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시커멓게 탄 반장에게 갔더니 콤바인이 빠진 것이 아니고 궤도가 낡아서 끊어진 것을 교체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우리 논은 토요일 아침에 마을 논을 하고 연이어서 하겠다고 한다. 논에 물이 고여 있어서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걱정 말란다. 논에 물을 대고 있어도 콤바인 작업은 할 수 있다고 한다. 반장네 논 쪽으로 물꼬를 터 놨다고 했더니 잘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데로 메주를 하우스로 옮겨 달고 논으로 갔다. 혹시나 오늘 벼를 벨 수 있을까 싶어서다. 메벼 논의 입구를 베고 나서 논의 중간을 살펴 보니 아직도 물이 고여있다. 찰벼 논에서도 계속해서 물이 흘러내린다. 이유는 아무래도 논 주변의 배수로가 약해서 그런 모양이다. 내년에는 반드시 배수로를 파내고 모를 심으리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반장네 논으로 물꼬를 트기로 했다. 그게 가장 짧은 배수로 길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오늘 중으로 끝낼 수는 있을까. 배수로로 물을 빼낸다고 해서 콤바인 작업은 가능할까. 온갖 의문이 들지만 할 수 있는 일이나 하자.
삽으로 벼의 양쪽을 자르고 앞에서 뿌리를 충분히 거두어 팠다. 그리고 모포기 사이로 옮겨 놓았다. 농부들은 이 작업을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에 해 놓는다. 몸수는 웬만하면 일을 줄이려고 이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도 15년을 문제없이 농사를 지었다. 이제 새삼스럽게 농부를 따라서 일을 더 해야 할까. 그때 가서 결정하자.
땅이 굳은 곳은 작업이 수월했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일한 티가 난다. 두 개의 벼를 들어 옮기니 배수로의 폭도 30cm가 넘고 뿌리를 온전히 걷어 올리니 깊이도 20cm가 넘는다. 눈은 게으르지만 몸은 성실하게 목표를 향해 잘 나가고 있다.
드디어 물이 차는 지역 근처까지 왔다. 삽에 흙이 걸리고, 딛고 있는 발이 논에서 빠지지 않으니 일이 고되고 힘들어진다. 하나씩 하나씩 하자. 물이 고인 쪽으로 방향을 틀어가며 일을 해냈다. 대략 40미터의 배수로가 완성이 되었다. 물이 콸콸 흘러가는데 마지막 배출구는 찔찔 흘러 나간다. 배출구의 높이가 너무 높다. 확 파내야 하는데, 더 이상 기운이 없다. 벌써 네 시간째 삽질을 하고 있다. 힘들어서 못하겠다.
집으로 돌아가서 누웠다. 대검찰청 국정감사를 3시간 넘게 지켜봤다. 재미있었다. 어머니와 동태탕에 저녁을 먹고 부천으로 올라왔다. 올라오면서 일당백의 나폴레옹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일이 되어가는 방향으로 나를 맞추며 하루를 보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내 의지대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내 뜻대로 된다는 것은 오만이다. 오만한 마음을 뒤로 하고, 되어가는 방향으로 맞추니 마음이 편안했다. 이런 연습을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