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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무수한 모르는 친구들과 즐거웠다_중국인이야기 2권과 여행의 이유_200915

음성 평생학습원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공무원 교육원의 인터넷 강의를 개방하였다. 몇 개의 강좌를 듣고 전자책도 한 권 빌렸다. 

 

1. 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 문학동네(2019)

 

서문이 재미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중국으로 한 달 간의 여행을 떠나 왔는데, 공항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재미 있다. 여행은 망쳤지만 결국 비슷한 시간을 들여서 한국에서 스스로 유폐 생활을 해서 원하던 글을 마칠 수 있었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글쓰기가 목적이었으니 툴툴 털어버리고 잊어 버릴 수 있었다.

 

여행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호기심을 채우는 행위다. 언어와 문화와 자연이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호기심은 온갖 사고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 집이 우리나라가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돌아온다. 또 떠날 준비를 하면서. 무거운 의무와 책임이 있지만 나 자신이 온전하게 인정되는 곳이 역시 좋다. 영원히 떠 도는 것이 가능할까.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의 침대에서 매일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자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혜의 여신이 그를 다시 고난의 여행길로 끌어냈고 그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기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곳으로 돌아갔다." (61%)

 

젊은 날의 나는 즐거운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다. 삼십 대에 들어 그리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비로소 즐거웠다. 이십 대의 나는 늘, 생명을 건다는 느낌으로 살았지만, 그후로는 별로 위험하지 않은 세상을 살았다. 마음이 놓였다. 욕심이야 한도 끝도 없겠지만 가족과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며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여행지에서 특히 인도와 터키에서 우리는 모르는 무수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눴다. 그들이 나를 칭송하지 않더라도 나는 마냥 즐거웠다. 아무도 우리를 알아봐 주지 않는 곳에서도 그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래서 지구인으로서의 유대감을 느껴, 즉 모르는 친구가 많이 생겨서 그것 또한 좋았다. 불친절하고 사악한 난폭자들은 빨리 잊고 싶은데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자'로서 충분히 즐거운 여행들이었다. 

 

"젊은 날의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의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특별하게’ 분류되고, 일단 분류된 이후에는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somebody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71%)

 

음성에 방을 하나 마련해서 우퍼들을 woofer 받을까 생각을 해 봤다. 완전한 타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부담스러운 만남일 수도 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농사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위험할 수 있을까. 밥과 술을 해 먹이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울까. 겪어보기 전에는 뭐라 이야기 하기 어려운 문제다.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은 여행만큼 흥미로운 일이다. 더 나이가 들어서 세상이 별로 힘들지 않을 때, 한 번 시도해 보자.

 

"외부에서 오는 타자는 위험하면서 동시에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72%)

 

여행을 하면 주로 한국인이 되었다가 한국인 여행객을 만나야 비로소 내가 된다. 나는 변한 것이 없는데도 한국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내세울 것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인의 위상이 높은 곳에서 나보다 뛰어난 한국인들을 배경으로 하여 당당하고 자신있게 여행할 수 있어서 좋다. 많은 시간을 걷고 보노라면 머릿속에서 무지막지한 생각들이 튀어 나온다. 정리해 보면 대단한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맑은 정신에서 편안하게 솟아나는 생각들이 즐겁다. 뭔가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듯 착각한다. 즐거운 착각 속에서 며칠이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여행은 행복하다. 나이면서 한국인이기에 몇 배는 더 위대한 나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모양이다. 위대한 사람은 좀 다른 모양이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만 아는 상태가 지속되면 키클롭스의 섬으로 쳐들어가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심리 상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76%)

 

오늘 멀리서 들리는 욕설을 들었다. 이유없는 욕설. 욕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다른 사람이 내지르는 욕을 들었으니, 시원해야 할 텐데, 그 욕설이 몹시 불편했다. 누군가 나의 욕설을 듣고도 그럴 것이다. 이제 욕도 못하는 나이가 된 모양이다. 현명한 노인은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욕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것을 존중하고 환대에 감사하며, 예전의 지위를 버리고 생기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로서 조용히 말하고 겸손하게 행동해야 한다. 다만, 생각은 멋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86%)

 

