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서재

부동(不同)의 유사성으로 나타낼수록 은유는그 참뜻을 그만큼 쉽게 드러낸다_장미의 이름 상권 02_200630 el treinta de junio_el martes_ вторник тридцать

두 달 만에 다시 장미의 이름을 읽는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적어도 열 개의 공부를 함께 했다. 지금은 일을 하고 인간관계에서 해야 할 일들도 있어서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 열 개는 아니더라도 서너 권의 책을 함께 읽는 게 바보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니니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그래서 por eso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독서 후의 나도 나쁘지 않다. 단 하나 만이라도 기억하자는 친구의 독서법과 칭찬할만하다. 다 잊어버리느니 하나라도 기억하자. 

 

두 달 전에 정리한 내용을 다시 읽어 보니, 과연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특히 만 권의 내용을 집약했다는 것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윌리엄 수사가 영국 사람으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의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교회에 대한 과세를 금지하자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가 화폐의 국외 반출을 금지하여 교황청의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교황이 필리프 4세를 비난했지만 삼부회를 소집해서 국내의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한 다음 교황을 압박하였다. 필리프 4세는 클레멘스 5세를 포함한 7명의 교황을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1309~1377까지 머물게 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타격을 입고 있던 교황권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부패한 신부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등장한 것이 프란치스코 수도회인 모양이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참으로 시원하다.

 

"성자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천사의 길을 가실 것인즉, 두고 보자, 썩은 목자들아!" - 장미의 이름 상권 21%

 

마녀사냥으로 가톨릭의 사제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아름다운 여인과 하늘에 닿을 듯한 재물과 천국에서도 제일 윗자리에 앉을 만한 하느님의 은총을 얻었을까. 그게 아니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즐거움이라도 얻었을까. 조사관이었던 우베르티노는 교회와 성직자의 청빈을 강조하는 썩 괜찮아 보이는 수도사다. 그런 그가 왜 말도 안 되는 이단 심판에 동조했을까. 그 답이 이 소설에는 나올까. 신부들은 정말로 세상을 그렇게 갖고 싶었을까.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믿기는 한 걸까. 모든 것이 궁금하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제나 이르는 결론은 신부는 성직자가 아니라 인간이다. 내가 우리 집의 제사를 주관한다고 해서 성직자는 아니듯이. 

 

"동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기쁨보다 유효한 게 딱 하나 더 있지요. 바로 고통이랍니다. (중략) 고문을 당하면, 어디서 들었던 것, 어디에서 읽었던 게 고스란히 머리에 떠오르지요. (중략) 고문을 당하면, 조사관이 알고 싶어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사관을 기쁘게 할 만한 것까지 모조리 말하게 됩니다. 고문당하는 자와 고문하는 자 사이에 어떤 유대(이거야말로 악마적인 유대가 아니겠어요)가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장미의 이름 상 24%, 윌리엄이 고문으로 이단을 밝히려는 우베르티노에게 항변하며)

 

진지한 몸가짐으로 성스러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좋은데, 14세기의 수도원에서는 심각한 수준으로 웃음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단순히 웃음과 진리를 연결하기 위해  이런 토론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을리는 없다. 즐거움과 진지함은 대립하지 않는다. 어떤 깨닮음이 올 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듯이 인간은 즐거우면 웃게 되고, 가장 즐거운 때가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을 때이다. 나중에 다시 읽을 기회가 생기면 혹시 이 부분의 논쟁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웃음은 목욕과 같은 것이지요. 웃음은 사람의 기분을 바꾸어 주고, 육체에 낀 안개를 걷어 줍니다. (중략 / 성서가) < 스스로 결정하라>고 남겨 둔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의 이성을 발동할 것을 (하느님께서는) 요구하십니다. (중략) 우리의 이성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므로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킨다면 하느님의 이성 역시 만족시킬 테니까요. (중략)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데 웃음은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이란 사악한 것의 기를 꺾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미의 이름 상 49%, 윌리엄이 호르헤 수도사에게 웃음에 대해 항변하며)

 

지금까지의 소설의 흐름을 보면, 보수근엄파와 자유탐구파의 충돌로 자유탐구파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공인된 권위자가 전달하는 진리만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권하는 보수 근엄파. 혼란스럽더라도 호기심을 갖고 진리를 대하려는 즐거운 자유 탐구자들의 대결. 진리를 지킨다는 방향은 같은데, 과정이 달라서 결국 두 사람의 죽음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우주신이 물려준 아이패드로 부천시립도서관에서 다운받은 전자책으로 읽고 있다. 책과는 다른데, 이제 적응이 된다. 앞으로 좀 더 많은 책을 이런 방식으로 읽고 싶다. 책이 좋지만 자원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 이런 디지털 방식이 좋은 대안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드소가 알 수 없는 여인과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랑으로 가는 과정이 없는 비약이지만 배치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사랑과 진리와 성인의 희열이, 사랑과 진리를 맞이하는 희열이 한 줄기라는 의미로 배치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 죽는다"는 미켈레 수도사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죽고 싶지 않아도 마녀사냥으로 죽이려는 데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피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 훼절하지만 않는다면, 목숨을 구해 앞날을 도모해야 한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어제 새벽에 박원순 시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미리 쓴 그의 유언장 내용이 괜찮다. 마지막까지 하늘이 내려준 삶을 다 살고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죄지은 것도 갚아가면서. 그의 삶에는 공과 과가 있다. 공은 칭송해야 하고, 과는 반성과 사죄와 처벌을 받아야 한다. 죽음을 통해 얻는 것이 아무리 많더라도 삶과 함께 해야 했다. 죽음은 지은 죄에 대한 최고의 형벌이다. 스스로 그 형벌을 택해야 했던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그래도 살아서 처벌받고 반성하고 죄 갚음을 했어야 했다. 그럴 용기를 길러 두어야 한다. 겸손의 미덕을 갖추기도 쉽지 않지만 잘못을 반성하는 용기도 기르기가 쉽지 않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관심을 기울이고 미덕과 용기를 쌓아나가야 한다. 누구는 1m를 쌓고 누구는 1km를 쌓겠지만 쌓아가야 한다.

 

"내가 어째서 성인들이 천상적인 삶의 황홀을 표현할 때 쓰던 말을, 아무리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미켈레 수도사의 죽음의 황홀을 표현하는데 썼던 것일까? 그런데도 나는 어째서, (중략) 나를 괴롭힐 저 죄 많고 무상한 지상적 쾌락의 황홀을 그리는 데 같은 언어를 동원하고 말았던가? (중략 /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사가, 수사적 표현이 되어 있으면 되어 있을수록, 글자 그대로의 유사성이 아닌 부동(不同)의 유사성으로 나타낼수록 은유는그 참뜻을 그만큼 쉽게 드러낸다 (중략) 사자와 뱀이,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유가 될 수도 있고 악마의 은유가 될 수도 있다." - 장미의 이름 상권 90%

 

이제 상권을  다 읽어간다. 그래, 이번에는 꼭 다 읽자. 그래서 몇 부분은 대충 읽었다. 사제들의 이름을 열거하거나 도면을 말로 설명하거나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 등을.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을 대충 넘긴 까닭은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응용할 수 있게 정확하게 써 놓았을까. 궁금하기는 하다. 

 

시베리아의 땡볕에 놀라며 찾아 간 이르쿠츠쿠 카잔 성당