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갖자 짜증이 사라졌다.
계획은 이랬다. 천재가 토요일 오전에 천안아산역에서 용산역으로 이동해야 해서 일정이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잘 짜여졌다. 숙소에서 역까지 무려 2시간이 걸린다.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는 가까운 듯 보이는데 멀다. 좋게 생각하면 정겨운 지방도로로만 연결된 오지다.
오전 8시에 일어나서 준비했어야 하는데, 8시 반이 넘어서 느릿느릿. 9시 40분에 학교에 가서 짐을 챙겨온다. 34년만에 학교를 떠나는 그리미의 짐이 매우 가볍다. 10시 10분부터 줌회의 준비를 하고 12시 반까지 회의를 했다. 정신이 없다. 일단 출발.
서산 시내의 맛있는 만두집은 재료 소진으로 문을 닫았다. 옆 구간에 있는 순두부집으로 갔더니 주방이 닫혔단다. 아직 2시 반도 안되었는데 무슨 소리? 주방에 다녀 오더니 주문을 하란다. 깔끔한 밑반찬에 괜찮은 수준의 순두부.
서산에 왔으니 축협 한우프라자를 들려서 가자. 경유지로 찍었는데, 네비 볼륨을 올리지 않아서 모르고 그냥 통과. 헐. 그냥 갈까 하다가 인근 농협에 들러 고기를 사려고 이름도 모르는 커다란 하나로마트에 갔더니, 부채살과 제비추리 할인. 3개를 샀더니 적다고 더 사란다. 분부대로 할인 안 되는 안심 한 개 추가. 합계 1kg이 못된다. 오뚜기 참기름과 허브 소금, 귤 한 상자, 과자와 빵까지. 대충 10만원이 넘는다. 출발.
해안사구 생태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거의 다섯 시. 서둘러 서해랑길 70코스 학암포 방향으로 걷는다.
아, 멋지다. 신두리 해안 사구 ~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걷는다. 어디까지 갈까? 30분만 더 걷자.
왼쪽 귀는 시리고, 오른쪽 귀는 따뜻하다. 버프 쓸까?
참자. 참는 것도 삶이다.
사구가 끝나자 소나무 숲길이 이어지고, 숲길이 끝나자 산길이 이어진다. 가파르지만 짧아서 오를만 하다. 모재에 올라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학암포로 갈 것이냐 돌아갈 것이냐. 돌아가기로 한 결정은 훌륭했다.
예쁜 이름들은 억지로 지은 것이 아니라 내용을 담아내는데 충실해서 자연스럽게 얻어졌다
1) 작은별똥재 : 작은 별똥별이 떨어진 고개
2) 순비기언덕 : 꿀풀과의 예쁜 꽃이 피는 순비기 나무가 자라는 언덕
3) 염랑게달랑게 : 바닷가의 작은 게들 : https://www.ktsketch.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78
신두리 해안사구 둘레길을 아주 잘 정비해 놓아서 남녀노소 모두가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다. 천재가 유학을 가게 될 경우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우리는 어떻게 할까. 의논을 하다가 갑자기 미국에서 2년 정도 생활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을 지원해 주는 부모들을 위해 F2 비자가 나온다고 한다. 좋은데, 우주신은 어떻게 하지?
집은 어디에 구해야 안전하지, 차는 어떻게 할까, 식량은 어디에서 조달하지, 기차역은, 시내버스는?
유학을 가서 무슨 공부를 어느 교수와 함께 할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낼지를 고민하고 있다.
삶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살아야 한다.
2시간 남짓 12,000보를 걸어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훌륭한 산책 코스였다. 숙소까지는 12분. 오래된 숙소다. 앉은뱅이 식탁에 낡은 화장실. 그래도 주방과 식기가 모두 괜찮았다. 너무 낡았으니 바꾸면 더 좋을텐데, 너무 투자를 안하신다.
밥을 하고, 고기를 굽고 술 한 잔. 야, 안심 끝내준다. 오뚜기 참기름과 소금을 섞은 장에 찍어 먹으니 살살 녹는다. 부족하다고 4개를 사 왔는데, 2개 먹고 났더니 다들 배부르다고 떨어진다. 귤로 후식. 오랜만에 일정을 일찍 끝냈다.
오전에는 조바심이 나서 힘들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시간에 쫓기니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솟아난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다, 그러니 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특히,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핀 경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