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 분단의 전례를 따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나누려했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분단은 곧 전쟁이고, 풍부한 남부의 식량이 북부의 생존에 긴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을 기필코 막으려했던 김구와 김규식의 생각 또한 그러했으리라.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국 중심의 나라 이름을 유지하는 이유다. 뭔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먼 남쪽이라니. 받아들이기 어렵다.
"육로와 수로의 교통 모두 좋은 편이었던 통킨, 안남, 코친차이나는 서로 비슷해서 하나의 지역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세 지역이 실제로 통일된 것은 18세기 말, 지아롱 황제의 통치권 아래 들어가면서부터이다. 그는 이 지역 전체에 베트남, 고대 명칭으로는 '먼 남쪽나라(월남)'를 뜻하는 이름을 붙였는데,이는 바로 중국의 남쪽을 가리킨다. 프랑스는 19세기에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하노이에 인도차이나 전체를 지배하는 중앙정부를 두었는데 이때부터 이 세 지역은 더욱 단일지역으로 되었다." (10쪽)
아시아의 봉건제도가 서구가 꽃피운 민주주의로 발전하려면, 식민지 착취라는 값을 치러야 했다. 평화로운 방법은 없다. 자본주의가 온화한 상업을 토대로 세상을 더 평화롭게 만들었다고 보는 핑커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아시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가 이것이다. 봉건상태에서 99%의 시민들은 엄청난 착취와 사룸 life을 빼앗기는 고통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체된 권력이 더 온화했다고는 할 수 없다. 결국은 저항할 수밖에 없었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지원한 것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었다. 공산당에 의한 학살이 너무 커서 핑커는 그것만 보려고 하겠지만, 식민지 지배를 위한 분열지배가, 독립하려는 아시아 국가들을 내전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분열이 문제였다. 4천만의 중국인을 희생시킨 마오쩌둥의 유토피아 전제주의와는 다르다. 어쨋든 지금의 자본주의는 온화한 상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프랑스는 중국 위주의 학교 교육 대신에 프랑스식 교육을 도입함으로써 식민지라는 관에 못을 하나 더 박았다.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빈곤한 토착민의 이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면 베트남인에게 자국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도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한자 대신에 베트남어 표기를 로마자로 바꾸도록 했다. 이 편이 언어를 배우기도 훨씬 쉬워지고 문맹률도 낮출 것이라고 여겼다.
프랑스인이 베트남인의 교육에 간섭한 결과, 인구에 비해 일반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교사가 부족해졌고, 오히려 이전까지 농민들이 받았던 단순한 교육마저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인이 넘겨받기 전까지는 교사 한 명이 외양간에서 가르치는 정도이기는 했어도 수만 개에 달하는 마을 학교가 있었다. 이것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프랑스 학교나 프랑스식 베트남 학교로 대체되면서 수백 개로 줄어들었다. 서구식 관점에 의하면 교육의 질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교육 보급률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게다가 프랑스인은 최종 결과에 내재한 위험한 면을 간과했다. 베트남인은 프랑스 학교에서 교육받고, 프랑스식 사고를 배우고, 프랑스 조직(사회, 경제 혹은 정치 분야)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바라지만, 자신들에게는 평등한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분개하는 반프랑스 엘리트가 되었다." (23쪽)
사람에 대한 평은 느낌일 뿐이므로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이렇게 느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우리들은 보고 느끼고 감동하지만, 지킬 것이 많은 분들은 보고 경계하고 배제한다. 그래서 호아저씨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케네디나 닉슨이나 드골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개념을 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라는 의미로 '호혜주의'가 적당할 것이다. 호치민의 직관은 머리보다는 가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그 감동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무엇이 어려운 일인가?'
호치민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응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국민의 사랑을 얻었고 나아가 수천에 달하는 미국 젊은이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전쟁이 아무리 잔인한 것이라 해도 그의 사람됨의 본성이 그들의 사람됨의 본성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97~8쪽)
늘 그렇듯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닭이 한 번 울었는데도 새벽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는다. 작은 첫 걸음을 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 무수한 닭이 시끄럽게 울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즐겁게 해 나가야 한다.
"닭이 한 번 울었건만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82쪽)
황포군관학교는 참으로 대단한 곳이다. 중국과 베트남, 한국을 비롯한 모든 아시아의 독립운동세력을 키워낸 곳이다. 이념이 갈려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지만, 적어도 반제국주의 전쟁에서는 힘을 합칠 수 있는 토대가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소련은 아시아의 친구였다. 레닌의 이른 죽음과 그의 후계자들이 제대로 된 길을 가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쉬울 뿐이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죽었고, 스탈린이라는 살인자를 후계자로 남겨서, 그 업보로 역사의 빛이 되지 못했다. 이 책은 이제 베트남에 남겨져서 누군가에게 읽히거나 버려질 것이다. 그 또한 운명이다.
"쑨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군사전문가 미하일 보로딘이 이끄는 사절단이 광둥으로 파견되었다.
