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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자유에 대하여 On liverty_J. S. Mill ] 결론은 참이지만, 뿌리가 없는 미신일수도 있다_221118 el dieciocho de noviembre el viernes_восемнадцать ноябрь Пятница

[ 옮긴이 머리말 ]

 

1859년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고, 밀이 자유론을 썼으며,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했다.

 

조국은, '현대 사회의 시민들이 읽어야 할 첫 번째 책'을 이 책 '자유에 대하여 on liverty'라고 했다. 이 책을 번역한 법학자 박홍규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왜곡된 자유의 이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고전이라고 불리는 밀 Mill의 '자유에 대하여'를 직접 읽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자유'와 '기업의 무제한 자유'를 강요받아 왔다. (중략)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국가보안법을 유지하여 ‘재산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공산당을 막자는 것이 우리의 ‘자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자유’는 밀이 말하는 자유의 전부가 아니다.”(2%)

 

“밀 Mill이 만약 지금 우리나라 대학에서 발간하는 저 수많은 논문집에 싣고자 이 글을 제출했다면 아마도 어디에서나 거부당했으리라. 실제로 그는 교수로 근무한 적이 없이 평생을 주로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그가 에세이라고 한 이 책은 센티멘털한 신변잡기의 넋두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인류의 ‘고전’, '명저' (이면서 / 중략) ‘자유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나 검토’ 정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중략) 수많은 맞서는 의견이 상충하는 우리 현실에 그 모든 의견의 평화공존을 위한 최소 조건의 틀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미 수많은 자유국가에서는 그런 틀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즉 다람=다른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사람은 자유라는 것이다.”(1%)

 

계몽시대에는, 모든 것이 부족한 가운데, 과학과 사상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다. 계몽시대의 학자들이 다들 가지고 있던 문제나 한계는, 시대의 야만에서 비롯되었다. 그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그런 부분에 대해 비판하면서 읽을 수 있다. 밀은 백인중심의 제국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밀이 그의 아버지를 이어 17세부터 52세까지 거의 평생 동안, 인도를 지배한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 회사원을 지냈다고 하는 점과 함께 《자유론》에 나타나는 인도나 중국을 비롯한 비서양 세계에 대한 경멸 탓이었다. (중략)  말하자면 밀은 조선총독부 관리로서, ‘후진’ 조선인에게는 전혀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선진’ 니뽄사람을 위한 《자유론》을 쓴 것과 다름이 없었다”(4%)

 

"주 1 : “그러나 《자유론》 2장 원주 5에서 말하듯이 밀은, 인도에서 세포이 반란이 터졌을 때, 영국의 여론이 인도인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될 수 없다고 하자, 이에 반대했다. 물론 밀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지 않았고, 《자유론》 1장에서도 식민지에서 자유가 대체로 허용될 수 없다고도 했으나, 적어도 19세기 영국의 상황에서는 밀만큼 식민지의 자유를 적극 옹호한 사람도 없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밀이 자유에 대하여를 쓴 배경이다. 자유가 없던 시절이어서 자유론을 쓴 것이 아니라, 자유-인권-평등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가 태동하여 발전하던 시기에, 다수에 의한 민주주의 지배 아래서의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정의 원리를 다수자 지배라고 하고, 그것은 다수결, 특히 선거의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밀이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대중이 지배하는 시장 민주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19세기 이전, 소수자가 다수자를 지배한 시대에 대한 자유 추구로 나타났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대중이라는 다수가 지배자가 되면서 모든 사람에게 그 다수자와 같기를 요구하자 그것에 저항하여 밀이 《자유론》을 쓴 것이다. 즉 그 책은 그런 다수결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획일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집단주의에 대한 의문 제기다.” (4%)

 

[ 1장 서론 ]

 

[ 박홍규의 해설 ]

 

멋지지 않은가, 친구이자 아내가 공부의 동반자라니. 자유에 대한 이야기보다 이 이야기가 더 좋다. 마음이 따끈해진다. 역사에 길이 남은 명저가 아니어도 좋다. 친구이자 아내인 사람과 함께 읽고 공부하고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서 다시 평가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새벽에는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나서 텃밭을 가꾸고, 음악과 도화지와 책을 벗삼아 한낮의 즐거움을 누리다 저녁에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집뜰을 바라볼수 있다.

 

“그녀와의 사랑스럽고도 가슴아픈 기억에 이책을 바친다. 나의 친구이자 아내였던 그녀는, 나의 저술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 모두를 불러일으켰고 그 일부의 저자였다. 진리와 정의에 대한 그녀의 숭고한 감각은 나에게 가장 강한 자극이었고, 그녀의 동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보상이었다.” (5%)

 

토크빌은, 귀족과 왕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자유가 보장된 전제군주 시절이 끝나고, 다수의 시민에 의한 자유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유가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논한다. 나는 혹시, 계몽 시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정치의 자유가 확보되고 민주주의가 수립된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자유 문제'는, 민주정이라는 ‘다수의 폭정’ 하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이어받은 주장이다.” (토크빌, 5%)

 

1. 이 책의 주제와 자유의 의미

 

밀은 자유를, 시민이 부여한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자가 행사하는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유란, 공동체를 유지하는 속에서 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난 시민의 자유라 할 것이다. 어렵다. 밀의 자유는 권력의 통제로부터의 자유다.

