대에게 심어주려는데 있다." (96쪽)

 

기사의 명예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번에는 아주 점잖게 훈계한다. 쇼펜하우어의 왔다갔다하는 글상태가 재미있다. 정상인가 아닌가? 때리는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기사 명예의 기원) 두뇌보다 완력을 더욱 단련했던 시대, 사제들이 이성을 쇠사슬로 꽁꽁묶어두었던 시대, 즉 칭송받는 중세와 중세기사도시대의 산물이다. 다시말해 당시사람들은 신의 보살핌뿐만아니라 신의판결도 받고있었다. 그에따라서 까다로운 소송사건은 신명재판, 즉 신의판결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런데 신의판결이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결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저런 야만의 시대가 있었다니 / 중략) 맹수가 물어뜯는것이 자연스럽고 뿔달린 짐승이 들이받는것이 자연스러운것처럼, 사람의 경우에는 때리는것이 자연스러움을 알수있다. 사람은 사실 때리는 동물인것이다. 그때문에 흔치않은 일이지만 사람이 다른사람을 물어뜯었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하는 반면에, 어떤사람이 때리거나 맞는것은 흔히 일어나는 사건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여긴다. 높은교양을 갖춘사람이 서로의 자제력을 발휘하며 구타하지않으려는 심정은 쉽게이해된다. 하지만 한민족이나 한계급에게만이라도 구타가 살인과 살해를 초래하는 끔직한 불행이라고 믿게하려는 것은 잔혹한짓이다." (103쪽)

 

"Ordeal was one of the medieval judicial systems in which judges decided whether the accused was innocent or guilty by depending on divine power as a last resort. This method was used in cases of the absence of reliable proof: confession of the accused, and witness’s testimony in “occult” crimes like theft, rape, heresy and sorcery. I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making possible small communities’ ability to reach a social consensus without falling into discord on judicial disputes in the age when both natural and human phenomena were regarded as the result of the Providence of God. In the twelfth century, however, the method of ordeal was faced with a crisis due to the intellectual elites’ bitter criticism, the change of social structure and the development of rational thought. A turning point in the history of ordeal was the decision of the Fourth Lateran Council (1215) according to which any clergy was forbidden to celebrate benediction or consecration in all forms of ordeal. Therefore, it was impossible for divine power to intervene in confirming the innocence or guilt of the accused. Almost all forms of ordeal (other than judicial duel) were disappearing in the course of the thirteenth century in western European countries strongly centralizing like France. Even so, confession and torture, as integral parts of ordeal, had the same religious significance in the newly established judicial system well into the late fourteenth century. (13세기 신명재판 쇠퇴의 경계-단절과 연속- / 초록 / 고려대 서양사학과 유희수 / 2012)


신명재판은 판사가 최후의 수단으로 신성한 힘에 의존하여 피고인의 무죄 또는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중세 사법제도중 하나였습니다. 이 방법은 절도, 강간, 이단, 마법과 같은 “비밀스런” 범죄에 대한 피고인의 자백, 증인의 증언 등 믿을 만한 증거가 없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모두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시대에 작은 공동체들이 사법분쟁에서 갈등을 겪지 않고 사회의 합의를 이룰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2세기 지식 엘리트층의 신랄한 비판과 사회구조의 변화, 합리 사고의 발달로 시련방식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시련 역사의 전환점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의 결정으로, 성직자는 모든 형태의 시련에서 축도나 봉헌을 거행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무죄나 유죄를 확인하는 데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프랑스처럼 중앙집권화가 강한 서유럽 국가에서는 13세기에 들어서면서 거의 모든 형태의 시련(사법 결투 제외)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시련의 필수 부분인 고백과 고문은 14세기 후반까지 새로 설립된 사법제도에서도 동일한 종교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유희수의 영문초록을 무일이 번역 / 이 초록에 의하면 결투도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말이된다. 계몽시대까지. 1900년대까지)