전자책의 반납 시간이 다가와 읽어야 할 많은 책들을 뒤로 하고 김영하의 책을 먼저 끝냈다. 바캉스용 책이라니 놀러갔다 생각하고 편안하게 읽었다. 4년 정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원래 살던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 참 부러웠다. 집과 농장을 처분하고 어디론가 오래 다녀왔다가 아무 연고가 없는, 그렇지만 살고 싶었던 곳으로 가서 몇 년 살아보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이겠다. 삶을 우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백 년간의 짧은 여행에 불과하다. 철저하게 여행의 방식으로 접근하자. 오랜 친구와 가족들은 카톡 공간에서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집과 땅이 고정될 필요가 없이 카톡만 고정되어도 외롭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다. 그러니 진짜 삶은 온몸의 감각을 열고 두려움과 호기심을 채워 나가자. 저 세상에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 가득하다. 용기를 내자.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96%)

 

 

2. 중국인이야기 2권 : 김명호 지음 / 한길사

 

쑨원의 오른팔이었던 1세대 혁명가 랴오중카이는 샌프란시스코의 부유한 화교 가정에서 자라며 동서양의 고전을 공부한 사람이다. 랴오중카이의 아버지는 전족을 중국의 수치라 여겨 아들에게 전족하지 않은 여자와 결혼하라며 유언했다. 랴오중카이의 부인은 허샹닝으로 천족이다. 그런데, 이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허샹닝은 6살때 무려 스무 차례에 걸쳐 전족을 거부해 천족 즉 자연스런 발을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일본에서 유학하며 쑨원을 만나 중국 혁명의 길로 접어 들었고, 장제스와는 황푸군관학교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랴오중카이가 암살당한 후에도 중국 혁명을 위해 헌신한 허샹닝은 장제스가 개인 독재로 나아가자 혁명의 배신자라며, 국민당의 모든 당직을 벗어 던져 버렸다. 스스로 그림을 그려 판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혁명 사업을 지원했다. 무슨 일을 하든 돈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더 당당할 수 있다. 중국이 중국일 수 있는 것은, 이런 중국인들의 힘이었다. 

 

"장제스가 인편에 100만 위안을 보냈지만 “한가하게 그림이나 그리는 생활, 돈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쉽다”는 글과 함께 돌려보냈다." (2권 6%)

 

쑨빙원과 쑨웨이스의 이야기도 안타깝다. 쑨웨이스는 모스크바에서 영화와 연극을 전공한 전문가로 활동했다. 장칭의 진면목을 알기에 마오쩌둥의 아내가 된 뒤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문혁의 대폭풍 속에서 쑨웨이스가 벗어나지 못한 이유였다. 저우언라이의 비겁한 행동도 매우 아쉽다. 그저 이야기였을 것이다. 

 

"1927년 4월, 국·공합작을 파기시키고 공산당 숙청에 나선 장제스는 쑨빙원이 체포되자 직접 찾아가 고관후록(高官厚祿)을 약속하며 회유할 정도로 평소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거절당하자 요참을 지시했다. 쑨빙원은 체포 4일 만에 상하이(上海)의 룽화(龍華)감옥에서 몸이 두 동강 나는 처참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다. 쑨웨이스가 여섯 살 때였다.

 

(중략) 저우언라이 부부는 쑨의 어머니에게 “열사의 혈육을 우리 딸로 삼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허락을 받았다. 저우언라이 부부는 혁명가 유자녀와 지하공작자의 자녀들을 무수히 수양아들과 수양딸로 삼았지만 쑨은 이들과 경우가 달랐다.

 

(중략) 중요 인물의 체포는 저우언라이의 서명이 필요했다. 저우는 진땀을 흘렸다. 이날 장칭은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와 저우의 동생에 대한 체포지시서도 덤으로 받아내었다. (중략) 군이 관리하던 베이징(北京) 공안국에 끌려온 쑨웨이스는 7개월간 얻어맞기만 하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쑨웨이스는 “열 명의 군자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한 명의 소인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만 명심했어도 피할 수 있는 화를 자초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똑똑한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경구 따위를 익힐 기회가 없었다." (2권 7~8%)

 

중앙의 저우언라이와 맨 왼쪽의 쑨웨이스. 당당하게 살았으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중국인이야기에서 캡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