 

"공동체의 약한 구성원들이 수많은 독수리 떼의 밥이 되지 않게 하려면, 독수리떼 가운데 더욱 강한 사나운 독수리에게 나머지 독수리들을 억제할 수 있는 임무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중략) 구성원들은 독수리왕의 부리와 발톱을 항상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애국자들은 지배자가 그 공동체에 행사하는 권력을 제한하려고 했다. 이러한 제한이야말로 그들이 자유라고 생각한 바로 그것이었다." (7%)

 

밀은 계몽시대에 권력을 제한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1) 권력자에게 시민과 국가를 대표하는 특권을 인정하되,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의무 위반으로 시민의 저항을 정당하게 행사하게 하는 것, 즉 특권과 저항권을 인정함으로써 권력을 제한한다.

2) 견제의 확립, 즉 권력 집단 상호간의 견제를 통해 권력을 제한한다.

 

2. 민주 국가의 권력을 제한해야 할 이유

 

다수결의 원칙을 지키되 소수의 의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다수의 폭정이라는 민주정의 해악을 막으려는 민주정치의 마무리였다.

 

"인민의 의사란, 실제로는 인민 중에서 대다수의 의사를 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다수자 또는 자신을 다수자라고 인식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의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 그 구성원의 일부를 억압하려 할수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략 / 민주정에서) '다수의 폭정'이란 이제 사회가 경계해야 할 해악에 대체로 포함되었다." (8%)

 

3. '사회 권력'의 문제점과 '홀사 자유'의 필요성

 

다수의 폭정은 정치의 억압과 사회의 억압으로 나뉘는데, 사회의 억압이 사람의 정신 그 자체를 노예처럼 만들고 이것을 피할 방법도 많지 않다고, 밀은 지적한다.

 

과거에는 유교 전통들이 한국 사회의 억압으로 남아 있었다면, 현대에는 무엇이 있을까? 성소수자와 다라노=에일리언 워커와 같은 여러 소수자들, 문신, 옷차림, 애정 표현 정도일까? 다수의 폭정이 덜한 나라일수록 깨어있는 나라로 간다.  

 

"위정자의 억압에 대한 보호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와 함께 널리 퍼져있는 우세한 여론과 감정의 억압에 대한 보호 (중략) 사회가 그 자체의 관습과 조화되지 않는 어떤 개성의 발전도 저지하고, 되도록이면 그 형성을 가로막으며, 모든 성격을 사회의 모델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경향에 대한 보호도 필요하다." (9%)

 

4. 홀사의 홀로서기와 사회 통제의 조정 원리

 

다르게 생각하기, 그렇지만 말하지 않으면서 나에게만 적용하기. 이것이 중요하다. 다르게 생각하되 나에게만 적용하기.

 

"(행동을 규제하는 원리는) 모든 사람은, 자신과 그가 공감하는 사람들이, 다람=다른사람들에게 행동하도록 원하는 행동을, 스스로 해야 한다고 하는 감정이다." (9%)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월한 계급의 이익과 우월감에서 비롯된다. 유행은 그래서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우월한 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도덕은=윤리는, 결정된 것이 아니고 = 이치에 맞는것이 아니고, 지배계급의 도덕이며 =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것이며 = 지배계급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이 찬양되고 무엇이 비난되어야 하는가 (중략)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한 욕망이나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공포, 즉 정당하거나 부당한 이기심이다. 우월한 계급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나라 도덕의 대부분은 그 계급의 이익과 우월감에서 발생한다." (9%)

 

5. 행동 규범의 원리

 

사회(국가=정부)는, 부여받은 권한으로 홀사=인디비듀얼의 무엇을 그리고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있다.

그렇지만, 시민들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밀은 말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가거나 현재를 개선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선호나 혐오가 홀사를 제한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사회가 무엇을 선호하고 혐오해야 하는가를 탐구했다.”(10%)

 

사회의 선호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해 밀은,  종교의 문제를 지적한다. 종교는 나름의 도덕 기준을 갖고 있지만, 그 기준을 너무 넓게, 다람에게까지 적용하는 바람에 혐오의 감정이 일어나고 만다. 종교를 대신해서, 정치나 생학=필로소피를 대입해도 믿음의 진지함이 너무 강렬하면, 똑같은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을, 밀이 설명하고 있다.

 

“종교 신조의 경우다. 이는 여러 가지 점에서 교훈이다. 특히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점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종교의 견해 차이에 따른 혐오도, 진지한 광신자 사이에서는 도덕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사례기 때문이다.”(10%)

 

홀사의 행동에 대한 사회(국가=정부)의 통제를, 넓히자는 의견과 줄이자는 의견이 부딪힌다. 사룸에 직접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통제는 점점 더 줄여나가야 한다. 걷은 세금을 시민들을 위해 쓰고, 자유로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회여야 한다.