* 신명재판(신성재판 trial by ordeal) : 피의자에게 갖가지 위험(시련ordeal 오디얼)을 겪게 하여, 견뎌내는 자를 무죄로 했던 고대 게르만족의 원시 재판 형식으로, 이것이 그대로 중세 가톨릭에 계승되었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신기한 일이다.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902132028005#c2b

 

[역사와 현실]중세의 신명 재판

최근 사법농단 혐의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수사를 받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검찰과 사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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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 훈화와 격언

 

프랑스의 잠언에 "더좋은 것은 정말좋은 것의 적이다"(136쪽)라는 말이 있고, 견유학파는 향락을 즐기려는 우리의 욕망이 고통을 불러오기에 어떻게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좋은말임에는 틀림없으나 현실과 맞지는 않다.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욕망을 추구한 결과, 욕망이 실현되었을때, 와아happiness를 느낀다. 욕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아니라, 적정 확률로 욕망을 실현해간다면, 삶의 의미와 재미와 와아를 맛볼수 있다.

 

그러니, 견유학파처럼 생각하든 아니든, 정답이 없는일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과도하게 편견을 갖고있거나, 답이 없는 답을 하고있다. 그래도 자기점검을 하는 방법은 공감이 간다. 사소한일에도 공감할수있는 사람이 와아한 평정상태에 있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와아한지 대충 알아보려면 그가 어떤 일에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에 슬퍼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 자체로 볼 때 사소한 일에 슬퍼할수록 더욱 와아하다고 할 수 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라야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휴한unhappy 상태에 빠지면 그런 사소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중략) 삶에 대한 시시콜콜한 준비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빈번하고 어리석은 일 중 하나다. 다시 말해 그런준비를 하는 경우 아주 오래 살며 장수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만,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141쪽)

 

말이 앞뒤가 안맞는다. 거짓을 통해 진정한 성향을 어떻게 알수있는가? 대략 짐작해볼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신체와 정신이 거짓 - 옷과 장식, 위선과 편견과 자기변호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대체로 동의할만하다. 거짓이라고까지 과도하게 말하기보다는 삶을 지켜내기위한 적절한 보호막이다.

 

“우리의 신체가 의복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거짓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우리의 존재 전체가 거짓인 것이다. 의복을 통해 신체의 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외피를 통해 비로소 우리의 진정한 성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53쪽)

 

이것이야말로 머리를 때리는 강력한 주장이다.

 

외로운 상황이야말로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므로

그시간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 훌륭한 것은 맞다.

 

그러나,

주장이 강력하다고 해서 꼭 맞는말은 아니다.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삶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외로울때 사룸life의 가련함을 느끼는것 또한

사람다운 일이다.

 

브루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는 천동설과 마리아의 성령잉태설을 부정하여,

3년을 숨어지내다가 잡혀

7년을 고문받고 죽었다. (1600년)

 

공동체의 축복속에 태어난 사룸life은,

공동체를 극복함으로써 비로소 위대해질수 있다.

 

“고독한 상황에 있을 때

 가련한 사람은 자신의 가련함을 느끼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자신의 위대함을 느낀다.

 요컨대 각자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느끼는 것이다.

 

 (중략) 사람의 공동체 본능은

 나이와 정확히 반비례한다.

 

(중략) 난 언제나 고독한 삶을 추구해왔다.

머리가 둔한사람을 피해야지,

그들을 지나서는 결코

광명의 오솔길로 접어들수 없으니까.

(페트라르카 / 중략)

 

조르다노 브루노는 이렇게 표현한다.

