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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나이듬은 거칠고 사나운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_국향전 02_200626

전쟁을 읽고 있으니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끝을 모르는 전선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병사들이 어울려 축구를 하며 우정을 나눈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했을까.

 

왜놈들과는 모든 분야에서 교류한다. 사실 왜놈들이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 일본인들 모두가 제국주의 침략자는 아니다. 증오를 끝내야 한다. 제국주의자들의 '반성하지 않는 삶'은 계속 지적해야 하지만 일본인은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 식민 침략을 한 일본과는 희생자들이나 피해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방위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원수였던 일본과의 교류는 대한민국의 생존에 긴요했다. 일본이, 우리의 6 25 전쟁으로 2차 대전 패배의 폐허를 극복하게 된 것은 모르고, 훌륭한 나라라며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아베와 코로나 상황을 겪는 지난 십여 년 동안에 다행히 이런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다행이다.

 

내전을 치른 같은 민족 북한과의 교류는, 끔찍할 정도로 무섭고 두렵다. 북한과의 평화를 이야기하면 김일성 추종자가 되어 버린다. 나를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남북평화를 추진하자고 이야기해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받는다. 내가 사는 곳의 민심이 그렇다. 북한은, 가장 가까운 원수다. 같은 민족인데도 서로를 더 많이 죽이려 했기에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같은 민족으로 남만 못하게 사느니, 차라리 남남으로 대하는 것이 낫다. 남북한은 남남이다. 제발 그렇게 알고 살자.

 

이제 6 25 남침이 있은지 70여 년이 지났고, 우리는 남남이 되었다. 우리를 죽인 원수들도 거의 대부분 한 줌의 재가 되었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쟁의 원죄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언어가 비슷하고, 역사를 공유하고, 유전자가 비슷하다. 그냥 비슷한 남이다. 이제 남처럼, 일본 사람들과 그러하듯이 그렇게 교류하며 평화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일본이 5, 60년대에 우리와 베트남 덕분에 먹고살았듯이, 우리도 일본 덕분에 먹고살게 되었다. 그들의 길을 따라간 것만으로도 성공했다. 이제는 남한이 북한에게 먹고살 길을 제시하고, 남한은 북한의 노동력과 자원을 이용하여 더욱 잘 먹고 잘 살자. 남남으로 살자. 그것이 평화의 길이다. 대한민국이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사는 길이다.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해 전쟁으로 가는 길과 전쟁 그 자체를 공부한다.

 

1. 국가 : 플라톤 저 / 조우현 역 / 올재 클래식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다. 대학 때 이것을 영어로 강독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D-를 맞았다. 오랜 만이다. 재수강 안되려나.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해가 되는 도입부의 이야기도 머릿 속에서 혼란스럽게 섞여 버린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잘 관리해서 부유한 노년을 보내는 케팔로스. 욕망이 사라지고 세상의 존경을 잃었다는 노인들의 불평은, 품성 때문이라는 주장을 편다.

 

나이 든 노인들은 욕망이 사라진 것과 존중받지 못하는 것을 불평한다. 그러나 케팔로스는, 노인들의 이런 불만은 품성이 좋으면 즉 '사리 분별을 잘 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그렇다는 것이다. 성욕이 사라진 것을 기뻐하며 '마치 거칠고 사나운 주인에게서 도망친 것 같다'는 소포클레스의 말을 인용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슬슬 펼쳐진다. 강유원은 논박술 elenchus이라 하고, 다음사전에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socratic elenchus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케팔로스는 품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부유하기 때문에, 많은 위안거리를 가지고 있어서 늙어가는 것을 잘 견딘다' 고 하는데, 부자의 가장 큰 이득이 무엇이냐고 소크라테스가 묻는다.

 

케팔로스의 주장은 이렇다. 노인들은 살아서 지은 죄에 대해 죽어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 죄는 3가지인데,  1) 신에게 약속한 제물을 바치지 않은 것 2) 빚을 갚지 않은 것 3) 사기 치는 것이다. 이런 죄에서 벗어날 때 쓸모가 있는 것이 재물이라고 답한다. 물론 좋은 품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돈이 있을 때.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갑자기 이야기를 '정의'의 정의로 끌고 간다. 앞뒤 맥락이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주제의 전환 또는 설정이 나로서는 매우 이상한데,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세 가지를 두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것을 정의라고 설정한다. 이상하지만 다들 이해한다고 하니 나름대로 억지로 이렇게 이해해 볼 수는 있다. 나이 듦에 대해 불평하지도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노인을 신과 인간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하자. 그런데 케팔로스의 주장에서 나오는 것은 이렇게 두 가지의 내용이니 그것이 과연 '정의'인가를 한 번 따져보자.   