 

의견이 다른 정책들이 제시되었을 때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이나=이야기나누기=컨버세이션을 통해 그때그때 결정을 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스스로의 입장에 집착하다보니 부딪힌다. 누구의 이야기도 맞을수 있다. 나란히 달리는 느낌이다.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다면서 이나를 막거나, 이나하다가 일어나는 말싸움 자체를 싫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현명한 시민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이나를 포기하거나 부딪히는 것이 싫어서 돌아서서는 안된다. 참 어려운 일이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할 시민의 권리이며 의무다. 이나의 목적이 고끄를=어그리먼ㅌ를 이끌어 내는 것이라면, 누가 누구를 설득하든, 참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해야 하는가? 아니다. 차분하게 참마음을 담아서 내 뜻을 끊임없이 펼쳐나갈 수밖에 없다. 열린귀와 열린마음으로. 

 

“어떤 사람들은, 성취해야 할 선善이 있거나 교정해야 할 악惡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언제나 국가를 자극하여 그 일을 하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어떤 부분들에 또다른 부분을 더하기보다는 도리어 사회에 약간의 해악을 주더라도 사회의 악을 인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11%)

 

밀은, 홀사의 삶이 어떤 원리에 의해 제한될 수 있는가를 결론지어 놓았다. 최소의 침해를 위해서 밀은 아주 쎄게 말한다. 홀사는 주권자로서 다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뜻에 반하는 것을 강요받을 수 없다.

 

“인류가 홀사이거나 집단으로, 어떤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보장받는 유일한 근거는, 자기보호Self-protection라는 것이다. 문명사회의 어느 구성원에 대해, 그의 의사에 반해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란, 다람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는 경우뿐이다.”(11%)

 

자유에 대해 멋진 정의를 내려놓고도 밀은 계몽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사람에게 능력과 지성의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이다. 시대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고, 우리는 그의 문제를 인지하고 개선하면서, 그 깊생=컨템플레이션의 열매를 누려야 한다.

 

“오로지 자신만 관련된 경우, 그의 인격의 독립은 당연한 것이고 절대불가침이다. 자신에 대해, 즉 자신의 몸과 정신에 대해 각자는 주권자다. (중략) 이러한 이론은 능력이 성숙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중략) 야만인을 다스리는 경우, 전제 정치는, 목적이 야만인의 개량에 있고, 그 수단이 목적을 실현하는 데 정당화되는 한 합법 통치 형태다.”(11%) 

 

6. 자유의 공리성 utility에  따른 구분

 

자유로운 행동이 공리에 부합해야 하느냐의 여부는 중요한 문제다. 특히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한다는 밀의 생각은, 당시의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홀사의 책임을, 특히 자유를 제한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수수방관하는 것에 대해, 행동하는 것 이상의 책임감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에서도 이런 문제 의식은 여전하다. 다만, 논리를 풀어나가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지식인의 책임에 대한 밀의 주장은, 1894~1906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러나고, 다.

 

* 공리주의 = 유틸리테리어니즘  

 

"사람은 자신의 행동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 어느 경우에도 그는 당연히 그 침해를 이유로 타인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12%)

 

7. 자유의 세 영역

 

밀이 생각하는 자유의 영역에 대해, 내가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단결의 자유다. 사람의 자유는, 관계 맺기의 자유를 통해서 완성된다. 홀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적을 갖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사람의 기본 속성이다. 자유의 영역을 보장하지 않는 정치 체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개인과 사회 모두 더 많은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첫째, 의식의 안영역=인터널섹터를 포함한다. 즉 가장 넓은 의미의 - 사상, 종교, 도덕, 세마=사이언스 등을 추구하는 생각과 양심의 자유를 요구한다. 둘째, 결과를 받아들이는 취향과 탐구의 자유를 요구한다. 셋째, 동일한 한계 내에서 홀사들의 단결의 자유를 요구한다. (중략) 이러한 자유가 없는 사회는 그 통치 형태가 어떤 것이든,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중략 / 뭇사람은) 각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생활하게 하는 것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는다." (13%)

 

8. 자유에 대한 사회 통제의 폐해

 

밀이 다수에 의한 폭정을 말하면서 계속 우려하는 것은, 사회(국가) 권력이 개인에게 부당하게 작용하는 압력이다. 사회는 다수가 대표해서 이끌어간다 해도, 홀사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수의 결정이 힘을 갖는 민주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할 자유를 무시하는 '절대악'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항상 탱자울타리를 치고 사회의 침탈을 막아야 한다. 80억의 인류는 80억의 세계를 가진 존엄한 사룸이다.

 

"세계에서는 대체로 여론의 힘과 심지어 법의 힘으로 사회 권력의 요구를 개인에게 부당하게 집어넣으려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경향이, 사회를 강화하고 홀사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는 이상, 그 일은 자동으로 소멸될 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반대로 더욱더 가공할 만한 것으로 성장할 악 가운데 하나다." (14%)

 

[ 제2장 ] 사상과 토론의 자유

 

말하게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수록 더 좋다. 의견들이 나눠지다 보면 참과 거짓을 얻게된다.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한가지 의견이라 하더라도, 뭇사람이 한사람의 입을 닫게하는 것이 옳지않은 것은, 이 한사람이 권력을 가질 때 그가 뭇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략)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은 특별한 해악을 낳으니, 그것은 현세대는 물론 차세대를 강탈하는 셈이다. (중략) 그 의견이 옳다면, 인류는 오류를 진리와 바꿀 기회를 박탈당하는 셈이다. 그 의견이 틀리다면, 인류는 거의 이에 못지 않게 큰 혜택을, 곧 오류와 부딪혀서 창조되는, 진리에 대한 더 분명한 지각과 더 선명한 인상을 잃는셈이다.


