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룻배를 바라보다가 "자연농법"에 사기 당한 생각이 났다. 조상들의 지혜와 일본인들의 되지도 않는 자연농법을 섞어 대단한 것인 양 자연농법을 설파한 그는, 흔들리는 배 위에 거대한 수조를 설치하고 바닷물을 받아 말리면, 염전보다 훨씬 빨리 천연 소금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바닷물이 태양빛을 받으면 소금이 만들어진다는 말은 그럴싸하다. 그게 과연 판매 가능한 양이 나올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런 그에게 "자연농법이 가능하다는" 사기를 당했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거제 해양레포츠센터에 차를 세우고 21코스를 시작했다. 조금 가다가 예쁜 카페를 만났는데, 그리미가 케익을 먹고 싶단다. 돼지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왔지만 나도 그러고 싶었다. 벌써 다리도 아프고. 커피 한 잔과 블루베리 케익을 먹으며 가까운 지세포 바다와 먼 옥녀봉을 바라보기에 좋았다.
가까이서 봤을 땐 흉물스러웠는데, 멀리서 - 바다에 빠질듯이 옥녀봉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니, 괜찮다.
지세포진성 주변은 온통 라벤더 밭으로 가꾸고 있다. 거제가 참 따뜻하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가뭄이야기 - 파주 군대 다녀온 이야기 - 초가지붕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고향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칭찬을 했으니, 그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겠는가. 촌로의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 말 걸기가 무섭다. 갈 길이 먼 나그네라서.
옛날 남해 바닷가에 할머니 한 분이 나에게 말했다.
“바다가 뭐 볼 것 있노. 산이 볼 곳이 많지”
그 말이 산에 사는 나를 부러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오늘 이산을 오르며 한산으로 이어지는 앞바다를 내려다 보니,
“우리 동네는 바다를 바라보며 산을 오를 수 있는 동네야.
진정 아름다운 마을이지”
그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게다.
어제는 너무 무리하게 걸었다. 오늘은 30분 마다 앉아서 쉬자. 원하는 장소에는 휴게 시설이 없다. 내일부터는 의자를 가지고 다녀야겠다. 저 멀리서 그리미가 낙엽 받는 소리가 들리냐고 묻는다. 잘 들린다.
지세포 봉수대는 45분 450m 앞인데 다리가 아프므로 통과. 실수였다. 흙길은 사라지고 포장된 임도길이 나오니 힘들어진다. 지세포 봉수대를 올라 갔다 내려 오는 것이 좋았다. 포장된 임도를 따라 걸으니 볼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산 길을 걸으면 민들레 한 포기라도 만날 수 있는데, 인간이 만든 산 길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안전하기만 할 뿐이다.
삶을 움켜지고 살자.
고통을 움켜지고 살자.
가끔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삶은 충분하다.
나는 누구의 가슴에도 발을 올리고 싶지 않다.
초소를 지나 30분을 걸어 드디어 봉수대 가는 길을 만났다. 거제 와현봉수대. 돌더라도 이쪽으로 간다. 봉수대로 오르기 전 홍삼진액을 마시고 기운을 북돋웠다. 수직 절벽에 가까운 엄청난 경사가 평면 사진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왜놈들을 무찌른 한산도 앞바다가 손에 잡힐듯 보인다. 한산 앞바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았다. 승리의 기억이.
호두과자와 약과와 누룽지 숭늉으로 점심을 먹었다. 어제보다 따뜻해서인지 두 병의 물이 바닥이 나고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두 모금의 물을 남겨두고 봉수대를 떠난다.
결국 출발지로 돌아왔다. 아무리 애를 쓰며 길을 찾아 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길로 돌아내려 왔다. 힘들었다. 그렇지만 즐거웠다.
https://www.youtube.com/watch?v=ZnYfTvmCO30
https://www.youtube.com/watch?v=Ij_RejJqwLI
20km를 하루종일 걸었는데, 택시로는 10분 거리다. 생선구이 정식(15,000원)으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대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산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다 물거품처럼 살아지듯이, 나의 고통도 조국 가족이 겪는 고통도 포말처럼 사라질 것이다. 필멸의 인간은 죽기 전까지 행복하다고 말해서는 안되고, 미래에 사는 인간의 현재의 고통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미래는 반드시 실현된다. 생각한 대로 실현하는 존재, 그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