 

"소크라테스 님,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재물은 이런 것을 위해서 가장 쓸모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중략) 참으로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케팔로스 님.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정의라는 것에 관해서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누군가가 남에게서 무엇을 빌렸으면 그것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야 할까요? (중략) 그렇다면 이것은 정의 正義 justice의 정의 定意 meaning는 아니죠. 즉, 진실을 말하는 것과 빌린 것을 되돌려주는 것 말입니다." (23쪽)

 

 

2. 향연 : 플라톤 지음 / 김영범 옮김 / 서해클래식 020_200628

 

새로 바뀐 다음 블로그에서 수정 버튼을 어제야 찾았다. 거참. '향연'은 그래도 '국가' 보다는 도입부가 좀 낫다. 논박술 또는 문답법 socratic elanchus 가 펼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문답법에 elanchus 들어가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맞는 부분, 이해하는 부분은 극히 적고, 억지, 건너뛰기, 무리한 논증 등등이 이어진다. 내가 읽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혹시 강유원의 설명을 잘 들으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신인 에로스에 대해 찬양하는 시와 송가를 짓기로 하고, 처음에 문제제기를 한 파이드로스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태초에 카오스에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있었고, 제일 먼저 에로스가 태어났다. 즉 고안해 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으로 아름답게 살려는 사람을 평생 이끌어가는 일을 맡고 있다. 세 가지의 사랑, 1) 페르세포네를 만나러 지옥으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 2) 아드메토스의 죽음을 대신해 죽는 알케스티스 3)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 세 사람의 사랑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내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에로스가 불어넣어주는 사랑의 힘이, 인간을 용맹하고 위대하게 만들기에 에로스가 영향력 있는 신이라고 파이드로스는 칭송한다.

 

"만일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들로 구성된 도시 국가나 군대를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이상적인 조직은 없을 걸세. 그렇게 되면 불명예스러운 일을 멀리하고 서로 명예를 다툴 테니까. (중략)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거나 위험에서 구해 주지 않을 정도로 비겁한 사람은 없다네. 에로스가 직접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 용감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지." (34쪽)

 

파우사니아스는 두 가지의 에로스를 이야기한다. 1) 고귀한 영혼이 아닌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사랑, 세속의 아프로디테가 상징하는 에로스로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다. 2) 훌륭한 품성(아레떼)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랑은, 천상의 아프로디테에 속하는 아름다운 에로스다. 후자의 에로스는 지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을 얻기 위해 노예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용서받을 수 있으며, 훌륭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여 사기를 당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품성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름다운 행위로 비난받지 않는다고 한다. 

 

3. 제1차세계대전 : John Keegan 지음 / 조행복 옮김 / 청아람미디어_200630

 

저자인 존 키건의 글을 조용히 따라가는 것으로 만족을 하다가도 이런 내용들이 나오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소수의 강대국이 거대한 종속 민족들을 통제하는 대륙' (34쪽) 유럽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이야기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문장에서는 인간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노예 생활을 했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 성노예로 살았던 우리의 누이와 딸들, 기계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던 우리의 아버지와 형, 동생들 등등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사를 저런 잘 정돈된 문장으로 배웠던 나도 우리들의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인간 노동을 책을 통해 배운 나는 노동을 신성하다고 말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비로소 노동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꼈고, 벗어나야 할 고통이라고 믿게 되었다. 인간은, 적어도 한 달에 사나흘은 고된 노동으로 삶의 고통, 노동의 고단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온 세상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풍요를 만끽하던 유럽에서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 많은 노예를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잘 제어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그러다가 스스로도 욕망의 피해자가 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지는 무역 전쟁. 번영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중국의 일대일로와 그것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도 1차 대전 전인 1900년의 영국과 독일의 탐욕 대결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잘 제어 관리하지 않으면 아시아를 전란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다.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평화 의견을 계속해서 내야 한다. 세계시민으로서.

 

"최악의 경쟁을 유발한 것은 1900년 제2차 함대법을 제정하여 영국 해국과 교전할 수 있는 함대를 건설하겠다는 독일의 결정이었다. 그때쯤이면 독일 상선대의 규모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컸는데도, 영국은 제2차 함대법의 제정을 100년에 걸친 영국의 해상 지배를 부당하게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적절히 대응했다."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