(중략) 우리는 우리가 질식시키려고 노력하는 의견이 거짓된 의견이라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확신한다 해도, 그것을 질식시키는 것은 여전히 악일 것이다.


(중략) 그들이 어떤 의견이 허위임을 확신한다는 이유로 그 의견에 대해 청취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확실성이 절대 확실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토론을 침묵시키는 것은 무류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중략) 모든 사람이 자신이 오류를 저지를수 있음을 잘 알지만,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 예방책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또 그들이 아주 확신하는 어떤 의견이 그들 스스로 저지르기 쉽다고 인정하는 바로 그 오류의 한 예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독자 판단에 대해 확신이 부족한 것에 비례하여, '세계' 일반의 무류성에 묻따않고=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뢰를 보내며 의지한다. 

 

그리고 홀사에게 세계라는 것은, 그가 접촉하고 있는 세계의 일부, 곧 그의 정당, 그의 종파, 그의 교회, 그의 사회계급  등등을 뜻한다. (중략) 하지만 홀사처럼 시대도 무류일 수 없다는 것은 무수한 주장으로 증명될 수 있을만큼 명백하다.


모든 시대의 많은 의견들이 후대에 가서는 잘못된 것일 뿐만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라고도 간주되었다. (34~5%)

 

사람은 어떻게 참에 이를수 있을까 = 잘못을 바로잡을수 있을까 =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수 있을까? 이나와 경험과 세마=사이언ㅅ로 참에 이를수 있다. 이나가 필요한 까닭은, 경험에 대한 풀이 때문이다.

 

"사람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실수를 교정할 수 있다. 경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 어떻게 풀이될 것인지를 보이기 위해서는 이나가=이야기나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잘못된 의견과 관행은 점차 사실과 논증에 굴복한다. (중략) 누군가의 판단이 정말 믿을만하다고 할 경우에, 어떻게해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그가 자신의 의견과 행동에 대한 비판에, 정신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36%)

 

기독교의 힘은 열려있는 생각에 있다. 아무나 성인을 만들수 없으니, 성인을 만들려면 어떤 길을 거쳐야하는지를 안다. 악마에게도 발언권을 주는 것이, 만들어진 성인을 성인답게 받들수 있는 길이다. 교황청이 성인후보자를 지정하고 그 후보자에 대한 악마의 대변인을 지정하여, 하느님의 대변자와 이나하게 한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수 없다. 지금은 이 제도가 사라졌지만, 그 뜻은 남아있다. 밀은 이것을 토론의 자유의 본보기로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인을 승인하여 성인품에 올릴 때 조차 '악마의 대변자'를 들여 그의 말을 끈기 있게 귀기한다=귀기울여 듣는다. 가장 성스러운 사람도 악마가 그에 반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말하여지고 저울질되기까지는 죽은뒤의 명예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36%)

 

ㅇ말하는 내용은 그리 어렵지도않고 마음에 콕콕 들어와 박히는데, 글은 너무 어렵다. 아무래도 공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모두를 알고 넘어가면 좋겠다.

 

1) 신의 존재를 믿는것 - 신이 다스리는 저승세계가 있다는 것 - 누구나 지켜야할 도덕이 있다는 것

    위 주장들은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주장이고, 이 주장을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법한 말을 하고 있다.

    위 주장들은 틀림없는 참이므로 이들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2)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하는것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나와 뜻이 같든 아니든, 반대편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3) 사회가 받아들일수 없는 생각을 말하는 것을, 막는것도, 막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어떤 생각을 사회에서 = 많은 사람들이 불경하거나 부도덕하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을 지키려고 말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은, 스스로를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4) 어떤 생각이 불경하거나 부도덕하다고 해서, 그 생각에 반대하는 생각이 틀림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가장 나쁜, 틀림없음의 가정이다.

 

5) 틀림없음을 믿는 사람이 저지르는, 다른 생각을 억눌러 버리려는 잘못들은, 생각이나 믿음들이 바뀌어도 똑같이 흉내내듯이 되풀이된다.

 

"1) 이의가 제기된 의견이 신과 내세에 대한 믿음, 혹은 흔히 받아들여지는 도덕 신조에 대한 믿음이라 하자.

이러한 기반 위에서 싸움을 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은 반대자에게 큰 이점을 주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 정직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속으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이 신조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만큼 확실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당신은 신에 대한 믿음에 확신을 가지는 것이 무류성을 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2) 그러나 내가 무류성의 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 신조(그것이 무엇이든)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무류성의 가정은, 다람들로 하여금 반대편의 말을 들어볼 수 있게 하지 않고 다람들 대신에 그 문제를 결정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가장 숭고한 신념과 함께하는 편에서 이런 허세를 부린다고 해도 이를 똑같이 탄핵하고 비난하는 바이다.