호치민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보로딘을 수행하도록 선택됐는데, 첫번째는 그가 극동문제 전문가라는 사실이고, 두번쨰는 그가 광둥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세번째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데, 그가 남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상당수의 베트남인을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호치민은 보로딘의 도움으로 그의 동포들을 황포에 있는 사관학교에 보냈다. 그의 미래의 동료들은 정치훈련뿐만아니라 군사훈련까지 받았다."(106~110쪽)
베트남에서 미국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민주주의인데, 공산주의만큼이나 흉악한 독재정부를 지원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비참한 현실을 알면서도 미국은 공산당 보다는 고딘디엠을 선택했고, 호치민과 남부 시민들의 선택을 부정하는 거짓말을 했고, 그 결과가 죄없는 미국 병사들의 희생이었다. 이념이 무엇이든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느냐가 그 사회 진보의 핵심이다. 우리도 많이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시민들이 위대하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진보시민들은 만나기가 어렵다.
"디엠의 탄압으로 남부 저항운동의 핵심인물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거의 모든 사람을 마음대로 재판없이 사형시킬 수 있었다. (중략) 1960년 말 경에 디엠이 베트콩이라고 불렀던 여러 부대가 모여 하나의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이 나중에 베트민 이상으로 유명해진 민족해방전선(NLF)이다. 미국 선전기관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이 단순히 하노이의 앞잡이일 뿐이라고 했다. 민족해방전선이 앞잡이일 뿐이고 민족해방과 연관이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는 미국이 현실을 무시하기로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상 남 베트남 국민 대부분은 이 조직이 자신들 안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이 조직을 지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미국이 잔학행위(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죽여버리는 끔찍한 행동)를 했던 한 가지 이유는 자신들이 해방시켜주러간 나라의 사람 모두가 왜 자신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지 그들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침입에 위협 당하면서 오로지 구해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대다수 사람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교육받았다. 그런데 국민 대부분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에 미군은 충격을 받고 사기마저 잃을 지경이었다.
한 미국인은 이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적었다.
'미국에는 세 종류의 적이 있다. 하나는 베트콩이고, 다른 하나는 남 베트남 사람이다. 그러나 가장 큰 적은 미국인 자신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대한 집착이다. 속임수에 넘어간 나라는 전쟁에 승리하지 못한다." (281~2쪽)
다시 반추해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이 끔찍한 전쟁에서 호아저씨와 베트남의 시민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승리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과 베트남 사이의 교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결국은 호치민이 그렇게 원했던 평화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공산당 정부도 가능하다는 것을, 지금 미국은 이해하고 있을까? 물론 경계하는 마음이야 있겠지만, 괜히 우리 병사들을 희생시켰네 하며, 깊이 반성하고 있을까?
"미 공군의 화력은 적을 1이라고 했을 때 1,000이다. 우리 지상군의 화력은 10대 1 정도로 우위에 있다. (중략) 1967년부터 1969년까지 그 끔찍한 기간 동안 호치민은 목청을 높여 반미 선전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전쟁터에 나왔던 기자 네 명 중 세 명은 가책을 느끼면서 회의하거나 드러내놓고 미국의 전쟁 개입을 반대했다. 이 전쟁을 보고 있으면 프랑스의 더러운 전쟁(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인도차이나 전쟁)조차 깨끗해 보일 지경이었다." (302쪽)
세상에 공산당을 남겨두면, 그들이 미국의 시민들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는, 미국의 두려움은, 구하기 위해 파괴하는 놀라운 거짓말을 완성해낸다. 그래, 그렇게 살아도 뭐라는 사람이 없지? 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기도 힘든데, 대안의 진실이라는 둥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대면, 가련한 미국시민들만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지면을 따라 독가스처럼 퍼져 올라오는 언어, 통찰력, 감각의 부패는 때로 자신 스스로 어설픈 모방을 창출하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1968년 구정(테트) 공세 당시에 벤쩨 지역을 파괴한 것에 대한 변명일 것이다. 한 미군 장교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벤쩨를 구하기 위해 그곳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303~4쪽)
호 아저씨를 기억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좋다. 누구도 그런 커다란 희생을 치르면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에 다시 그를 기억하고 떠올려야 한다면, 그곳에는 이미 지옥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호치민을 또 읽는가?
나는 그가 바라던 평화로운 베트남에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와아한 happy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현재의 평화는 그들의 조상들의 눈물겨운 고통 뒤에 얻어진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잃으면, 지옥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기억하자. 호아저씨의 일생을 기억하자.
"《뉴욕 타임즈》는 전 세계의 찬사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와 가장 심하게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조차 체구가 작고 허약한 호 아저씨에 대해 숭배와 존경의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
《타임》지는 그의 얼굴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이런 극적인 경우는 이번이 네번째였다. 《타임》지는 한때 미국이 제일 먼저 타도해야 할 적으로 지목했던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바쳤다.
호치민은 외세에서 해방된 통일 베트남의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고통받는 그의 조국의 1,900만 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박 호호 아저씨)'인 그를 이해했다. 남 베트남인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현재 살아 있는 민족 지도자 가운데에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호치민은 적의 총탄에 쓰러지는 운명을 타고나지는 않았다. 그는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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