지상에서 천국의 생활을 즐기려고한

수많은 사람은

'내가 멀리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154~4쪽)

 

웃음이 나온다. 헛소리도 장광설로 늘어놓으면, 뭔가 있는듯 느껴지듯이, 쇼펜하우어의 장광설에 웃음이 나온다. 뭔가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고독에도 많은 장점과 더불어 사소한 단점과 고충이 있지만 남들과 어울려 지낼때와 비교하면 미미하다. (중략) 오랫동안 계속된 은둔과 고독때문에 마음이 민감해져 별것아닌 일이나 말, 단순한 표정에도 불안해지고 모욕을 느끼거나 마음이 상하는 것이 단점이다. (중략) 사회에 나가서도 어느정도 혼자있는 법을 익히라고 권하고 싶다. (중략) 현명한 사람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면서 어리석은 자처럼 불에 손을 집어넣지 않는다." (169~70쪽)

 

그렇다. 지금 가지고 있는것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벅차다. 내것을 지켜내면 내것을 통해 남의것을 얻을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이 갖지 않은것을 보면 곧잘 '이게 내것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대신에 가끔 '이게 내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라고 물어보는것이 좋을것이다. 내말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것을 잃고나면 어떤 기분이들까 하는 측면에서 마라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은 재산, 건강, 친구, 애인, 아내, 아이, 말, 개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대체로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러한 것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179쪽)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는 우스개소리다. 계몽의 시대에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는데, 쇼펜하우어가 제대로 역할을 했다. '용서하되 잊지말자', '순한얼굴의 사기꾼들이 많다'는 진지한 격언들은, 쇼펜하우어의 우스개소리를 토대로 현실속에서 만들어졌다.

 

"용서하고 잊는 행위는 자신이 한 값진 경험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격이다. (중략) 사람은 같은 상황이 되면 언제나 같은 행동을 할수밖에 없다. (중략)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사람이 상황이 변했는데도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하리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바뀌면 신속하게 신조와 태도를 바꾼다. (중략) 사나운 것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순한것들은 서로를 속인다. 우리는 그것을 세상돌아가는 이치라 부른다." (203~5쪽)

 

쇼펜하우어는 쉬운 상식을 비튼다. 훌륭한 스승들의 이야기도 달리 생각해본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새로운 즐길거리를 던져준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군가가 쇼펜하우어와 같은 생각을 이미 하고있다. 즉, 새로우면서도 새롭지않다.

 

인생이 주사위놀이이고, 다른결과가 나오면 솜씨를 부려 개선하라는 이긍정의 이야기도 신선하면서도 낡았고, 다른 사람의 평가보다 자신의 본능대로 행동하는것이 좋다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험이든, 행운이나 불행이든, 아무리 다양한 형태를 띠고있다해도 과자와 같은 것이다. 모든것은 하나의 반죽으로 만들어져있다. (중략) 인생은 주사위 놀이와 같다. 던진 결과가 자신이 가장 바라던 결과와 다를경우 우연에 의해 주어진것을 솜씨에 의해 개선해야 한다. (아델피 / 중략) 자신(의 행위)를 부당하게 평가하기 쉽다. (다른 사람이 만든) 개념과 (나의) 본능 중 어느쪽이 옳은지 드러난다. 오래 살아야만 문제를 판단할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225~6쪽)

 

세번 읽을때까지는 동의했지만, 다시 읽으니 현실에 적용하기가 어렵다. 현명한 사람을 관상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똑똑해 보이는데 침묵하는 사람이 무섭고 위험해 보인다'로 바꾸는것이 낫겠다. 어차피 뿌리없는 주장이다.

 

"화난 눈초리가 아니라 현명한 눈초리를 하고 있는자가 무섭고 위험해 보인다. 사자의 발톱보다 사람의 두뇌가 더무서운 무기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233쪽)

 

이것은 좋은 각오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하늘이 푸르다고해서 날씨가 언제까지나 좋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른 사람과 대화할때는 즐겁게, 나를 준비할때는 모험을 각오하는 심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자.

 

"하늘에 푸른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는한, 날씨를 의심해서는 안된다." (234쪽)

 

제6장 나이의 차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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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