 

3) 어떤 의견이 허위일 뿐만 아니라 유해한 결과도 낳는다는 것을 - 유해한 결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전적으로 비난하는 표현을 채택한다면) 부도덕하고 불경스럽기도 하다는 것을 - 누군가가 아주 분명한 설득력으로 보여 준다고 하자. 그리고 그의 그 사적인 판단이 그의 나라나 동시대인들의 공적인 판단에 의해 지지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그가 그 사적인 판단에 따라 그 의견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발언하는 것을 막는다면, 그는 무류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4) 그리고 그 의견이 부도덕하거나 불경스럽게 여겨진다 해서 그 가정이 덜 혐오스럽거나 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그것은 모든 경우 가운데 가장 나쁜 가정이 된다.

 

5) 이것이 바로 한 세대의 사람들이 끔찍한 실수를 저질러 후손에게 경악과 공포를 일으키는 경우이다. 이런 일 사이에서 우리는 법의 완력이, 최상의 사람들과 가장 고귀한 신조들을 제거하는데 이용된, 역사에서 기억될만한 사례들을 발견한다. 최상의 사람들과 관련해서는 개탄스러운 성공을 거두었지만, 몇몇 고귀한 신조들은 살아남아서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신조들 혹은 그 신조들의 표준해석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흉내라도 내듯이) 비슷한 탄압행위를 가하는데 불려나와 그 탄압을 합리화했다.

 

(중략) 최초의 순교자들을 돌로 쳐죽인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더 악인이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정교회교인들은, 그 박해자들 가운데 하나가 성 바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38%)

 

틀림없다는 생각을 늘 깊생해야 한다. 정말로 틀림없을까. 바울이 비록 회심했지만, 그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 앞장섰었다. 다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때, 그를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막으려고=죽이려고 하는 짓의 뿌리는, 틀림없음을 믿기 때문이다. 틀림수 있음을 늘 깊생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이 허위이고 사회를 해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굳게 믿는것 이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에 대해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박해했다 / 중략) 역사는 박해에 의해 억눌린 진리의 예로 가득하다. 진리는 영원히 억압되지는 않는다해도 몇세기 동안 저지될수 있다." (39~40%)

 

참이 이길것이라는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참은 틀린것들을 밀어내었다. 이 기나긴 길을 없애려면, 틀림없음 따위를 믿는 마음을 멀리해야 한다. 나는=우리는 늘 틀리고 있음을 가슴깊이 새겨넣어두자.

 

"기독교가 전파되어 널리 퍼진것은, 박해가 가끔씩만 일어났고 잠깐 동안만 이어졌(기 때문이다 / 중략) 참이 단순히 참으로서 지하 감옥과 화형 기둥을 이겨낼 수 있는, 낡은 거짓에는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고유한 힘이 있다는 것은 게으른=서글픈 감상주의의 한조각일 뿐이다." (41%)

 

참은=새로운 참은, 고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젓=고개를 젓다에서 나온다. 고끄는 분위기를 좋게 만들지만, 고젓은 새로운 참을 만들게 한다. 분위기가 필요할때는 고끄를 하고, 새로운 무엇이 필요할때는 고젓을 해야한다.

 

"참은 자기 스스로 생각할줄 모르는 사람들이 남에게서 받아들인 참된 의견을 통해 발전하기보다는, 적절한 연구와 준비로 혼자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틀림=다름을 통해 더 발전한다." (43%)

 

사람은, 의견을 가지려면 튼튼한 논리를 세워놓고 가져야 한다. 그럴려면 내생각과 다른생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뿌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 뿌리를 흔들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의견을 가졌다고 할수 있다. 논리가 없다면, 믿는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미신에 지나지않는다.

 

"참된 생각은 정신속에 존재하지만 편견으로서 있다고, 곧 논증과 무관하고 그 논증에 대한 반증과도 무관한 믿음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이성의 존재가 참=트루쓰를 지니는 방식이 아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진리는 진리를 진술하는 말들에 우연히 달라붙은 하나의 미신에 지나지않는다." (44%)

 

내생각을 지켜내는 것뿐만아니라 다른생각의 뿌리를 무너뜨릴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다른 생각의 뿌리와 까닭을 알아야 한다. 그러지못하면 내가 좋아하는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수학의 진리를 증명하는 것은 모든 논거가 한방향이라는 것이다. 반대가 있을 수 없고, 반대에 대한 대답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의 다름 가능한 모든 주제에서는, 진리는 충돌하는 두 까닭=뿌리 사이에서 취해지는 균형에 달려있다.

 

(중략) 자기쪽 주장만 아는 사람은 그 주장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다. 그의 이유들은 좋을 수도 있고, 누구도 그 까닭들을 논박하지 못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반대쪽의 이유들을 논박하지 못한다면, 그 까닭들이 무엇인지 그리 잘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떤 의견을 좋아할 근거도 없는 것이다. 그럴경우 그가 가져야할 이치에 맞는 입장은, 판단의 유예 (중략)

 

그는 반대자들의 주장을 듣되 그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열심히 옹호하고 그것을 위해 온힘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을수 있어야 한다. (중략) 그들의 결론은 참일지 모르지만, 이는 그들이 실제로 아는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엉뚱하게 나온 결론일수도 있다." (44~5%)

 

이나가 없으면, 생각의 뿌리도 힘이 없어지고, 생각 스스로도 잊혀질수 있다. 생각이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이나를 해야한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똑같은 이나를 되풀이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밀의 말대로,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 하려고 했던 것처럼 = 스스로 알지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잘 알려고 힘써야한다.

 

"표준 의견이 진리일 때에는 자유로운 이나=아규먼트의 부재가 그리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유로운 토론의 부재로 인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영향이, 표준의견의 근거들에 대해 잘모르도록 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지성의 해악이라고는 해도 도덕의 해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사실은 어떠냐 하면, 이나=이야기나누기가 부재할 때에는 의견의 뿌리들만 잊히는 것이 아니라 의견의 뜻자체도 너무 자주 잊힌다. 의미를 전하는 말들은 개념을 암시하지 못하고, 암시한다고 해도 원래 전달하려고 했던 개념중 작은 부분만을 암시할 뿐이다.

 

(중략) 어떤것이 더이상 의심스럽지 않게될때, 그것에 대해 그만 생각하는 경향은, 뭇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중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다." (46~9%)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기뻐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그의 생각을 물어보고 바탕을 같이 생각해보고 고끄할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자. 그가 깊생한 것이라면 더욱 그래야한다. 건희석렬의 생각도? 그래야겠지? 아, 어렵다. 부정선거론도? 그래야겠지. 어떻게보면, 부정선거론을 웃기는 이야기로 넘어가는 바람에 이번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늦지 않았는데, 제대로 듣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고마워해야 한다.

"표준의견과 겨루는 사람들이 있다면, 혹은 법이나 여론이 허락할 때 그렇게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하고, 우리의 정신을 열어 그들에게 귀기울이자. 그리고 우리의 확신을 더 확실하고 활력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 해 우리 스스로 훨씬 더 큰 노고를 들여 해야할 일을 누군가 우리대신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뻐하자." (50%)

 

1) 참이라는 것은, 참의 조각들이 조금씩 보태고 덧대어져 여전히 잘못은 있지만, 조금 커다란 참을 만들어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2) 참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뭇사람의 필요에 잘 들어맞는 것이다.

3) 참이라는 것은, 틀린것과 섞여있고 다른것과도 섞여있다.

 

"진보란 뭔가 보태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대체로 하나의 부분이고 불완전한 진리를, 다른 부분이고 불완전한 진리로 바꿀 뿐이다. 향상이라는 것은 주로 진리의 새로운 조각이 대체되는 조각보다 사람들에게 더 필요하고 시대의 요구에 더 적합하다는 데 있다.

현재의 지배의견도 그것이 참된것에 바탕을 두고 있을때조차 이처럼 부분의 성격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므로, 일반의견이 놓치고 있는 진리의 일부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있는 모든 의견은, 비록 그속에 오류와 혼란이 진리와 많이 뒤섞여있다 해도 귀중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50%)

 

칼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밀이 사상의 자유를 바탕으로 참에 다가가는 길과 같다.

 

"세마=사이언ㅅ의 성공은 자정능력에 있다. 세마는 스스로를 교정할수 있다. (중략) 이미 제시된 지혜에 대한 재평가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세마하기의 위력이며 세마하기의 요체인 것이다." (29~30쪽)

 

신약에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공공에 대한 의무 - 관용 - 고결 - 위엄 - 명예의식과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밀의 이런 이야기는 많이 아프다. 이게 정말일까? 돌아온 탕아 - 착한 사마리아인 - 고래배속의 요나 - 무덤에서 일어나 라자로 등등 없나?  

 

"우리가 다음의 격률을 읽는 것은 신약에서가 아니라 코란에서이다.

 

"자신의 영토 안에 더 자격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어떤 직위에 아무나 임명하는 통치자는 신에게 그리고 국가에 죄를 짓는 것이다."

 

공공에 대한 의무라는 관념은 (중략) 기독교가 원천이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용 - 고결 - 위엄 - 나아가 명예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교육의 종교부분이 아니라 사람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며, 드러내놓고 인정되는 유일한 가치가 순종의 가치라는 윤리 기준에서는 결코 자라나올수 없었을 것이다." (53%)

 

신약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나누고 있다고 해서 모든 참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이 너무 짧았다. 구약과 신약에 대한 이런 이야기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진리의 한 부분이 전체라고 배타적으로 자처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 (53%) 모든 참은, 너무 많고 서로 나란하게 서있어서, 뿌리든 가지든 뭐든 이어지기도 하고 떨어져있기도 하다. 어느 하나가 = 그것이 성서라고 할지라도 모든 참을 담아낼수가 없다.

 

"신약으로부터 윤리교의를 뽑아내는 것은, 구약으로 신약을 보충하지 않고는 가능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이 정말 정교하기는 하지만 많은 점에서 미개한 체계이며, 한 미개한 민족만을 위해 의도된 체계라는 점이다.

 

(중략 / 신약의) 말씀은 커다란 도덕이 요구하는 어떤 것과도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중략) 이러한 믿음이 다음과 같은 믿음과 어긋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리의 조각만을 담고 있고, 또 그렇게 의도되었다. 기독교 창시자의 기록된 말씀에서는 가장 고귀한 도덕의 많은 본질요소들이 제공되지 않았고, 또 그렇게 의도되지도 않았으며, 기독교 교회가 그 말씀에 기초해 세운 윤리체계에서는 그것들이=도덕의 본질요소들이 전적으로 내팽개쳐졌다." (52~3%)

 

우리는 괴롭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려면 어떤 의견에도 = 나와 다른 생각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거기에서 아직 알지못했던 새로운 참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으로 써야한다. 말싸움이 결국 칼싸움이 되는 일이 많았지만, 말싸움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게 하는것을 무서워해야 한다. 겪어보면, 말싸움하는 것보다, 말못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무섭다.

 

"해악은 진리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갈등이 아니라, 진리의 절반에 대한 조용한 탄압이다. 사람들이 양편에 다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항상 희망이 있다." (54%)

 

사상과 이나의 자유를 지켜주는 길은 언제나 같다. 거짓없이 이야기하고 - 넓은마음을 가져야 하며 - 좋은 마음으로 귀기울여야 한다.

 

"누구든지, 그가 논쟁의 어느편에 서 있든지, 그 주장하는 방식이 정직함의 결여, 악의, 편협, 혹은 다람의 감정에 대한 불관용을 드러내는 사람은 모두 비난받아야 한다. (중략) 어떤 것도 반대자들에게 불리하게 과장하지 않고, 반대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혹은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것도 감추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건, 그에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이것이 공공 토론의 참된 도덕이다." (55%)

 

3장 복리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에 관하여

 

사상과 토론의 자유는 알겠는데, 그러면 움직일 자유는 조금이라도 제한받아야 하는 것일까?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다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삶을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생각도 몸놀림도 근육도 단련되어야 하는데, 스스로 해야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 움직이고 - 단련시켜야 한다. 욕망과 충동도 스스로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관습이니까 행하는 사람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중략) 근육의 능력처럼 정신•도덕의 능력도 사용될 때에만 발전된다. 그저 다람들이 하기때문에 따라서 하는 것으로는, 단지 다람들이 믿기 때문에 따라서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능력들이 훈련되지 않는다.

 

어떤 의견의 근거들이 자신의 이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가 그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이성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빠지기 쉽다. 어떤 행동의 유인들이 그 자신의 감정 및 성격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의 감정과 성격을 활력넘치게 하는 대신에, 무기력하고 무신경하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57%)

 

사람은 나무이다. 빛을 받는 쪽으로 자라기도 하지만, 어느쪽으로든 크려고 한다.

꺾이거나 단단해지면서 멋지게 자라도록 알맞게 돌봐줘야한다.

 

"사람의 본질은 모형을 따라 만들어져 지시된 일을 정확히하도록 설정된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몸안 힘들의 성향에 따라 사방으로 크고 발달해야 하는 나무이다." (59%)

 

사람이 만드는 작품 가운데 첫번째로 아름다운 것은, 사람 자신이다.

"사람이 사람의 사룸=라잎을 써서 아름답게 만드는 작품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자신이다." (59%)

 

욕망과 충동이 넘치는게 문제가 아니라 없는게 문제다. 욕망과 충동이 나쁜짓을 하게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악하게 행동하는것은 그들의 욕망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중략) 사람의 본성을 위협하는 위험은, 충동과 선호의 과잉이 아니라 그 결핍이다.

 

(중략) 그들은 흔히 행해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선택권을 행사한다. 그들은 특이한 취향, 별난 행동을 범죄인양 피하고, 마침내 자신의 본성을 따르지 않은 결과로 인해 그들이 따라야 할 본성자체를 잃고 만다. 그들의 능력은 시들고 굶어 죽는다. 그들은 어떤 강한 소망이나 자연스런 즐거움도 갖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 키운 혹은 진정으로 자기자신의 것인 의견이나 감정도 대개 갖지 못한다. 자, 이것이 사람본성의 바람직한 상태인가, 아닌가?" (58~9%)

 

뛰어난 힘은 얼마든지 펼칠수 있게하되, 다람들 위에서 설치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법과 조례와 뭇사람의 힘으로 되게 만든것이고, 그것이 민주정이다.

 

"지위나 홀사의=인디비듀얼 재능 덕분에 쎈 힘을 가진 사람들의 열정이 법과 조례에 대해 거듭해서 반란 상태에 있었고, 그리하여 그 열정을 단단히 묶어놓아야,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안전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이래 세상은 크게 변했다" (60%)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이게 뭔소리지 하는 글들이 나온다. 마음이 가라앉도록 다듬어보자.

 

1) 어떤 조건이, 사람이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하게 한다. 그 조건은 매조은=매우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

2) 어떤 울타리가, 착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울타리가 있다. 그 울타리는 매나쁜=매우나쁜 것이다.

3) 위 두가지를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잘 이야기하려면, 뭔가가 더 있어야한다.

 

"개성이 발전과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오직 개성의 양성만이 잘 발전된 사람을 낳거나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말했으므로, 이제 여기서 논의를 접을 수도 있을 것같다.

 

1)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조건에 대해서든, 그것이=그조건이 사람자체를, 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더 가까이 이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좋게 말할 수 있을까?

2) 또는 선에 대한 어떤 장애에 대해서든 그것이 선을 가로막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나쁘게 말할 수 있을까?

3)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분명 가장 납득시킬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60%)

 

우리를 만든 하느님도, 사람이,

그의 뜻에 따르기보다는 스스로를 찾아가는 자유로움을, 더 사랑하고 기뻐하셨을 것이다.

 

이말을 하려고 밀은, 길고긴 글들을 이어나간다. 재미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관습인=유행하는 것말고는 다른 어떤 성향을 갖는게 떠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자체가 그 굴레에 복종한다. 심지어 즐거운 일을 할 때조차 사람들이 첫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관습이다. 그들은 군중속에 있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흔히 행해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선택권을 행사한다.

 

그들은 특이한 취향, 별난 행동을 범죄인듯 피하고, 마침내 자신의 본성을 따르지 않은 결과로, 그들이 따라야 할 본성 자체를 잃고 만다. 그들의 사람다운 힘은 시들고 굶어 죽는다. (중략) 칼뱅주의 이론으로 따지자면, 그것은 바람직한 상태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큰죄 중 하나는 자기의지이다. 뭇사람이 할수 있는 모든 선은 복종속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은 반드시 복종해야 하고, 다른 길은 없다. "의무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 죄이다." 사람의 본성은 뿌리에서부터 타락한 것이므로, 누구라도 사람본성이 그안에서 죽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구원이 없다. 삶에 대해 이런 이론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람의 재능, 능력, 감수성을 부수는 것이 악이 아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는 능력말고는 어떤 능력도 필요하지 않다. (중략)
이것이 칼뱅주의의 이론이다.

 

그리고 칼뱅주의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도 그것을 완화된 형태로 가지고 있다. (중략 / 하느님을 기쁘게하되) 그들 자신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종의 방식으로, 즉 권위에 의해 그들에게 지시된 방식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필연으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을 기쁘게하는 것이다. (중략)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갑갑하고 작아져버린 사람이, 그들의 창조주가 그들을 설계한 모습 그대로라고 진정으로 생각한다.

 

(중략) 그러나 사람이 어떤 선한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이 종교의 일부라면, 칼뱅주의 신앙과 더 일치하는 믿음이란, 이 선한 존재가 부여한 모든 사람의 재능은, 뽑혀 나가거나 소모되기 위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길러지고 펼쳐지기 위해 부여되었다고 믿는 것이요, 그의 피조물들이 그들속에 체화되어 있는 이상관념에 매번 더 접근할 때마다, 또 그들이 이해하고 행동하고 즐기는 힘이 늘어날때마다, 신께서 기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61%)

 

밀은 사람의 개성이 왜 어떻게 지켜지고 펼쳐져야 하는지를 말한다.

개성들이 꽃피울수록 삶은 풍부해지고 공동체 유대는 더욱 끈끈해진다.

그런데, 늘 이런 조건이 붙는다.

 

다람들의=다른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이 지켜지고,

혹시 나의 개성이 그들을  기분나쁘게 할지라도, 나의 개성을 드러내고 키울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명상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자체로 개성을 지닌 모든 것을 닳아버리게 하여 비슷한 것들로 만드는 것으로가 아니라, 다람들의 권리와 이익이 지켜지는 한계안에서 개성을 키우고 불러내는 것으로다.

 

(중략) 사람의 삶 역시 풍부해지고 활기넘치게 되며 (중략) 뭇사람을 훨씬 더 소속될 가치가 있는 공동체로 만듦으로써 모든 홀사를 뭇사람에게 묶는 유대는 더욱 끈끈해진다.

 

(중략) 다람들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지않는 일에서 단지 다람들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제약을 당한다면 (중략) 본성 전체를 무디고 둔하게 한다." (61%)

 

밀의 시대에 = 1859년을 앞뒤로 한 시대에 민주정과 자본주의가 만든 다원성이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걱정했다. 지금 유럽이 잘나가는것은 자유와 다원성인데, 종교와 관습과 민주정의 이름으로 자유가 뒤로 물러앉는 것처럼 보인것이다. 3장을 통틀어 유별난 사람들의 자유 - 우리 모두의 자유 - 기분나쁠지도 모를 자유가 다원성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새로운 진보와 개선으로 나간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모두가 비슷해지면 유럽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저않게 될 것이라고 했고, 지금의 유럽이 꼭 그런 상태다.

 

다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과 다람을 불쾌하게 만드는것을 뚜렷이 나눌수 있을까? 쉽지않아 보인다. 게다가 없는 죄나 없던 권리도 만들어지는 세상이기 때문에 비싼 변호사를 사면, 기분이 나쁜것과 권리가 다쳤다는 주장이 같아질수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나눠보기는 한다.

 

"내가 판단하기에, 유럽이 진보하고 여러가지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다원성에 통째로 빚지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유럽이 이런 혜택을 받는 정도는 이미 상당히 적어지기 시작했다. 유럽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들려는 중국의 이상을 향해 확고히 나아가고 있다.

빌헬름 폰 훔 볼트는 두가지를 사람발전의 필수조건 - 사람들을 서로 다르게 하는데 필수이기 때문에 - 으로 지적하는데, 곧 자유와 상황의 다양함이다. 이 두 가지 조건 중에 두 번째 것이 이 나라에서 매일 줄어들고 있다." (67%)

 

4장 홀사에 대한 사회의 권위의 한계에 관하여Dk

 

(투비 컨티뉴ㄷ 라잌 리딩 어 테스터먼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